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33)화 (33/135)

33.

지젤이 차분하고도 침착하게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안은 그녀의 말에 어딘지 아득해져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사이에 지젤이 그의 손아귀에서 공을 빼앗아서는 조나단 쪽으로 던져줬다. 어린 왕자가 다시 공을 들고 제인과 뛰어노는 걸 보면서 지젤은 숨을 내뱉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일까.”

이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젤을 향해 묻자, 지젤은 손에 끼고 있는 보라색 실크 장갑 끝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평이하게 대답했다.

“저하께서 제게 얻고자 하시는 게, 그것 외에는 없을 것 같아서 미리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황태자한테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젤은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괘씸하고 건방지다 미움받는 게 편할 것 같았다. 아까 그의 말대로 그녀는 흔들릴까 무서웠다. 얼굴 몇 번 본 걸로 너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그녀는 이제 미하엘 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

“편한 애첩을 하나 만들어두시고 싶으시다면, 황궁 근처에 있는 사람이 써먹기 편하실 겁니다.”

애첩? 뭘 하기가 편해? 이안은 혀끝에 걸리는 욕설과 험악한 말들을 애써 억누르며 지젤을 노려봤다. 그의 날카로운 분노에도 지젤은 기죽지 않고 태연하게 그를 마주 봤다. 그 푸른 눈에 담긴 평온함이 그를 더 비참하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저보다 더 어리고, 예쁘고, 똑똑한 여자는 많을 테니까요.”

“갑자기 애첩 운운하며 내 기분을 더럽히는 이유가 뭐야.”

“그렇지 않고서는, 유부녀에게 이러실 이유가 있나요?”

어이가 없어서 작게 소리 내 웃던 그는 이내,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를 아득 물었다. 속이 뒤집혀서 당장 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너는 날 너무 비참하게 만들어.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당장 지젤의 멱살을 잡고 쌓아뒀던 원망을 쏟아내 눈으로 확인시켜주고, 분노의 응어리를 끄집어내 손에 쥐여주어 그녀가 후회하고 사과하는 걸 보고 싶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제 단어 선택이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형식적인 사과에 이안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든 감정의 끝에서, 그는 지젤이 얼마나 힘들었냐고 자신을 안아주길 원했다. 이안은 이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사과하는 지젤을 보며 이를 아득 물었다.

“내가 단순히 너랑 그런 걸 하고자 했으면, 넌 이미 내 침대에 묶여있었을 거야.”

“그렇게 대단하신 분인 줄 제가 몰랐네요.”

이안은 지젤의 비아냥거림에 동요하지 않았다. 문득, 이안은 애정을 주는 것도 상대의 허락 없이는 그저 더러운 욕망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치스러워졌다. 방금 침대 어쩌고 한 발언도 창피하게 느껴졌다. 아니, 사실은 옆에 있어도 제대로 손도 못 잡는 자신의 처지가 초라했다.

“우리 지젤 님은 한마디도 지질 않지.”

예전부터 너랑 말싸움해서 내가 얻는 게 없었으니. 이안이 깊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있다가는 화를 못 참고 더 모난 말만 할 것 같으니, 오늘은 먼저 가지.”

이안이 거친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나는 걸 보면서, 지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얗게 질린 이안의 얼굴에 담긴 울분이, 서럽다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답지 않게 감성적인 해석이었다.

제인은 갑자기 심통이 잔뜩 난 얼굴로 떠나가는 황태자와 그걸 빤히 지켜보는 지젤을 보고는 입을 삐죽였다. 제인은 징징거리는 조나단을 다른 기사에게 맡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뭐지, 대체. 무슨 엄청난 매력이 있는 걸까. 제인이 노골적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다가오자, 지젤은 깊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 기대앉았다.

“경께서 제게 관심이 많으신 듯합니다.”

궁금한 걸 못 숨기시네요. 한숨 섞인 말에 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왜요?”

무슨 마성의 매력이 있으신가 싶어서요. 황태자도 후작도 묘하게 집착하는 게 상식적으로 이상해서요. 제인이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고민하는데, 지젤은 그런 제인을 올려다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고집 있어 보이는 여기사의 관심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황국에서 나고 자라셨다 들었는데, 왕국 생활이 지루하시겠어요.”

“곧 돌아갈 테니, 그건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흥미롭기도 하구요. 어깨를 으쓱인 제인은 지젤의 시선이 자신의 뒤로 향해있다는 걸 깨닫고는 눈을 깜빡거렸다. 눈치 빠른 제인은 몸을 뒤로 돌려,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콜튼 경?”

왕비의 기사인 그가 대놓고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에 제인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데, 지젤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요즘 정말 인기가 많아요.”

하다 하다 저렇게 대놓고 감시를 할 정도로. 제인은 지젤의 푸른 눈이 예쁘게 접히며 반짝이고, 그녀가 교태롭게 붉은 머리 끝을 손가락에 감아내는 걸 보면서 몸을 굳혔다.

“이걸 감사히 여겨야 할지, 불쾌해해야 할지.”

이 짧은 순간 제인은 지젤에 대한 편견 중 하나를 깨낼 수 있었다. 그녀는 여태 후작 부인이 얌전한 인형 같다고 생각했는데, 일순 눈에 도는 적의와 분노가 매서웠다.

“고민하는 중이랍니다.”

귀 기울여야 들을 수 있도록 조용하게 중얼거린 지젤이 조지 콜튼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제인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경의 관심은 제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될까요?”

제인은 눈앞의 여자의 물음에 말문이 막혀서 대답 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젤은 그런 제인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이쪽을 주시하는 조지 콜튼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제인은 그런 지젤을 슬쩍 보고는 의원을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녀는 지젤에게 자신이 섬기는 황녀와 비슷한 면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저하께서 사냥을 즐기시는지 몰랐습니다.”

이안은 옆에서 어물쩍대며 말을 거는 조지 콜튼인지 뭔지의 입을 쭉 찢어버리고 싶었다. 갈 곳 없는 분노가 그의 안을 맴돌아서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별 볼 일 없는 작은 사냥터에서 잡을 수 있는 것이란 기껏해야 사슴이나 여우 몇 마리뿐이었음에도 이안은 활을 집어 들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황국에 데려갈까. 아무도 모르게? 후작 따위 죽여버리고, 지젤은 품에 안아서 숨겨놓으면 누가 알까? 안다 한들 누가 뭐라 할까? 그런 몹쓸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이어서 그는 거칠어지는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뭐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입 다물고 꺼지는 게 네 신상에 이로울 것 같은데.”

“후작 부인에게 친밀하게 구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한낱 왕비의 기사 따위가 무서운 줄 모르고, 입을 함부로 놀리니.”

이제는 하다 하다 별 거지 같은 게. 이안이 활을 툭 바닥에 던지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지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네까짓 게 뭐라고 내가 답을 줘야 한단 말인가.”

“황태자 저하께서, 마가렛 님을 위협하는 후작 부인과 친밀하게 구시는 이유가 납득이 안 갑니다.”

벌써부터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후작 부인이 매일 입궁해 왕자를 돌보고, 그 옆을 황태자가 맴돌며 이상한 친목 도모를 해나가고 있다고. 거기에, 음험한 소문까지 슬쩍 얹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당장 혀를 베어내야 옳았는데, 기가 막히게도 이안은 눈앞의 남자를 죽일 수가 없었다. 그는 지젤이 자신의 그런 면을 알게 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되도록 참으려 했으나 끓어오르는 분노를 마냥 삼켜내기가 어려워서 그는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내가 너 따위의 이해를 바라고 움직여라?”

“후작 부인에게 사적인 감정을 지니고 계시는 게 아니라면, 어째서 지금 이 상황에-”

“사적인 감정이라.”

죽을 각오를 하고 황태자에게 따지고 들던 조지는 이안의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어떤 감정.”

이안은 그가 단 한마디만, 단 한 단어만 뱉어내도 불경죄로 죽여버리리라 마음먹었다.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로 목숨을 잃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하, 후작 부인은-”

조지 콜튼은 신중히 말을 고르다가, 이내 집어치웠다. 어차피 왕비가 무너지면 그 밑에서 온갖 일을 다 하던 이쪽도 명줄이 끊길 게 분명했다.

“후작 부인은 아픈 척을 하는 겁니다.”

이안은 겁 없이 입을 놀리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대강 돌아가는 꼴을 보면, 지젤과 왕비가 정치적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왕비에게 지젤은 존재 자체가 위협이니까, 근데.

“아픈 척?”

“다니엘 부인은 사람들의 동정을 사고, 영악하게 그 뒤에 숨고 있습니다.”

이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아주 천천히 내뱉었다. 애초에 제 발로 여기 돌아올 때부터 이성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움직인 건 아니었지만, 그는 본인이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손을 움직였다. 이안이 순식간에 콜튼의 목을 잡아 누른 채로 밀어붙였다. 콜튼이 다급하게 밀어내려 했으나, 그의 숨통을 쥔 자비 없는 손은 밀리지 않았다.

“한심하게 왕비 밑에서 설설 기어 다니는, 네까짓 게 뭘 알아서.”

그가 장담하건대 지젤은 아팠다. 처음에야 원망에 가려져 보지 못했지만, 옆에서 가만히 바라볼수록 그녀는 아파 보였다. 단순히 메마른 몸과 억지로 내뱉는 건조한 웃음소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 며칠 옆에 있었을 뿐인데,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고 남을 의식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면, 내면에 자리 잡은 무언가를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감히 네가 뭘 안다고.”

콜튼은 검은 눈을 희번덕이며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는 황태자를 밀어내려 애쓰며 숨을 허덕였다. 빈틈없이 목을 죄는 힘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을 뽑으려 했던 콜튼은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직감적으로 검을 뽑는 순간 베이는 쪽은 황태자가 아닌 이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름의 현명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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