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허리에 감긴 뜨거운 손은 둘째 치고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지젤은 숨을 멈췄다. 얼마나 가깝게 당겨 안았는지 몸이 너무 밀착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허리가 꺾인 채로 잠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도톰한 입술부터, 쭉 뻗은 콧대와 반쯤 내리깐 눈꺼풀. 나비처럼 파닥이는 긴 속눈썹은 새삼스럽게 그의 미모를 일깨워줬다. 미하엘도 저렇게 눈매가 짙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닮았을까. 그녀가 항상 생각하는 의문을 한 번 더 곱씹는데, 굳게 닫혀있던 이안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지젤.”
낮은 목소리가 탁하게 그녀의 이름을 뱉어냈다. 이안은 자신의 입 안에서 굴린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속삭였다.
“지젤.”
그는 살짝 놀란 듯 눈을 깜빡이며 이쪽을 훑어보는 지젤을 보며 그대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둘의 얼굴이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너무 일러. 아직 지젤은 나를 좋아하지 않고, 아니 좋아하더라도 숨기는 중이고. 예전처럼 그렇게 서슴없이 손을 뻗으면 안 돼. 잘못하면 미움받을 테니까 신중히 움직여야 해.
그가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풀지 못했다. 이안은 지금 지젤이 짓고 있는 저 표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홀린 듯 이쪽을 올려다보는 얼굴 밑에 깔린 애정을 알고 있었다.
그냥 닿고 싶다. 조금만 더 고개를 숙이면, 비틀면 닿을 수 있었다. 빌어먹게 긴 5년 동안 한 번도 닿을 수 없었던 지젤이 이렇게 품에 있는데. 이안의 한숨과 같이 숨을 내뱉고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그렇게 그의 흑발이 이마께에 흐트러지는 것까지 본 지젤이 다급하게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그의 왼뺨을 올려쳤다.
-짝.
아프지는 않았지만, 소리와 행위만으로 충분히 당황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멍하니 그녀를 보고만 있자 지젤이 한 번 더 손을 들어 반대 뺨을 쳤다.
-짝.
“지젤.”
양 뺨을 번갈아 맞은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난 넘어질 뻔한 널 잡아준 거야.”
“방금 그게 아니었잖아요.”
당신 눈 풀렸었는데요. 다행스럽게도 황태자의 미모 앞에 이성의 끈을 붙잡은 지젤이 재차 지적했다.
“변태같이 게슴츠레하셨습니다.”
지젤이 경계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변태. 그래, 뭐 그런 류의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는데. 망설임 없이 때리는구나. 경계심이 가득하니, 이걸 기뻐해야 하나.
“그렇구나.”
이안이 순순히 지젤의 허리를 놓아주자 지젤은 눈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봤다. 어딘지 초점이 나간 눈을 한 황태자를 보며 지젤이 고개를 까딱였다.
“후원은 지저분해서 보여드리기 뭐해요. 저쪽으로 같이 걸으시죠.”
지젤의 안내를 따라 걸으며 이안은 쓰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맞을 거였다면, 입술은 아니더라도 이마나 뺨에라도 입 맞출걸. 그는 반성 따위는 하지 않으며 지젤의 뒤를 쫓았다.
***
다이한은 침대에 누워 앉지도 못하는 왕비를 보며 눈을 감았다. 그 옆에 선 시종장이 왕비를 깨우려 했지만, 그걸 말린 그는 그대로 서있기만 했다. 메마른 왕비의 손목과 지젤의 손목이 겹쳤다. 시종장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후작을 뒤로하고 조용히 자리를 비켜줬다. 잠시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서있던 다이한이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그래도 후회는 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의 낮고도 굵은 목소리에 왕비가 힘없이 눈을 떴다. 그녀의 검은 눈과 마주한 다이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희 둘 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한 행동이었으니.”
“후작-.”
“그 죗값도 달게 받음이 옳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던 그녀가 힘겹게 떨리는 입술에 힘을 줘 목소리를 냈다.
“나는 공식적으로 적통 후계자를 없앴으니, 반쯤 원하는 걸 얻었지만.”
증거와 증인을 없애 지젤이 공주로서 서기 힘들게 만들었으니, 이제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의 아들인 조나단밖에 없었다. 이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왕만 어서 죽으면 되는 일이었다.
“후작은 뭘 얻었습니까?”
“저는.”
다이한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다물었다. 그걸 보며 마가렛은 소리 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괴한 마른 웃음소리가 곧 기침으로 변하고, 다이한은 조금 더 그 자리를 지키다가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다이한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가렛은 숨을 고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내가 죽거나.”
후작 부인이 죽거나. 그 싸움이었다. 마가렛은 지젤이 다이한과 조나단을 옆에 끼고 하하 호호 하며 살아가는 걸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러라고 여태 고생해서 버티고 선 게 아니었다.
***
지젤은 이안과 나란히 정원을 걸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꿈을 꾸고 있거나, 미하엘이 너무 보고 싶어서 닮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본인의 정신 상태가 양호하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에 지젤은 계속 고민했다. 그러고는 참지 못하고 이안에게 따져 들었다. 다 난데없이 끼어든 이 황태자 때문이었다.
“제가 아픈 걸 왜 저하께서 걱정하세요?”
“그걸 말이라고 묻는 거야?”
이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아까 지젤에게 맞았던 양 뺨을 일부러 매만졌다. 그러자, 지젤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세게 안 때렸는데, 아직도 아픈가.
“저하께서는 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으신 건가요?”
본인을 이용해서 이쪽의 명예를 더럽힌 뒤 떠나려는 건가? 그럼, 확실히 후작 부인으로서의 입지는 흔들릴 것이다. 황태자야 그저 결혼 전에 재미나 본 것이니 문제 될 게 전혀 없었다.
“내가 왜 널 곤란하게 하겠어?”
이안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쉬자, 지젤이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원하시는 게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근데,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계속 고민해.”
이안이 짤막하게 답하고는 아까부터 미묘하게 절뚝거리는 지젤의 왼발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삐끗한 건지 걸음걸이가 묘하게 어색했다. 이안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지젤을 잠깐 외면한 채로 정원 한편에 놓인 철제 의자를 끌고 돌아왔다.
지젤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지젤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 그녀를 의자 앉힌 그가 망설임 없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그녀의 왼 발목을 살폈다.
“부었잖아.”
아프면 말해달라니까,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내가 무리한 부탁 했어? 아니잖아, 아프면 제발 말하라고.”
그가 지젤과 마찬가지로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지젤은 커다란 손이 자신의 발목을 조심스레 매만지는 걸 내려다보며 울상 지었다. 황태자가 왜 그렇게 쉽게 무릎 꿇는 거야.
“뭘 고민하라는 거예요? 무려 황태자께서 이렇게 제 앞에 무릎 꿇는 이유를? 그게 고민한다고 알 수는 있는 거예요?”
지젤이 날카롭게 따지고 드는데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그리고 그는 벌겋게 부어오른 지젤의 왼 발목을 세심하게 살폈다. 걷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저하.”
“그렇게 계속 고민하고, 생각하고.”
지젤이 답을 요구하듯 그를 부르자, 이안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진중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작은 머리가 내 생각으로 가득해질 때까지.”
이안이 상상만으로도 행복한지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난 그때까지 안 떠날 거야.”
그의 말에 지젤이 그대로 몸을 굳혔다. 그게 뭐야. 날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하필, 네가? 하필 미하엘을 닮은 네가 또 그런 일들을 반복하자고?
“그러고 나면, 제가 저하를 좋아하기라도 하면.”
황국의 황태자가 있는 지금, 친황국파인 왕비의 죽음은 부담스러웠다. 그러니 달리아 백작도 몸을 사리려는 거고. 빨리 끝내고 쉬고 싶었다. 왕비와 후작을 다 치워버리고, 드디어 끝냈다고 소리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근데, 황태자가 이렇게 흔들면. 내가 아프다는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걱정하는 걸 보자면.
“그러면 그때는 떠나실 건가요?”
그럼 그깟 거짓 고백 얼마든 해줄 수 있었다. 지젤의 말에 이안이 한쪽 눈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긋지긋한 나라는 빨리 떠나야겠지, 근데 지젤.”
이안은 그게 곧 해방이 될 거라는 지젤의 착각을 빨리 깨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나랑 같이 갈 거야.”
“네?”
“내가 어디에 있든, 뭘 하든. 넌 나랑 있을 거야.”
지젤은 이안의 궤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계속 뭐라는 거야?
“무슨 소리예요? 누가 같이 간대요?”
“날 좋아한다며?”
“그게 지금 좋아한다는 게 아니잖아요.”
말을 하면 할수록 대화가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한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그녀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꼭 주인의 말에 집중하는 강아지 같았다. 그래서, 웃지 않으려 억지로 얼굴을 구겨도 저도 모르게 작게 소리 내 웃게 되었다. 그리고 이안을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이번엔 반대로 고개를 기울인 이안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니야?”
“그러니까, 저하께서 원하시는 게 그런 거면 그렇게 해드리겠다는 거지. 지금 제가 저하를 좋아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럼, 빨리 그만큼 날 좋아해 줘.”
지젤은 그가 자신을 내려다볼 때보다, 올려다볼 때가 더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다. 검은 눈이 처연하게 그녀를 올려다보니, 어쩐지 손을 뻗어 얼굴을 매만져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하고, 어리석은 충동이었다.
“하루빨리 여길 떠나서, 네가 좋아하는 걸로 가득 채운 집에서 나랑만 있을 수 있도록.”
이안이 투정을 부리듯 덧붙이는 말에 지젤은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이상 이안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는 다이한을 발견한 지젤이 작게 탄식했다.
“후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