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어느 여름, 열다섯 살의 지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저건 뭔데? 그녀는 나무 뒤에 숨어있는 소년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처음에야 민망해서 모른 척했지만, 저렇게 대놓고 부스럭거리니 울컥 화가 솟아올랐다.
“넌 뭔데 맨날 숨어서 내 노래를 훔쳐 들어? 계속 들을 거면 돈 줘.”
아버지가 들으면, 네가 집시냐고 혼쭐이 날 말이었지만 지젤은 상관없었다. 그리고 대뜸 수풀을 헤집고 당당히 금전을 요구하는 지젤을 보며, 흑발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너 맨날 여기 숨어서 엿듣잖아. 기분 나빠!”
경계심이 가득한 푸른 눈이 매서워지는 걸 보면서, 이안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나 아니야, 나 오늘 처음 왔단 말이야.”
“거짓말! 너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여기 앉아있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무슨-”
“어쨌든, 엿들었다는 거잖아?”
이안은 억울했지만 그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해서 얼굴을 확 구겼다. 그래서 그는 품 안의 금화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뭐, 얼마를 줘야 되는 거야. 그렇게 잘 부른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가 삐뚤어진 심보를 숨기지 못하고 입을 삐죽였다.
“돈 없지?”
“뭐라고?”
“그럴 줄 알았어. 딱 봐도 그래 보여.”
“뭐?”
물론, 별장 시종의 옷을 빼앗아 입고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맹세코 태어나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무도 황태자인 그에게 돈이 없는 걸 안다며 업신여기지 않았다. 얼굴에서 귀티가 흐르면 흐른다 했지, 딱 봐도 거지 같아 보인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울컥한 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마디 하려는데, 지젤이 더 빨랐다.
“그럼, 옆에서 박수나 쳐.”
휙- 하니 그의 손을 낚아챈 지젤이 이안을 수풀에서 끄집어냈다. 이안이 얼결에 그녀의 손길을 따라 걸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보고 뭘 하라고?”
“내 노래가 좋아서 듣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럼, 옆에서 박수나 치라고.”
탬버린 치는 원숭이 인형처럼, 그럼 돈 안 받을 테니까. 지젤은 척 봐도 평민인 남자아이가 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돈을 받을 생각도 아니었다. 맨날 죽은 듯이 노래나 듣고 홀연히 사라지는 게 얄미웠을 뿐이었다.
“맨날 엿듣기나 하고.”
“그러니까, 사람 말을 좀 들어. 나 오늘 여기 처-”
텁-. 지젤이 이안의 입을 한 손으로 막아버리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어허, 가만히 앉아서 듣기나 해.”
태어나 말문이 막혀본 적이 없던 이안은 황당했고,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앉아서는 눈만 깜빡거렸다. 그는 지젤이 거만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서 뭐 이런 안하무인 건방진 여자애가 다 있나 싶어서 얼굴을 구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자리를 벗어나거나 고함을 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지는 않았다. 가까이서 본, 반달처럼 휘는 장난기 가득한 푸른 눈이 생각보다도 예뻐서 소년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지젤 아벨린. 넌?”
“나는.”
이안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 저 눈에 장난기가 아닌 다른 게 담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황국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이곳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어린아이의 오만이었다. 하여튼, 그게 맞는 것인데 소년은 저 즐거움이 가득한 눈을 조금만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래저래 이상한 일이었다. 그저 편하게 쉬려고 산에 숨었을 뿐인데, 노래나 엿듣다가 혼나고 그게 기분 나쁘지 않다니.
“너 몇 살인데, 네 이름도 몰라? 내 동생도 자기 이름은 알아.”
지젤이 핀잔을 주며 재촉하자 이안은 입을 열었다.
“미하엘.”
이안이 반사적으로 내뱉은 시종의 이름에, 지젤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 미하엘.”
아, 붉은 머리카락이 햇살에 반짝이는 게 예뻐서 그런가? 소년은 자신의 사고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
“다니엘 부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이야?”
안락한 의자에 기대서 설핏 잠이 들었던 지젤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내려다봤다. 조나단의 악의 없는 해맑은 얼굴에 지젤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답니다.”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미하엘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숨을 내뱉듯 거짓말을 했다. 그런 지젤을 올려다보며 조나단이 입을 삐죽였다. 어린아이의 오동통한 뺨을 보며, 지젤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요즘 들어 바짝 신경을 써서 그런가, 몸이 계속 늘어지고 피곤했다.
“부인이 요즘 나랑 잘 안 놀아줘서 지루해.”
예전에는 내 말도 많이 들어주고, 손도 잡고 있고, 밥도 다 먹여줬는데! 조나단이 내뱉는 원망에 지젤이 옅게 미소 지으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이안이 그걸 막아섰다.
“대신 제인 경이 열심히 놀아주고 있잖아. 제인.”
옆에 앉아서 가만히 잠든 지젤을 구경하고 있던 이안이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제인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제인이 썩은 치즈를 물고 있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조나단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그녀의 직업이 보모는 아니었지만, 황태자가 시키면 해야 했다.
“더 자.”
조나단이 제인의 품에 안겨 멀어지자, 이안이 지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지젤은 그런 그를 흘끔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작 부인이 대놓고 졸면, 시종들이 흉을 봅니다.”
“그깟 아랫것들 눈이 무서워 편히 쉬지도 못하다니.”
이안이 투덜거리는 걸 보면서, 지젤은 자신이 이상하리만큼 긴장이 풀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요즘 들어 계속 미하엘의 꿈을 꾸고는 했다. 황태자와 너무 닮아서 그런 건가. 이렇게 졸 때가 아닌데, 왕자를 더 품에 끼고 예뻐해야 하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해진 지젤을 보며 이안이 툭 말을 던졌다. 지젤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황태자는 연회장 테라스에서 그녀가 도망쳤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그녀에게 치근덕거리기는 했지만, 미묘한 선을 넘지도 않았다. 지젤은 이안이 왕비의 편을 들기 위해 여기 남아있는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내 약점을 찾기 위해 황국 기사들이 의원을 찾아간 거지.
“왜?”
“생각이 많아져서요.”
지젤이 한숨처럼 대답하자,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그녀의 무덤덤한 얼굴이 낯설었다. 다채롭던 그녀의 얼굴이 표정 하나 담고 있지 않는 게, 이질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누구보다 환하게 웃을 수 있었는데, 꽃 한 송이에도 다이아몬드라도 받은 것처럼 벅차게 기뻐하던 사람인데.
“대체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을까.”
‘지젤, 넌 고민이 너무 많아.’
지젤은 계속 떠오르는 잔상과 과거의 기억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황태자는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말에 이쪽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흔들렸다. 몇 년 동안 미하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의식했기 때문이었을까? 대체 왜 이럴까. 이제 와서 겨우 이런 걸로 흔들려서 틈을 보이면, 후작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어그러질 텐데. 미하엘 꿈을 꾸는 빈도도 잦아졌다.
“저하, 가을 전에는 가실 거죠?”
가볍게 접근해오는 황태자의 목적이 내 약점을 찾기 위해서라면, 아예 바보처럼 굴어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건 항상 하는 일이지.
“또 그 이야기.”
그저 날 보낼 생각뿐인지.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지젤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꼴도 보기 싫어서 보내버리려는 걸까.”
사실 황국에서도 대체 황태자가 거길 가서 뭐 하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아니면, 그 반대라 빨리 떠나길 원하는 걸까.”
뭐가 무서워서. 이안이 보조개가 푹 파일 정도로 웃어 보이자, 지젤은 휙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내려다보며 교태롭게 웃는 황태자의 얼굴이 껄끄러웠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네요.”
“아직 모른다니 안타깝네.”
“저하께서는 절 희롱할 생각으로만 가득하신가 봅니다. 여러 의미로 대단하십니다.”
“희롱은 아니고. 온종일 그대 생각을 하기는 해.”
지젤을 흔들어 홀라당 집어 갈 생각만 가득 찬 그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는 이제 곧 황제가 될 테니, 다 감당할 수 있었다. 지젤만 되찾을 수 있으면 다 괜찮았다. 말 그대로 되찾는 일이었기에, 그는 그게 제법 정당하고 당연하다 생각했다.
“공!”
어떻게 된 게, 황태자하고는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휘말리는 느낌이라 눈살을 찌푸리던 지젤은 발치까지 굴러온 공을 내려다봤다.
“내 공!”
조나단이 저 멀리서부터 공을 되찾으러 뛰어오고 있었다. 지젤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공을 집어 들려 하는데, 이안이 그녀와 동시에 그 공을 잡아 쥐었다. 후작 부인과 황태자가 작은 공을 같이 잡고 있는 걸 보면서, 시종들이 무안하게 손을 뒤로 물렸다.
“아.”
금색 공을 서로 놓지 않고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그 이상한 상황에 지젤은 작게 탄식했다. 공을 쥐고 있는 그의 하얗고 커다란 손과 그 손등을 타고 올라가는 푸른 핏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너무 가까이 서있는 터라 새삼스럽게 황태자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젤의 시선이 그의 손목을 타고 올라갔다. 이윽고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굳게 닫혀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의 열기가 말 그대로 뜨거웠다. 웃음기 없는 얼굴이 딱딱하고, 매섭기 그지없었다. 와중에도 집요한 눈길이 그녀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사실, 지젤이 여태 유혹을 한 번도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돈 많고 조용한 후작 부인의 애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은 물론 후작을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알게 모르게 연애를 용인하는 귀족 사회의 룰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후원받기를 원하는 예술가부터 나태함을 물리칠 짜릿한 무언가를 즐기고 싶어 하는 귀족들까지. 5년 동안 이쪽을 향해 추파를 던졌던 사람들을 되새긴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들은 원하는 바가 참 뚜렷했는데, 황태자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너무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 허점을 찾아내 왕비의 정치적 입지도 세우고, 나한테서 재미도 볼 생각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볼멘소리가 깊은 생각을 거치지 못하고 툭 튀어나왔다.
“저는 저하와 동침할 생각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