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35)화 (35/135)

35.

나탈리가 따지고 들며 리안나를 향해 한 발 다가서자, 리안나가 야차같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녀는 나탈리로 인해 이미 충분히 망신당했다. 다 늙은 공작이 어린 계집을 끼고 저택이며 마차며 퍼준다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걸, 얼마나 공작 부인이 만만하면 대놓고 저러겠냐며 떠드는 걸 참아낸 지 오래라 이 이상 참아줄 인내심이 없었다.

“네가 지금 누구랑 말을 섞겠다고 끼어들어.”

“리안나 님과 제가 다를 게 뭐가 있어서요?”

웃기지도 않게, 급 따지기는. 나탈리가 매섭게 리안나에게 따지고 들자, 리안나가 욱하는 걸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빠르게 잡아 누른 지젤이 입을 열었다.

“어쩐다, 그 루비 내가 살 건데.”

리안나가 눈을 크게 뜨고는 난데없이 끼어든 지젤을 바라봤다. 지젤은 그런 리안나에게 조용히 눈짓하고는 나탈리를 똑바로 바라봤다. 여기서 리안나가 저 여자랑 싸워봤자, 소문만 만들어낼 뿐이었다. 공작 부인이 공작의 애첩과 싸웠다는 소문은 하루도 안 돼서 수도 끝까지 퍼질 터였다.

“뭐 하는 거지? 내가 산다고 했는데.”

“예? 아, 그. 이게 가격이-”

와중에 점장이 얼마라도 더 받아내려고 머리를 굴리며 더듬더듬 입을 열자 지젤이 멀리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비앙카에게 손짓했다.

“비앙카, 가서 네가 적당히 적어내렴.”

“네.”

“섭섭하지 않게 부르는 대로 지불해.”

지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덤덤한 어조로 하는 말에 비앙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후작 부인이 끼어들 줄 몰랐던 나탈리가 눈을 끔뻑거렸다. 후작 부인이 왜 나서지? 지젤이 그런 나탈리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천하의 후작 부인께서 돈으로 저를 기죽이시려나 봅니다?”

나탈리는 귀부인이라고 살랑거리며 걷는 것들에 대해 잘 알았다. 남편 뒤에 숨어서 고귀한 척하느라, 막상 코앞에 닥친 싸움 앞에서는 분에 못 이겨 파들파들 떨기만 하는 여자들이었다.

“부끄러움과 수치를 모르는 자네가 뭐라고, 내가 친히 돈까지 쓴다는 말을 하는 거지?”

“하, 지금 저와 싸우자고 이러시는 겁니까?”

나탈리의 맹랑한 말에 지젤은 천천히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내가 자네와 싸우고 싶어 한다니.”

나탈리는 지젤의 오만한 표정을 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를 내리깔아 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뭐든, 내가 이길 게 명백한데 굳이?”

가볍게 읊조린 지젤은 나탈리를 무시한 채로 비앙카에게 손짓해 재촉했다.

“비앙카, 어서. 남은 잔금이 있다면 같이 현금으로 정리해. 다시는 여기 올 일 없을 테니.”

그에 나탈리가 뭔가 반응하기도 전에 점장이 먼저 소리쳤다.

“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시 오지 않으시겠다니요?”

화들짝 놀란 점장이 묻는 말에 지젤은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몰랐을 때는 모르지만, 알게 된 이상 같은 곳을 이용하기는 좀 그렇지.”

지젤이 아직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리안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우리가 교육이라는 걸 받은 나름의 교양이 있는 사람들인데.”

리안나는 지젤의 말에 작게 입을 벌려 탄식했다.

“아-.”

언젠가 그녀가 연회장에서 지젤의 험담을 멈추기 위해 했던 말이었다. 그걸 알아들은 건 리안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때, 저러다 후작 부인 죽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며 떠들었던 스텔라가 사색이 되어 침을 꼴깍 삼켰다.

누가 지젤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는지, 알 수 없어서 다들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했다. 그때 엿들은 사람이 있었나? 아니면, 알고 보니 나 빼고 다들 후작 부인이랑 친밀하게 만나는 사이인가?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쯤 지젤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요?”

지젤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스텔라를 향해 묻자, 스텔라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를 냈다.

“앞으로 저희는 여길 이용 안 하는 게 좋겠네요. 정말 수준 떨어져서는.”

“그러니까 말이에요. 돈만 밝히는 이런 곳의 품질이 어떨지 믿을 수가 없네요.”

모두들 놀라서 한마디씩 덧붙이고는 리안나와 팔짱을 끼고 가게를 나서는 지젤의 뒤를 쫓았다. 부산스레 몰려 나가는 귀부인들을 보며 점장이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 잠시만요!”

점장이 황급히 지젤을 향해 뛰어가는데, 비앙카가 그걸 가뿐하게 막아서며 고개를 내저었다.

“결제는 저랑 얘기하시죠.”

“아니! 지금 결제가 문제가 아니고! 잠시만요! 지젤 님! 리안나 님!”

큰손 고객을 모두 놓치게 된, 아니, 당장 귀부인 손님들을 모두 잃게 된 점장이 하녀를 밀어내려 했다. 그런 점장의 손목을 잡아챈 비앙카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저랑.”

점장은 어지간한 남자 뺨칠 것 같은 악력을 지닌 하녀가 가진 위압감에 놀라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얘기하시죠.”

비앙카가 우득- 소리가 나도록 그의 손목을 비틀며 하는 말에 점장을 어깨를 움츠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아니, 대체 누가 그걸 쪼르르 달려가서 얘기한 거야.”

저택으로 돌아온 스텔라는 비어있는 자작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끼고 있던 장갑을 바닥에 내던지며 이를 악물었다.

“나 빼고. 다들 후작 부인 옆에 찰싹 붙어서 아부를 떤다 이거지?”

나이도 어린 계집애가 운 좋게 후작에게 시집가서는. 기고만장하게 구는 꼴이 아주 짜증스러웠다.

“누구는 남편 잘 만나서, 뭐든 턱턱 사재끼고. 나는-”

쾅-! 책상 서랍을 과격하게 연 스텔라가 입술을 짓씹었다. 투자를 좀 더 받았나? 그깟 루비 얼마나 진귀한 건지 모르지만, 애초에 후작 부인은 관심도 없었던 물건이었다. 장부가 여유 있으면, 집사를 시켜 돈을 빼내서 그 보석만-. 애초에 보석은 어디 달아나는 물건도 아니고, 가지고 있을수록 가치가 높아진다고. 본인의 탐욕의 정당성을 억지로 이어 붙인 스텔라가 집무실 서랍을 뒤집었다.

두꺼운 수기 장부 몇 권을 꺼내서 펼쳐낸 스텔라가 매의 눈으로 숫자를 훑었다. 상인 아버지를 둔 그녀는 이런 식으로 돈을 빼돌리는 데 나름 능숙했다.

“이게 뭐야?”

종이에 적힌 숫자를 읽으면 읽을수록 이상해서,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장부 두 권을 번갈아 비교하다가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이중장부?”

텁. 놀라서 본인의 입을 막은 스텔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게 뭐야. 그녀의 남편이 귀족들한테 받아낸 투자금의 사용처가 교묘하게 이질적이었다. 아니, 애초에 투자금액 자체도 숫자가 다 달랐다. 단순히 엉망으로 장부를 적은 수준이 아니잖아.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돈을 빼돌리면-”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투자를 받아낸 왕국의 귀족들을 떠올리며 급하게 장부를 덮었다. 스텔라가 다급하게 다시 서랍 안으로 장부를 욱여넣었다.

“급하게 쓸데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 설마-.”

내 남편이 아무리 욕심이 많다지만, 어차피 들통날 사기를 왜-. 그녀가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집무실 문 앞에 소리 없이 서 있던 하녀 한 명이 조용히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

“아-!”

지젤은 조나단이 내미는 쿠키 반쪽을 받아먹고는 미소 지었다. 간만에 지젤의 무릎 위에 앉아서 들뜬 소년이 어깨를 들썩였다. 황태자가 온 뒤로는 후작 부인이 제대로 놀아주질 않았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지젤은 오롯하게 조나단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애정에 목마른 아이는 그게 너무 행복했다.

“맛있지? 아침에 먹고 너무 맛있길래, 다 안 먹고 꾹 참고 가져왔어.”

“왕자님 드시지 그러셨어요.”

지젤은 몰랑하고 통통한 볼살을 자랑하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구겼다.

“나는 부인과 같이 먹는 게 좋아.”

조나단은 본인 몫을 아껴서 나눠주면, 지젤이 조금 더 기특하게 여겨줄지도 몰라서 참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평민도 아니고 왕자인 네가, 그깟 먹다 남은 과자 따위를 손에 쥐고 돌아다녀? 네가 이 어미를 망신시키는구나.’

조나단은 언젠가 엄마에게 쿠키 반쪽을 내밀었다가 크게 혼이 났던 걸 떠올리며 더욱 지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젤이 그런 조나단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며 인상을 구겼다. 아이는 가끔 이상한 방식으로 애정 표현을 하고는 했다.

“예뻐라.”

지젤이 조나단의 작은 등을 토닥이자, 조나단이 검은 눈을 반짝였다.

“내가 예뻐?”

“좋아하는 걸 나누려는 마음씨가 예쁘십니다.”

듣고 싶은 칭찬을 받아낸 조나단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걸 본 지젤은 자신의 여동생, 이엘리야가 겹쳐 보여 명치가 욱신거렸다. 불쌍한 내 동생.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시고 드시고 싶으면 더 달라 해 드세요. 왕자님께서 드시고 싶으신 걸 참으실 필요는 없어요.”

“으응.”

조나단은 고개를 붕붕 가로 내젓고는 지젤의 뺨에 짧게 입 맞추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젤이 그런 조나단을 향해 고개를 숙여줬다.

아이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 중에 지젤이 가장 좋았다. 지젤은 드레스가 더럽혀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항상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 꿇어주고, 사소한 얘기도 집중해서 들어줬다. 낮잠을 잘 때도 손을 꼭 잡아주고, 깊게 잠들 때까지 등을 토닥여줬다. 그리고, 조나단이 잠에서 깨기 전에는 절대 말없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다니엘 부인이 제일 좋아.”

왕비가 유난히 아들에게 매섭게 구는 건, 자신이 당장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에 퍼져 나온 걱정 탓일 거였다. 지젤은 왕자가 걱정되지 않았기에, 이렇게 마냥 다정하게 굴어줄 수 있었다. 지젤은 이따금 아이가 기분 좋으면 하는 애정 표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눈을 감고 뺨을 내줬다.

“어딜.”

지금 내 눈앞에서 뭘 하려는 거야. 이안이 눈가를 파르르 떨며 조나단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꾹 밀어냈다. 그에 지젤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저하, 바쁘신 용무가 없으십니까?”

“날 내쫓고 둘이 놀고 싶은가 본데, 싫어.”

이안은 조그만 밤톨 같은 게 벌써부터 입술부터 들이대는 게 괘씸해서 눈썹을 찡그렸다. 이쪽은 지금 손도 못 잡아봤는데.

“내 눈앞에서 뭘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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