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41)화 (41/135)

41.

조지 콜튼은 엉망이 된 얼굴을 조금 진정시키고 나서야 왕비를 만나러 갔다. 왕비의 불안증이 커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병명을 알 수 없는 왕비의 증세는 점점 악화되기만 하고, 그럴수록 그녀의 정신은 무너져갔다. 원래도 강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 표독스럽게 굴던 그녀를 잘 아는 콜튼 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콜튼 경?”

“예, 접니다.”

몸이 좀 나아졌는지,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왕비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콜튼이 충직하게 그녀의 손길대로 침대 가까이 다가서자, 그녀가 짧게 혀를 찼다.

“얼굴은 왜 그런가.”

“별일 아닙니다.”

왕비는 그 이상 묻기 힘들었는지, 짧게 한숨을 쉬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시녀에게 손짓해 침실 안의 모두를 물렸다. 그걸 보는 조지 콜튼의 눈이 가늘어졌다.

“후작은 든든하게 왕자의 편이 되어줄 거야.”

힘없는 목소리가 몹시도 작아서 그는 살짝 허리를 숙여 귀를 기울여야 했다.

“예, 아무래도. 후작도 황국의 후광이 없다면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질 테니까요. 달리아 백작을 견제하고 왕자님과 왕비님을 도울 겁니다.”

“그렇지만, 후작 부인은 아니지.”

마가렛이 독기 어린 눈으로 그를 보며 하는 말에, 조지 콜튼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사실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지젤은 기억을 잃지 않았다. 교묘하게 왕비의 입지를 갉아먹고 배척하는 걸 보면 이쪽에 원한도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선택적이었다. 그녀가 왕비를 벌하고 싶어 한다면, 남편인 후작부터 벌해야 했다.

“왕비님, 지금은 일단-”

“후작 부인은 내가 죽으면, 조나단을 이용해 원하는 바를 다 얻어낼 거야. 조나단 그 어리고 멍청한 아이는 그저 같이 공놀이해준다고 좋아하니까.”

이를 아득 문 마가렛의 말에 조지 콜튼은 왕자가 사랑받지 못해 외로워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생전 그런 걸 받아본 적 없는 자신의 왕비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애정을 베풀 줄 몰랐다. 왕자를 볼 때마다 모난 말과 함께 모자란 점에 대한 지적만 이어갔다.

“내가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니, 정리를 시작해주게.”

“정리라 하시면?”

어리둥절한 조지를 향해 마가렛이 눈까지 휘어 보이며 웃었다.

“왕자에게 대모, 대부가 필요 없게 만들어야지.”

조지 콜튼은 잠시 그 자리에 굳어 서있다가 이내 허리를 푹 숙였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

비앙카는 도널드가 자신의 야심작이라며 굳이 굳이 손에 쥐어 들린 조각 케이크를 지젤 앞에 내려놓았다. 속셈이 뭘까. 접시를 건넨 손에 붙어있던 굳은살을 보면 도널드는 절대 평범한 평민이 아니었다.

“케이크?”

간식을 잘 안 먹는 걸 뻔히 알면서, 케이크를 내놓은 속셈을 알 수가 없어서 지젤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폭신한 제누와즈와 사이에 발린 노란 버터크림, 그 위에 뿌려진 라즈베리 잼이 새콤달콤해 보였다. 다만, 생김새가 주방장이 만들었다기에는 투박했다. 일단, 제누와즈가 심히 너덜거렸다.

“주방에 새로 온 이가 꼭 드셔봐주셨으면 한다고 하던데요.”

“독특한 디저트네. 원래 좀 난도질해서 먹는 건가?”

지젤은 호기심에 포크로 쿡 찔러봤다가, 속이 울렁거려서 내려놓았다.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던 비앙카가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그걸 본 지젤이 작게 소리 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지젤은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홀짝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씁쓸하고 향이 진한 커피는 어떤 약초의 향이든 은근하게 묻어줬다.

“챙겨주거나 걱정해주지 않아도 죽지 않을 만큼 잘 먹고 있어.”

지젤의 말에 비앙카는 그녀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아서 손을 내밀었다. 착실하게 손을 내어준 지젤이 옅게 미소를 머금으며 다른 손으로 비앙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비앙카는 그녀의 손톱을 꼼꼼하게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착한 우리 비앙카.”

지젤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느끼면서 비앙카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고용주는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지만, 나름의 보람도 느끼게 해줬다. 그래서 그녀는 내일도 있을 후작 부부의 새벽 티타임에 쓸 약초 준비를 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요한 일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

미하엘은 정말 놀랍다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오렌지 껍질을 손으로 깠다. 지젤은 오물오물 미하엘이 까주는 오렌지를 족족 받아먹으며 흥얼거렸다. 이제 열아홉 살이 된 지젤은 성숙한 어른의 면모를 물씬 풍기고는 했다. 그러나, 오렌지를 받아먹는 모습은 열다섯 살 때나 다름이 없었다.

“더 먹을래?”

“응.”

지젤이 빠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걸 보면서, 미하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젤은 이쪽을 보며 소리 내 웃는 미하엘 때문에 어쩐지 부끄러워져 오렌지를 제대로 삼키지도 않고 입에 쑤셔 넣었다.

“진짜 잘 먹네.”

툭. 미하엘이 오렌지를 까던 오른 검지로 그녀의 뺨을 쓸었다. 코끝에 스치는 달콤한 과일 향과 그의 향수 냄새에 지젤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근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는 미하엘이 들었을까 걱정까지 되었다. 어쩐지 변태 같고 민망하게 느껴진 그녀는 계속해서 입 안에 오렌지를 밀어 넣고 조심스럽게 씹어 삼켰다.

“다람쥐 같아.”

두근거리는 마음이 들킬라, 조심스럽게 굴던 그녀는 미하엘이 장난스레 하는 말에 발끈해서 입에 있던 과육을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다람쥐? 무슨 뜻이야?”

내가 왜 음식을 꾸역꾸역 다 먹는지 알아? 넌 맨날 정오쯤 되기 시작하면 후딱 산을 내려가 버리잖아. 근데, 내가 음식을 먹고 있는 동안에는 좀 늦어져도 끝까지 있으니까-. 이씨, 누구는 배가 터져라 억지로 먹고 있는데. 내가 좀 잘 먹는다고, 상식 이상의 음식을 싸 들고 오는 너도 주책이거든? 이런 얘기들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입을 다물었지만, 괘씸함을 숨기지 못한 그녀가 그를 뾰로통하게 노려봤다.

“지금 내가 나무 타는 쥐 같다는 거야? 무슨 뜻이냐고.”

미하엘은 이쪽을 보며 따지고 드는 지젤을 좀 더 놀릴까 하다가 진짜 삐질까 봐 그만뒀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동그란 이마에 입 맞췄다.

“귀여운 내 다람쥐.”

지젤은 생전 처음 닿아보는 타인의 입술이 이렇게 뜨겁고, 부드럽고 민망한 것인지 처음 깨달았다. 그녀는 그렇게 잠시 입을 꾹 다물고 귀까지 붉어진 채로 눈만 깜빡였다. 누가 네 다람쥐냐고 따져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미하엘은 그런 지젤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오렌지를 내밀었다. 지젤은 그걸 군말 없이 받아먹었다. 입 안에 터지는 오렌지가 유난히 달콤해 혀뿌리가 아려왔다.

***

이안은 지젤에게 찰싹 붙어있는 어린 조나단을 보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젤에게 잔뜩 어리광을 부린 조나단이 그녀의 팔을 꼭 끌어안고 투덜거렸다.

“나, 나 요즘 계속 무서운 꿈 꿔.”

“어떤 꿈이요?”

응접실에 앉아서 조나단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지젤이 옆에 있는 시종에게 눈짓하자, 시종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밤에 깊게 잠을 못 드십니다. 해서, 저희가 번갈아 가며 침대 옆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으응. 부인이 나랑 같이 자면 안 무서울 것 같아. 밤이 무서워.”

이안은 조나단이 지젤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하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는 놈일세.”

“저하는 어릴 때 악몽 한 번 안 꿔보신 분처럼 그러십니다.”

지젤이 매정한 이안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조나단의 말랑거리는 뺨을 조물거렸다. 조나단이 그 손길에 당장 잠이라도 들 것처럼 나른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진짜 잠을 못 자나 보네, 평소라면 엄청나게 뛰어다니며 놀 시간대인데.

“어른인 저도 무서운 꿈을 주면, 잠을 못 자는데요.”

지젤이 조나단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 적당히 말하자, 이안의 표정이 굳어 들었다.

“무슨 무서운 꿈?”

“그냥, 가끔 다들 꾸잖아요. 슬프고 무섭고 그런. 다시 잠들기 무서운 꿈이요.”

이안은 턱을 괴고 지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가 슬프고 무섭게 하는데?”

제가 살아 숨 쉬는 것 그 자체가 공포고 죄악이죠. 그녀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속마음에 실소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제는 끝이 보이고 있었다. 얼마 안 남은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지젤은 편히 쉴 생각이었다. 제 몫을 끝내고 나면, 비로소 그 의원이 말했던 것 같은 평온을 가질 수 있었다.

“저하께서는 그런 꿈 꾸신 적 없으세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이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는 지젤의 꿈을 꾸고는 했다. 근데 꿈을 꾸면, 정말 어이가 없게도. 그녀는 좋았던 모습으로만 꿈에 나오고는 했다. 지젤과 함께했던 그 모든 게 행복해서였을까. 그녀는 항상 웃는 모습으로, 행복하게 그의 손을 잡고 함께했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그는 외로움과 비통함에 몸부림쳐야 했다.

“나는 그리도 좋은 꿈만 꾸더라고.”

차라리 미웠던 기억만, 원망만 꿈꾸면 덜 괴로웠을지도 몰랐다. 그의 서글픈 말에 지젤은 가만히 이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좋은 꿈을 꾸시기에 그렇게 슬프세요?”

지젤의 물음에 이안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처연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에 마음이 약해진 지젤이 이안에게서 눈을 못 떼며 눈살을 찌푸렸다.

“꿈에서 깨는 게 무서울 정도로 좋은 꿈이었거든.”

그리고, 그 뒤에서 모든 걸 보고 있던 제인은 얼굴을 잔뜩 구기고 이안을 바라봤다. 그는 이안이 꿈자리가 뒤숭숭한 날에는 침실에 모든 걸 때려 부수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근데, 저런 식으로 얘기한다고? 지젤 님, 저 사람 어찌나 포악하고 까칠한지 황궁에서는 모두들 혀를 내둘러요. 제인은 지젤에게 속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가식도 저 정도면 병이었다.

그 순간, 응접실로 누군가가 노크도 없이 튀어 들어왔다. 사색이 된 채로 들어온 시종을 보며 모두가 눈썹을 찡그리는데 시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이안은 그 순간, 지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었다가 사그라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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