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40)화 (40/135)

40.

지젤의 말에 다이한은 반응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와있었던 거지? 지젤이 이안의 손에서 발을 빼내자 무릎 꿇고 있던 이안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안은 이쪽을 매섭게 노려보는 다이한을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뭐 하는 거지?”

“제가 발목을 조금 다쳐서 저하께서 도와주시고-”

“후작이 전쟁터에서만 뒹굴었다더니, 예의라는 걸 배운 적이 없는 건지.”

지젤의 말을 가로막은 이안이 아까와는 다르게 정색을 하고 다이한을 향해 혀를 찼다.

“나는 보이지도 않나?”

그 언짢음이 묻어 나오는 말투에 지젤은 입을 다물었다. 싸늘하다 못해 뾰족한 시선과 오만한 비웃음이 섞인 얼굴이 낯설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는 자신도 저런 얼굴로 보고는 했는데, 이제는 너무 실실 웃는 얼굴만 보여줘서 잠시 잊고 있었다. 지젤이 입을 꾹 다물고 눈살을 찌푸리는데, 다이한은 그런 이안을 무시하고 거친 걸음으로 다가와 지젤의 오른 손목을 잡아챘다.

“일어서.”

“아-.”

다이한은 누가 봐도 아프게 힘으로 잡아 쥐고 있었다. 그걸 방관하고 있을 수 없는 이안이 그런 다이한의 손목을 잡아 눌렀다. 어딜 감히 아프게 해.

“좋은 말로 할 때, 놔.”

지젤은 세 사람의 손목이 얽힌 걸 보면서 기괴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내 저택에 들어와서. 내 아내에게 뭐 하는 짓입니까.”

다이한이 이를 악물고 잇새로 말을 내뱉는 걸 본 이안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네 아내?

“아, 그게 문제면.”

그러면 너만 죽으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 이안은 희번덕이는 다이한의 연녹색 눈을 기꺼이 맨손으로 파낼 수 있었다.

“나한테 아주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는데.”

“간단한?”

다이한이 이죽거리는 이안의 말을 되묻자,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무척이나 간단하지.”

지젤은 두 남자가 서로 힘자랑을 하며 으르렁거리는 걸 보며 이를 악물었다. 중간에 낀 기분이 더러웠다. 어쩌면 황태자는 후작의 기를 죽이려고 자신을 꼬시는 중일지도 몰랐다. 의심에 의심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게 지겨워서 지젤은 자유로운 왼손으로 다이한의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줬다.

“후작님, 너무 아픕니다.”

다이한은 드물게 자신을 향해 짜증을 숨기지 못하는 지젤을 보며 기가 찬 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지금 자신을 밀어내는 게 정말 아파서인지, 아니면 눈앞의 이 황태자 때문인지. 그의 불안이 눈앞에 실체화되어 있는 지금 그는 지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프다고요. 오해하신 건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니니 놓아주세요.”

“일어서.”

“놓아주시면 일어날게요. 발목도 아프고, 손목도 아픕니다.”

지젤이 짐짓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하는 말에 다이한은 아랫입술을 콱 깨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천천히 지젤을 놓아주자, 이안 또한 더러운 걸 내던지듯 다이한을 놓았다. 그 모든 유치한 상황이 무슨 희극 같아서 지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웃기지도 않았다.

“저하, 오늘은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지젤이 방금까지의 표정과 생각들을 애써 갈무리한 채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교양 있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후작님이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서요. 추한 꼴을 보여드릴까 무섭습니다.”

이안은 명백한 축객령에 지젤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봤다. 싫어, 이대로 널 납치해서 가버릴 거야. 일곱 살 어린애 같은 심보가 삐쭉 튀어나와서 자제하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도널드와 눈이 마주쳤다.

도널드가 슬쩍 고갯짓을 하는 걸 본 이안이 대놓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는 지젤의 오른손을 잡아 쥐며 고개를 숙여 가볍게 입 맞췄다. 검은 장갑 위에 내리눌렀던 입술을 부드럽게 떼어낸 이안이 작게 속삭였다.

“무지한 이가 그대에게 추하게 굴면 말해.”

말만 해. 이안의 말에 다이한의 연녹색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뒷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이안이 지젤이 아닌 다이한을 보며 하는 말에 다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다이한이 양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떠는 걸 보며, 이안은 어쩔 수 없이 먼저 그곳을 떠났다.

***

“언제부터 황태자를 집에 들이기 시작한 거지?”

화를 참듯 저택 안에 들어서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다이한은 지젤이 서재로 들어서자마자 매섭게 쏘아붙였다. 지젤은 후작의 과격한 손짓에 큰 소리를 내며 닫히는 서재 문을 보고 숨을 들이마셨다. 이 저택에 온 초창기가 떠올라서 그녀의 목을 졸랐다.

“뒤에서 둘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기에.”

지젤은 그런 후작을 보며 혀를 짓씹었다. 남편으로서 충분히 기분 나쁠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그가 이러는 게 같잖았다. 우리가 언제부터 정상적인 부부였다고, 답지 않게 흥분해서는.

“내 저택에서 뻔뻔하게 그런-”

“후작님.”

서재의 중앙에 선 지젤이 다이한의 양손을 잡아 부드럽게 이끌었다. 주먹을 꽉 쥔 채로 분을 참고 있던 그가 그녀의 손길을 그대로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턱 근육이 움찔거릴 정도로 흉악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해하실 만했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사이도 아니랍니다.”

지젤은 흉터가 많은 다이한의 손을 조용히 토닥여줬다.

“엘로이 백작 부인을 따라 제 병문안을 오셨어요. 백작 부인은 급한 용무로 먼저 떠났고, 산책 중에 제가 발목을 다쳤답니다. 그걸 살펴봐주고 계셨어요.”

다이한은 지젤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반박하지 못했다. 분노가 한 단계 식고 나니, 불쾌함이 들끓었지만 그는 따질 수 없었다. 그는 지젤의 부정을 탓할 수 있는 연인이 아니었다. 그게 그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그가 손에 잡힌 지젤의 작은 손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후작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니에요. 저하께서 불쾌하셔서 이상한 언행을 하신 것 같은데-. 그럴 일은 없답니다.”

지젤은 황태자와 연인놀음이나 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다이한의 심장에 못을 박고, 왕비의 목을 베어 그걸 복도에 진열한 채 즐길 시간도 부족했다. 그딴 유치한 감정놀음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저도 주의하겠습니다.”

지젤이 부드럽게 다이한의 손등 위로 입 맞췄다. 말캉한 입술이 담백하게 붙었다가 떨어지는 걸 보면서 다이한은 어깨를 경직시켰다.

“그러니 화내지 마세요.”

그는 본인이 지젤에게 꽉 잡혀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이상은 따지거나 화내지 못했다. 정말로 지젤이 황태자와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그는 배신이라 원망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무력한 그는 지금 자신의 손에 잡히는 지젤을 믿기로 했다.

***

황태자의 마차 뒤쪽에 숨은 도널드는 기분이 아주 더러워 보이는 이안을 보며 입을 샐쭉댔다. 이쪽은 반가워서 손을 방방 흔들고 싶은 걸 참았는데, 주군은 이쪽을 만나서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코를 훌쩍인 도널드가 미약한 불만의 표시로 짝다리를 짚었다. 그래봤자,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이안은 보지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저택 분위기가 좀 묘하기는 합니다. 후작 부인을 모시는 하녀는 2명에 한정되어 있고, 하인은 아예 후작 부인 근처도 가지 못합니다. 집사는 사무적으로 업무만 보는 느낌이고-”

“도널드.”

이안이 마차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확 걷어내고 그를 불렀다. 반사적으로 도널드가 반듯하게 허리와 어깨를 펴고 정자세를 유지했다.

“넵.”

“넌 대체 주방에서 뭘 하는 거야?”

난데없이 짜증을 가득 담아 묻는 이안의 말에 도널드는 잠깐 고민했다.

“감자 열심히 깎고 있습니다. 정말로요.”

제가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감자를 깎아본 적이 없을 정도인걸요. 기사단 빨래 하던 시절이 행복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널드가 주절주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듯 하는 말에 이안은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지젤이 마른 게 안 보여? 주방 것들이 얼마나 더럽게 맛없는 것들을 내놓기에 저렇게 계속 말라?”

“그게, 후작 부인께서는 워낙 소식하신다고. 고기도 거의 안 드시고, 간식은커녕 음료도 잘 안 드신다던데요.”

“그건 무슨 개소리야.”

이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주방 것들의 문제가 분명했다. 이안이 아는 지젤은 앉은 자리에서 케이크를 2판씩 먹고, 감자를 구우면 껍질도 안 까고 삶아 반 포대씩 먹는 사람이었다. 어린 마음에, 저렇게 많이 먹어야 노래를 잘 부르는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 작은 입으로 얼마나 열심히 오물거리며 먹어치우는지, 눈을 못 떼고 멍하니 보고 있자면 하루가 다 갔다. 한 마리의 햄스터처럼 양 볼을 동그랗게 만들고 야무지게 움직이는 입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게 귀여워서 매일 새벽 산을 오를 때면 주방장을 자정부터 깨워 음식을 하게 만들었었단 말이다.

“소식이 아니고, 너희들이 음식을 엉망으로 만들어서겠지. 오렌지만 줘도 신나서 까먹는 애한테 무슨. 대체 뭐 하는 것들이야.”

“저하, 저- 잊으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도널드가 머쓱하게 뒷목을 긁적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 본업은 따로 있습니다만?”

아시죠? 저 저하의 호위 기사인 걸? 잊으신 건 아니죠? 도널드가 다급하게 이안에게 묻는데도 이안은 매정하게 그를 외면했다.

“주방에 들어갔으면 최선을 다해.”

“최선을 다해서 저택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습니다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지젤을 먹이란 말이야.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

이안이 혀까지 차가며 하는 말에 도널드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젠장, 휴가에 혹해서 거지 같은 일에 휘말렸구만. 이제 후작 부인 먹는 것까지 신경 써서 해야 해? 도널드가 불만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작게 중얼거렸다.

“저희 어머니 레시피로 케이크라도 구워볼게요.”

나중에 은퇴하면 쓸 레시피였는데. 천성이 착실한 그는 황태자의 말도 안 되는 말을 마냥 무시하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