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31)화 (31/135)

31.

황태자의 말에 지젤이 의식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저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낼 것 같았다. 그게 뭐 속상할 일이라고. 정말 우울해 보이는 황태자를 보며 지젤은 멋쩍게 미소 지었다.

“속상할 게 있나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저하께서 담배를 피우시는 걸 몰랐는걸요.”

저희 둘 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하죠. 어쩐지 입 안이 써져서 그녀는 숨을 한 번 삼켜내고 말을 이어야 했다. 지젤은 최대한 씁쓸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부러 밝은 목소리로 답하고는 미소 지었다. 그가 그런 그녀를 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녀에게 일러줬다.

“부인께서는 알아두시는 게 좋겠군. 나는 담배는 피우지 않으니.”

“그럼, 저건-”

지젤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희뿌연 연기가 미약하게 흘러나오고 있는 파이프를 손짓하자 이안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쥐었다. 지젤이 손을 물리려 했으나, 그는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흑발이 가볍게 허공에 흩날렸다. 이안은 초록색 실크 장갑으로 감싸져 있는 지젤의 손등에 조용히 입술을 내리누르며 속삭였다.

“내가 담배는 감히 손도 댈 생각을 못 하고 자라서.”

혹여라도, 고운 목소리에 해가 될까. 뒷말은 삼킨 이안의 숨결이 지젤의 손등을 간질이자, 그녀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지젤은 분명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그의 입술이 온전히 느껴졌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안이 아쉽게 입술을 떼어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다시 입술을 내리누를 수 있을 정도로만 물러선 그가 고개는 여전히 숙인 채로 눈만 들어 올려 지젤을 바라봤다.

“기관지에 좋은 약초 따위를 말려 태우는 걸로 대신하고는 하니, 오해하지 말라고.”

“아-.”

그걸 보면서 지젤은 소리 내 탄식했다. 그녀는 황태자가 얼마 남지 않은 제 인생을 망치러 온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하엘을 닮은 얼굴로 이렇게 단시간에 자신을 쥐어흔들 수가 없었다.

“지젤?”

이안이 숨을 멈추고 굳어있는 그녀를 부르자, 지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얼굴로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녀는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몰린 게 당황스럽다 못해 황당해서 그대로 그 자리를 박차고 발코니를 벗어났다.

***

“저하, 제가 정상인이라 그런가. 모든 상황이 되게 이상합니다.”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얼굴을 구겼던 제인이 작게 탄식했다. 정확하게는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뱉었던 말을 빠르게 정정했다.

“정확하게는 저하가 정말 이상하십니다. 무례하고도 불경스러움을 알면서도 말씀을 올리자면 굉장히 바보 같으세요.”

침실 중앙의 소파에 누운 이안은 제인이 하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까 봤던 지젤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뜨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자칫 잘못하면 그 잔상이 날아갈 것 같았다.

푸른 눈이 물기에 젖어 반짝이고, 하얀 뺨에 붉은빛이 번지는 표정이 계속 맴돌아서 그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런 얼굴을 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끝에는 우는 것밖에 눈에 담지를 못해서. 모난 말들밖에 나누지를 못해서.

“되도 않게 떼쓰시면서, 어설프게 후작 부인 꼬시려는 것도 이상하고.”

무례하다는 걸 알면서도 제인 경은 하고 싶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보기에는 다 이상했다.

“그러시면서, 매번 후작가에 돌려보내시는 것도 이상합니다.”

“그럼 억지로 데리고 황국으로 갈까?”

“그게 편하지 않으십니까.”

힘으로 억지로 끌고 황국 돌아가시면, 모든 게 해결되는데요? 후작 부인이라 좀 골치 아프기는 하겠지만, 황제가 취하겠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무신경한 제인의 말에 이안은 눈을 감고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앞으로 여태 못 받은 만큼, 아주 많이 사랑받을 거야.”

“그게 가능은 하겠습니까?”

“지젤은 날 사랑해.”

이안이 방금 자신이 한 말을 곱씹어보고는 미소 지었다. 붉은 입술이 보기 좋게 호선을 긋는 걸 보면서 제인은 입을 삐죽였다.

“정말 약이라도 하시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냥 이 귀찮은 과정 전부 건너뛰고 억지로 데리고 가나, 살살 꼬셔서 데리고 가나. 비슷하지 않은가. 전자를 택하면, 이쪽도 빠르게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차에 태워서 황궁으로 끌고 가셔도 납치범이 저하라는 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요.”

“제인, 네가 그러니 주위에 사람이 없지.”

이안의 비난에 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본인이 제일 외톨이면서 누굴 친구도 없다고 비난해. 어쨌든 이상한 데서 상식적으로 구는 황태자였다.

“방해하지 말고 나가.”

이안은 친구 한번 만든 적 없는 무지한 제인과 더는 말을 섞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지젤을 억지로 끌고 가고 싶다 생각은 했지만, 그는 그걸 실천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지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젤을 아프거나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추악한 독점욕을 숨길 인내가 남아있었기에, 이안은 속내를 숨기고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

“지젤 님?”

미아는 저택으로 돌아온 후작 부부를 맞이하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평소라면 조금 피곤한 듯 들어서며 나른하게 하품을 하고 있을 지젤의 얼굴이 묘하게 상기되어있었다. 그게 이상해서 미아가 미간을 구기는데, 비앙카가 능숙하게 지젤의 옆에 서며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몸이 안 좋으시더니, 열이 오르시나 봐요.”

지젤은 태연스럽게 거짓말을 쏟아내며 자신을 맞이하는 비앙카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안에 들어가서 쉬고 계시면 제가 열을 내리는 차를 끓이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어지럽다는 듯 머리를 가볍게 짚은 지젤이 비앙카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하게도, 아직도 얼굴이 붉다는 걸 지금에서야 눈치챘다. 놀라서 그런 거야. 지젤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비앙카에게 의지해 계단을 올랐다.

그런 지젤을 끌까지 눈으로 쫓던 다이한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아직 괜찮았다.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쥔 채로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불안이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기 때문이었다.

***

후작가의 별채보다 작은 저택의 중앙에 홀로 앉은 의원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후작이 저지른 죗값을 돌려받는 거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소리도 없이 저택에 들어와 있는 지젤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무얼 하시든 간에, 빨리 끝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다들 늙고 쓸모없는 저에게까지 와서 지젤 님이 정확하게 어디가 아팠던 건지 궁금해하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저는 가만히 있는데, 다들 절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요즘 정말 힘드네요.”

지젤이 천연덕스럽게 하소연을 하며 미소 지었다. 그걸 보며 의원은 차라리 침대에 누워 노래를 부르고 악을 지르던 모습이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가 좀 들면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집에 들어선 침입자를 보며 동요하지도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알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들려서는.”

지젤은 마치 자신이 찾아올 것을 알았던 것처럼 덤덤한 노인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황국 기사단이 의원을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기에 정확하게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온 건데. 노인은 난데없이 본인 하고 싶은 말들만 늘어놓았다.

“참으로 불쌍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말입니까?”

지젤이 노인에게 다가서며 물었지만,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들만 이어갔다.

의원은 다이한이 지젤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함구시키고, 숨기려 애쓴다는 걸 알았다. 후작은 지젤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라며 손가락질당하고 무시받을까 걱정했다. 사실, 의원은 후작이 저택을 떠난 몇몇의 하인과 하녀들을 땅에 묻어 입을 막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말을 조심히 아끼며 후작 부인에 관한 일은 신중히 움직였다.

“내가 불쌍해 보이나요?”

지젤이 재차 의원에게 물었지만, 그는 확실하게 긍정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대신에 차분히 말을 이었다.

“후작께서 지젤 님이 기억을 잃은 게 맞는지 물으셨을 때, 저는 그럴 수 있다 했습니다.”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단박에 알아들은 지젤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의원은 그런 지젤의 시선을 피하듯 눈을 내리깔고 고해성사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덮어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는 이제 와 그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젤은 무엇으로도 덮을 수 없는 흉터를 지닌 사람이었다.

“지젤 님께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도 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기 검진을 하다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는 그걸 후작에게 고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방관뿐이라며 모른 척했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이미 지젤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충분히 불행하고 불쌍했다. 그리고 침묵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젤 님, 뭐 하나만 여쭐 테니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근데 지금 이렇게 되짚어 보자니 어쩌면 그는 본인이 지젤을 도운 것이 아니고, 더한 고통 속으로 내몬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싹텄다.

“그리하시면, 그렇게 원하는 바를 얻고 나면.”

지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들게 말을 잇는 노인을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럼 지젤 님께서 평안해지시리라 확신하십니까?”

“예.”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 5년 동안 곱씹고 고민하고, 고뇌해도 답은 이거 하나였다. 노인이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았기에, 지젤 또한 솔직하게 그에게 대답해줬다.

“내가 원하는 바를 얻는다면, 아등바등 역겨운 버러지처럼 땅을 기더라도 나는 웃을 수 있습니다.”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한 고통을 꼭 안겨줘야 공평했다. 그걸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무언가 포기하고 체념한 듯 어깨를 힘없이 늘어트린 의원을 마주 보는 지젤의 푸른 눈이 매서웠다. 당신이 뭘 안다고 나를 불쌍히 여겨? 이를 악문 지젤은 그대로 말없이 등을 돌려 노인을 떠났다. 뭐가 되었든, 그가 입만 다물어준다면 아무 상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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