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34)화 (34/135)

34.

자신의 주군을 찾은 제인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광경에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떡이 된 조지 콜튼 경의 가슴이 미약하게마나 들썩이는 걸 보고 그녀는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살아있네. 귀찮게 파묻을 곳을 찾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정말 죽여버리기 전에 치워.”

“예-.”

제인이 뒤의 기사들에게 손짓하자, 기사들도 능숙하게 널브러진 사람을 이안의 시야에서 멀어지도록 치워냈다. 제인은 양 주먹에 피가 잔뜩 묻은 황태자를 가만히 보다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건 저 미친놈이 왜 그 여자 앞에서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지인데.

“지젤은?”

“아까 가셨습니다.”

제인은 콜튼이 지젤을 주시하던 것 때문에 맞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심기를 건드려서 맞은 것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기울였다. 어찌 되었든. 제인은 눈썹을 긁적이며 피로한 듯 머리를 쓸어 넘기는 이안을 바라봤다. 흉포하기 그지없는 남자가 어딘지 초췌한 표정으로 한숨을 삼켜내는 게 이질적이었다.

사실, 적당히 움직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이쪽 감정이 깊은 게 재밌단 말이지. 호기심이 귀찮음을 이긴 제인이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속으로 하품을 삼켰다. 그 의원부터 다시 짚어볼까. 아니면, 하녀를 찾아볼까. 그녀는 판단력이 흐려진 주군 대신에 똑똑하게 움직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콜튼 경이 헤넌 공작과도 접촉했습니다. 아무래도 귀족들 중에 왕비의 편에 설 적당한 사람을 고르려는 것 같은데, 공작이 여지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저택의 입구에 선 다이한은 지젤을 태운 마차가 저택에 들어서는 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들어 지젤은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그 이유가 뭔지 가늠하던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입 안의 혀를 짓씹었다. 한센이 그런 후작을 슬그머니 올려다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둬.”

“하지만, 지금 적당히 겁을 줘야-”

다이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리는 지젤을 보며 한센을 향해 말했다.

“신경 쓸 일 아니야.”

그 단호한 말에 한센은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황태자 때문에 다이한의 신경이 곤두서있다는 걸 아는 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켜냈다. 그는 이 복잡한 관계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이한이 성큼 마차 앞으로 다가서자 바닥을 내려다보던 지젤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후작님.”

아무 표정 없던 지젤의 얼굴에 옅게 미소가 퍼졌다. 그걸 보면서 다이한은 말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걸 자연스럽게 잡아 쥔 지젤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을 뵙고 오는 길이에요.”

“몸은?”

다이한은 그녀의 약지에서 반짝이고 있는 결혼반지를 내려다봤다. 그는 저 반지가 그녀의 손에 자리한 지 5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멀쩡하니 걱정 마세요.”

그는 그녀의 말이 거짓말인 걸 너무 잘 알았지만, 그걸 짚어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지젤을 그대로 정원 쪽으로 이끌며 나직하게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그의 말에 지젤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이쪽 손을 잡고 걷는 모양새를 보니 저녁 먹기 전에 산책을 하자는 것 같았다. 잠깐 숨을 고른 지젤은 자연스레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들으셨나요? 바르한 자작이 투자자를 더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모양이더라구요.”

다이한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초록 눈이 저녁노을을 머금어 영롱하게 빛났다. 지젤은 단 한 번도 그게 따스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본이 모자라 일이 어그러질까 불안합니다. 제가 괜히 관심 보여서, 후작님께서도 꽤 큰돈을 투자하셨는데, 괜히 잘못되면-”

“내일 자작을 만나서, 필요한 만큼 내가 더 투자할 테니 걱정하지 마.”

“네?”

순순히 흘러나온 원하는 대답에 진심으로 놀란 지젤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이렇게 쉽게, 그냥 돈을 내주겠다고? 한 번 크게 다치고 나더니, 씀씀이가 헤퍼진 걸까? 지젤이 의심을 감추고 무표정한 다이한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바르한 자작이 필요로 하는 금액은 후작이 가진 영지의 절반 이상을 저당 잡혀야 하는 금액이었다. 근데, 그걸 투자하겠다고?

“내가 다 해줄 테니까.”

다이한은 이쪽을 유심히 살피는 지젤의 푸른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그녀의 약지에 자리한 결혼반지를 힘줘 눌러냈다.

***

“허어.”

제인은 작은 저택 뒤의 나무에 목매달아 죽어있는 의원을 보며 한탄을 내뱉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로 바람에 흔들리는 시체를 보는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아서 그녀는 짧게 혀를 찼다.

“자-, 이러면.”

인간으로서 느끼는 불쾌함을 빠르게 털어낸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긴 채 허리춤에 있는 검을 만지작거렸다.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독특한 상황인데, 그걸 진단한 의원이 갑자기 자살했다. 왜?

“진짜 점점 이상해지잖아?”

일이 너무너무 흥미진진하게 흘러가고 있단 말이지. 제인이 눈을 반짝이며 뒤에 서있던 기사들에게 물었지만,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제인이나 황태자나 제정신 아닌 건 마찬가지였다.

***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있죠?”

지젤은 스텔라가 새된 목소리로 감탄하는 걸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막 보석상에 도착했는데, 벌써 피곤해. 지젤의 피로함에 동감하듯 공작 부인인 리안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자작 부인께 안 예쁜 보석이 있나요.”

값비싼 거라면 다 좋아하시니, 원. 리안나의 말에 동의하듯 지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부인들끼리 모여 이따금씩 보석과 옷을 사는 자리는 지젤을 지루하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시간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쓰고 싶지만, 재력을 과시하고 서열을 매기는데 필요한 일이니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했다. 보석상 한쪽에 마련된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앉은 지젤이 눈을 감고 피곤함을 드러냈다.

“제가 특별히 숨겨둔 물건이 있는데 꺼내와도 되겠습니까?”

점장이 슬쩍 지젤과 리안나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다른 귀부인들이야 씀씀이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지만, 공작 부인과 후작 부인은 딱히 정해진 예산을 두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숨겨둔 물건?”

“붉은 루비입니다. 북쪽 광산에서 딱 하나 나온 원석을 황국 제일가는 명장이 다듬었답니다.”

스텔라가 나서서 관심을 보이자 직원들이 잽싸게 보석함을 꺼내와 귀부인들 앞에 내놓았다.

“세상에, 세상에. 색 찬란한 거 보세요. 너무 예쁘지 않나요?”

엄지 손톱만 한 붉은 루비는 물론 아름다웠지만, 대단한 물건을 너희를 위해 특별히 숨겨뒀다고 생색내는 상술이 슬슬 지겨워져서 지젤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이건 가격이?”

스텔라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 말에 점장이 난처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특별히 빼두기는 했지만-. 사실, 이건 경매로 판매해야 할 물건이라 부르는 게 값이랍니다.”

그의 말에 스텔라가 깊게 한숨을 쉬며 얼굴을 굳혔다. 이렇다 할 재력가도 아닌 자작 부인이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얘기였다. 저깟 보석 얼마나 한다고. 스텔라가 이를 아득 물고 보석을 노려봤다. 가지고 싶은데, 빌어먹게도 가질 수 없는 기분이 더러웠다. 투자금을 구하러 뛰어다니는 판에 자작이 이걸 사줄 리가 없었다. 점장이 슬쩍 스텔라에게서 보석을 물리고 리안나를 향해 내밀자 그녀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글쎄, 루비는 내 취향이 아니라.”

리안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지젤을 보자 지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가지고 싶지 않았다. 구매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두 사람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다른 귀부인들도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점장이 난처함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럼, 그거 제가 살게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귀부인들이 모여 앉아있는 곳에 서슴없이 다가온 금발의 여자가 화사하게 웃어 보이며 재차 말했다.

“헤넌 공작님의 이름으로 달아주세요.”

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리안나에게로 쏠렸다. 리안나의 얼굴에서 평소의 여유로움이 사라지고 분노가 가득 자리 잡았다. 지젤은 당차게 이쪽을 향해 시비를 거는 공작의 애첩, 나탈리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젤은 귀부인들의 눈빛이 순간 번득이는 걸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이에나 같은 여자들이 신나서 떠들겠네.

“어쩜 염치도 없이 보석이라니, 수도의 저택을 받은 걸로는 부족했나 보죠?”

“공작께서 저 여자를 아직도 만나고 있는 건가요? 몇 년이 지난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속닥거리는 소리가 지젤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젤은 헤넌 공작의 애인이라는 여자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지젤이 황태자에게 얘기했던 대로, 어리고 예쁘니 적당한 여자였다. 똑똑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입 안이 써서 지젤의 미간이 옅게 주름이 잡혔다.

“그게-.”

점장이 리안나와 나탈리를 번갈아 보며 곤란해하자, 나탈리가 재차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그거 가져갈 테니 평소처럼 저희 공작님의 이름으로 달아두세요.”

나탈리가 리안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기고만장하네. 지젤이 심드렁한 얼굴로 나탈리라는 여자가 이러는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 이렇게 해서 얻는 게 뭘까. 하긴, 이유랄 게 딱히 있나. 심보가 못되고, 질투가 심하며 주제를 몰라서 이러는 거겠지.

“언제부터 급을 안 가리고 손님을 받기 시작한 거지?”

리안나가 이를 악물고 점장을 매섭게 노려보며 묻자, 점장이 어버버하며 뒤로 물러섰다. 사실, 급이고 뭐고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가게였으며 나탈리는 공작이 직접 데리고 오는 손님이었다. 물론, 요 근래는 좀 뜸해지기는 했지만 나탈리가 공작가의 이름으로 외상을 걸어두고 물건을 가져가면 공작이 결제는 해줬으니 이쪽에서는 괜찮은 손님이었다.

“그것이. 그, 헤넌 공작님께서 직접 데려오신 분이라 저희는 어쩔 수 없이-”

“급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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