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36)화 (36/135)

36.

“이-! 이이!”

조나단이 자신의 얼굴을 밀어낸 커다란 손을 떼어내며 분에 찬 듯 괴상한 소리를 내자, 이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의자가 있는데 굳이 후작 부인에게 안겨 있는 이유는 또 뭐야.”

“저는 원래 이렇게 다니엘 부인 무릎에 앉는걸요?”

“마음에 안 들어, 내려와.”

이안이 유치하게 어린 소년에게 따지고 드는 게, 좀 창피해서 제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여덟 살짜리 애를 상대로 뭐 하는 거야.

“왜, 왜 황태자님은 나한테 뭐라고 하세요?”

“부당하니까.”

부당하다고? 지젤은 짐짓 진지하게 이상한 논리를 펼치고 옆에 선 이안을 올려다보며 콧잔등을 구겼다. 아까 전부터 일부러 의식하지 않고 무시했더니, 더 심통이 난 듯 보였다.

“부당이 뭐예요?”

“우리 셋이 나란히 앉아있는데. 넌 후작 부인의 무릎에 앉아서 손까지 잡고는 감히 입까지 비비려고 해?”

“그게 왜요?”

“공평하지 못하니, 저리 비켜.”

거기까지 들은 지젤은 한쪽 눈을 찡그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공평이라니, 이쪽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뭘 분배하려는 거야. 그리고 왕자가 비키면 본인이 앉기라도 하게? 왜 저러는 거야. 지젤과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아니면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는지 조나단이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안이 무어라 더 하기도 전에 제인이 성큼 다가와 조나단을 번쩍 안아 들었다.

“자-, 왕자님. 오늘은 저기 중간에 서있는 기사랑 술래잡기할까요? 황궁 기사단 중에서 제일 느린 사람이니, 왕자님께서 충분히 이기실 수 있답니다.”

“응, 좋아! 저기 저 사람?”

“아니요, 그 옆의 더- 못생긴 사람이요.”

“그럼 저 아저씨다.”

“예? 아니, 무슨! 안 느리고! 안 못생겼습니다!”

더 못생겼다 지칭당한 기사와 기준점이 된 기사가 동시에 울컥해서 제인에게 따지고 들자 조나단이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지젤은 시끌벅적한 그 모습을 가만히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왕궁에서 조나단을 저렇게 놀아줄 사람이 없었다. 왕비의 의심병으로 왕자의 시중을 드는 사람은 한 달에 두어 번씩도 바뀌었으니까, 조나단이 마음 놓고 지낼 사람이 존재하기 힘들었다.

“나도 쿠키 가져와서 나눠 먹자 하면, 예뻐해주나?”

이안이 정말 궁금한 듯 묻는 말에 지젤은 왼쪽 눈을 찡그렸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이십 대 후반의 건장한 남자라고.

“저하, 아까부터 굉장히 유치하게 구시네요.”

“맞아, 난 그대랑 있으면 유치하게 변해.”

이안은 본인이 이런 자기 객관화는 뚜렷한 편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지젤과 같이 있으면 생각이 단순해지고 유치해졌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이안은 사람이 사랑에 눈멀면 다 이렇게 되는 거라 믿었다.

“꼭 열다섯 살 어린애처럼.”

“그것보다 더 어리게 잡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열 살 정도로. 지젤이 냉정하게 말하자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둘이 처음 만났던 십 대 중후반을 조용히 곱씹어보고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보다 어린 지젤은 더 귀여웠을 텐데 아쉽네.

“열 살짜리 나는. 우리 지젤 님 생각보다 많이 사랑스러울 텐데.”

“사람스럽다는 말씀이시죠? 그나마 사람 같다고?”

“이제 적나라하게 비꼬기까지 하니 이길 수가 없네.”

이안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는 걸 보면서, 지젤은 속없이 웃기만 하는 황태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검은 눈이 웃음을 담은 채 휘어지는 게, 쓸데없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의식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그를 의식해야 했다. 황태자의 입에 담겼던 자신의 이름이 계속 귓가에 맴돌아서 지젤은 곤혹스러웠다.

***

바르한 자작은 잔뜩 가라앉은 후작의 기분을 살피며 초조함을 숨기기 위해 다리를 꼬았다. 갑자기 불러다 앉혀놓고 말이 없으니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설마, 뭘 눈치챈 건가.

막상 그의 앞에 앉아있는 다이한은 자작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말없이 본인의 오른손에 자리한 반지를 내려다봤다. 황태자가 가진 것은 미련이라는 이름의 허상이었지만, 그가 지닌 것은 실체가 존재했다. 지젤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다이한은 그 사실에 애써 안주하려고 노력했다.

“적어.”

자작은 짤막하게 말한 자작이 내미는 백지 수표와 만년필을 보고 눈만 끔뻑거렸다.

“예?”

“필요한 만큼 적으라고.”

어떤 감정도, 부연 설명도 없는 깔끔한 말이었다. 후작이 고개를 까딱였음에도 자작은 침만 꼴깍 삼키고 종이와 펜을 내려다봤다. 쥐덫에 놓인 치즈를 보는 생쥐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얼른 손을 움직여 돈을 받아내고 싶지만, 두려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후작님. 갑자기 이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투자금이 필요한 만큼, 원하는 만큼 적어. 귀가 막혔나?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지?”

“그-.”

자작이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고민하는 걸 보며, 다이한은 피로한 듯 눈을 감았다. 멍청한 놈이 겁도 많았다.

“내 시간을 낭비하지 말게.”

후작이 질질 끄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자작이 빠르게 펜을 쥐고 손을 움직였다. 얼마를 적어야 할지 몰라 후작의 눈치를 보며 ‘0‘의 개수를 늘리는데, 다이한은 제지 없이 무표정하게 그걸 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점점 ’0’이 늘어날수록 자작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정말? 이렇게나 투자하겠다고?

“후작님께서 믿어주시는 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투자하신 원금 회수는 물론이고, 제가 이자와 배당까지 넉넉히-”

다이한은 그 입발림 소리를 길게 들어주지 않고 수표를 빼앗아 서명했다. 깔끔하게 서명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후작은 허리를 꾸벅 숙이는 바르한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자작을 보고 돈을 지불하는 게 아니었다.

***

미아는 요 근래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난 자신의 후작 부인이 걱정스러웠다. 무슨 고민이 있으신 건지, 아니면 단순히 몸이 좋지 않은 건지. 매사에 말을 아끼는 불쌍한 그녀의 후작 부인이 안쓰러웠다.

“지젤 님, 요즘 계속 피곤해 보이세요. 쉽게 잠드실 수 있는 약이라도 드시도록 의원을 부를까요?”

서재에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하던 지젤은 미아의 걱정 어린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간만에 잔소리 좀 들어야겠어. 오늘 중으로 올 수 있나 확인 좀 해줄래?”

근래에 크게 아픈 적이 없다 보니, 얼굴 안 본 지 꽤 되었지. 지젤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미아가 아차 싶어져서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제가 말씀드린다는 걸 그만-. 지젤 님,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지젤은 미아의 입술이 쉽사리 그다음 말을 내놓지 못하고 달싹이기만 하는 걸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지젤은 이미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른 척 순백한 얼굴을 유지했다. 비앙카에게 이미 들어서 의원이 땅 밑에 누워있다는 걸 알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아 모르는 척할 뿐.

“지젤 님이 아시는 그 의원은 이제 부를 수가 없어요.”

평생 남의 병을 치료하고 살려낸 의원은 늙고 병든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는지, 목매달아 죽었다. 미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너무 나이가 들어서, 이제 더는 일을 하지 않는답니다. 대신에 후작님께서 앞으로는 수도의 유명한 의원을 부르라 하셨어요.”

심약한 지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던 미아의 배려에 지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구나.”

지젤은 자신의 눈과 귀를 막는 미아의 애정에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저택에서 지젤은 백치여야 했다. 이 배려가 정말 나를 위한 애정인가.

“그래, 나이가 들었으니 쉴 때도 되었지. 아쉽게도.”

그녀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준, 노인의 죽음을 대놓고 슬퍼할 수도 없는 게 어이가 없어서 입 안이 썼다. 노인이 왜 자살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지젤은 함부로 짐작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있었던 자신과의 대화 때문은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머리가 지끈거려서 지젤은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미아를 가볍게 밀어냈다.

“잠을 좀 자야겠으니, 비앙카를 불러줄래? 약초를 태워서 향을 좀 피우고 싶어.”

그 말에 미아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비앙카. 비앙카. 걔가 대체 뭐라고. 여기서 지젤을 가장 걱정해주고 위해주는 건 나뿐인데. 미아는 비앙카를 향한 본인의 분노를 질투라고 정의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젤이 비앙카를 찾을수록 그녀는 본인의 필요와 쓸모를 더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지젤은 산에서 만난 가끔 멍청하게 구는 그 소년이 좋았다. 밤하늘처럼 새카만 눈으로 그녀가 노래 부르는 걸 멍하니 보는 표정이 좋았다. 어쩌면 어울릴 또래가 없어서일 수도 있었다. 지젤은 애매한 위치의 귀족이었고, 아버지는 평민들과 지젤이 가까워지는 걸 경계했다. 평민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지젤이 상처받을지도 모를 상황이 오는 걸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매년 지젤을 보러 산을 올랐고, 지젤은 소년이 돌아오는 겨울을 기다렸다. 둘은 길게는 반나절이 지나도록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생각을 나누고 곁을 나눴다.

“있잖아, 지젤. 혼자 산에 오르는 건 위험해.”

이안은 어린 지젤을 걱정하면서도 산에 오르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기적이게도 그럼 이제 더는 지젤을 보지 못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에서였다.

“알지만 나는 여기가 제일 마음이 편해-. 아무도 없으니까. 그러는 너는 산에 왜 올라왔어?”

“나도, 아무도 없는- 마음 편한 곳이 필요해서.”

지젤은 쓰게 웃으며 답하는 미하엘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피해야 겨우 숨통이 트이는 삶이라니. 그 짧은 시간 둘은 서로를 애정하게 되었다. 어쩌면 짧은 시간 함께했기에 그리움과 공허함이 커져 몽글몽글한 감정으로 변모한 건지도 몰랐다. 열여덟 살 겨울의 초입, 지젤은 얼마나 더 추워져야 그리운 얼굴을 볼 수 있을지 가늠하고 있었다.

“지젤.”

그런 그녀를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나무에 기대앉아 있던 지젤이 벌떡 일어섰다.

“미하엘!”

이제 열일곱 살이 된 미하엘의 키가 그녀보다 커져서 지젤을 고개를 들어 올려야 했다. 검은 눈이 지젤을 보며 웃음을 담고 휘자, 지젤은 반사적으로 그에게 뛰어들었다. 조금 놀란 미하엘이 눈을 크게 뜨면서도 양팔을 벌려 지젤을 마주 안았다.

너무 반갑고, 행복해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꾹 누르고 있던 지젤은 이내 어깨를 굳혔다. 생각해보니까 여태 손 한 번도 잡은 적이 없었는데.

“그냥 반가워서 그런 거니까, 오해하지 마. 별 뜻은 없는 신체 접촉이야.”

어딘지 민망해진 지젤이 코를 훌쩍이며 하는 말에 미하엘은 웃음을 참기 위해 혀를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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