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집무실 중앙에 선 다이한은 이제는 완전히 허리가 굽은 노인이 되어버린 의원을 내려다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단 5년 사이에 의원은 거동도 힘든 늙은이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황국의 개들에게 그 가벼운 입을 놀렸는가?”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리했겠습니까.”
의원은 이제 완연하게 어른이 되어버린, 앳된 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다이한을 고개 들어 마주 봤다. 세월 앞에 무력하게도, 언제 마중 올지 모르는 죽음을 이미 받아들인 노인은 이제 다이한이 두렵지 않았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과 시리도록 차가운 연녹색 눈을 가진 사내를 가만 보던 의원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의원은 허리춤의 검을 꽉 잡아 쥐고 있는 다이한의 오른손을 빤히 바라봤다. 후작이 지금 당장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놀랍지는 않았다. 황국에서 찾아온 기사들이 후작 부인의 병세에 대해 캐물었을 때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왕비의 편이 분명한 황국 기사들이, 후작 부인의 흠을 찾으려는 게 분명했다. 다만, 그는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죽음 뒤에 찾아올 심판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뒤늦게나마 신을 믿는 신자였다.
“신을 섬기는 늙은이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만, 입을 다물 수는 있습니다.”
의원은 다이한의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후작은 굳이 검을 뽑을 필요도 없이 언제든 맨손으로라도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남자였다. 의원은 손등에 핏줄이 돋은 그의 손을 세심하게 훑었다. 그리고, 다이한의 손톱 뿌리 부분이 퍼렇게 물든 것을 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주 옅어서 주의 깊게 보지 못하면 눈치채지 못할 증세였다.
“네 말마따나 너는.”
다이한은 일순 커지는 의원의 눈을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지.”
마치 의원에게 일러주듯 말을 한 다이한은 그대로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명줄 다한 노인을 굳이 이 자리에서 죽일 필요는 없었다.
의원은 무어라 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가 이내 닫았다. 어쭙잖은 충고 따위 업보 앞에서는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
지젤이 백작을 만나고 온 다음 날, 왕비는 귀족 몇몇을 불러다 연회를 열었다. 사실 이름만 연회지 그냥 소박한 저녁 식사나 다름없었지만 왕비는 뭔가 거창해 보이고 싶었는지 20명도 안 되는 인원을 왕실 연회장에 모았다.
바르한 자작은 왜 안 보이지? 지젤이 연회장 안의 분위기를 빠르게 훑었다. 익숙한 얼굴들을 보며 몇몇에게 눈인사를 한 지젤은 테이블 중앙에 앉은 황태자가 한쪽 눈을 찡그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 발견했다. 지젤은 그의 시선에 얼굴이 따갑다는 생각을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쩐지 다이한과 팔짱을 끼고 있는 게 껄끄러워졌다.
다이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지정된 자리에 지젤이 앉자마자, 제일 중앙 상석에 앉아있던 황태자가 기다렸다는 입을 열었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그러고 보니 원체 하얀 지젤의 피부가 더 새하얗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이안이 짧게 혀를 차고는 눈만 깜빡이는 지젤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그걸 보며 다이한이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안이 그런 후작 들으라는 듯 입을 열었다.
“후작이 그대를 굶기는 건가? 안색이 왜 이리 안 좋아.”
감히? 이안이 이를 아득 물며 하는 말에, 제인은 그런 주군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 눈을 감아버렸다. 후작 부인이 딱 하루 왕궁에 오지 않았다고 하루 종일 패악질을 부리는 탓에 이미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사람 많은 자리에서는 적당히 하시라고 만류할 수가 없었다.
지젤은 걱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태자를 보면서, 차분히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정말 멀쩡하답니다. 과분하게도 저하께서 이리 걱정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격식 있고 정중한 감사 인사에 이안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쪽에는 선을 긋고 다이한과 나란히 앉아있는 걸 보니,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아, 그냥 죽여버리고 싶다. 이안은 당장에 다이한의 목을 따고 배를 가르고 싶은 잔혹한 충동을 억지로 삼켜내며 지젤을 살폈다.
“무리하지 말고.”
지젤은 다이한이 작게 속삭이는 말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적당히 앉아있다가 피곤하다고 사라질 생각이었다. 왕비가 만든 자리를 오래 빛낼 생각은 없었다. 보통 후작 부부 내외가 떠나고 나면 다른 귀족들도 슬그머니 귀가하고는 했다.
이안은 그 겉보기에 다정해 보이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충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걸 느끼면서도 그는 움직였다. 이안은 시종이 들고 있던 와인병을 빼앗듯 쥐고는 지젤의 뒤에 섰다.
“오늘 와인이 달아.”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붙어 선 이안이 지젤의 앞에 자리한 투명한 와인 잔을 채웠다. 검붉은 술이 투명한 유리잔을 채우는 걸 보면서, 지젤은 입 안의 혀를 짓씹었다. 너무 닮았어. 방심하고 앉아 있었는데, 황태자가 이쪽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걸 보니 가슴께가 아파왔다.
“우리 후작 부인께서도 맛보셨으면 해서.”
살며시 지젤의 어깨에 손을 얹은 이안이 부드럽게 속삭이는 걸 보면서, 다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지젤 앞의 와인 잔을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드르륵-. 이안은 유리잔이 테이블에 끌리는 소리가, 자신의 신경이 긁히는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저하, 송구스럽지만.”
이안과 다이한의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다이한은 옷 밑에 붕대가 감겨있는 아직도 아릿한 어깨 통증을 상기시키며 말을 이었다.
“제 아내는 와인을 마시지 못해서 말입니다.”
다이한의 말에 지젤은 조용히 그의 말을 이었다.
“예, 저하. 죄송스럽게도 제가 원래도 술을 못하지만. 와인만 마시면 특히 더 힘들어서요. 괜찮으시다면, 베풀어주신 술. 제 남편이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지젤이 양해를 구하는 말에 이안은 조용히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내었다. 지젤은 체온이 멀어지는 걸 느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게 이리도 아쉬울 일인가. 지젤은 본인이 이상하다는 걸 인지했지만, 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이안은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사실, 별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갑자기 자신이 불청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알 길이 없었다. 지젤과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본 적도, 같이 술을 마셔본 적도 없어서 지젤이 그걸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혀 몰랐네.”
이안이 쓰게 웃으며 하는 말에 지젤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도 다들 제 역할을 하며 연회는 이어졌다.
“대체 뭐람.”
황태자가 원래도 변덕이 심한 사람인가, 저번과는 다르게 오늘은 왕비 쪽은 신경도 안 쓰고 후작 부인만 보고 있으니. 공작 부인 리안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깊게 한숨을 쉬었다. 능력 없는 남편 덕분에 줄을 잘 타야 하는 이쪽은 정말 피곤했다.
***
다이한이 왕비의 부름으로 연회장 한편에 불려 나가자, 지젤은 슬그머니 테라스로 향했다. 묘하게 진이 빠져서 잠시, 숨을 쉴 공간이 필요했다. 황태자의 호위기사인 제인 경이 이쪽을 너무 빤히 쳐다보는 것도 묘하게 부담스러웠다. 왜 저럴까. 너무 집요해서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테라스 커튼 뒤로 몸을 숨긴 지젤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뒤돌아섰다 그대로 굳어 섰다.
“추울 텐데.”
테라스 한쪽에 기대선 이안이 지젤을 보며 반사적으로 걱정부터 내뱉었다. 지젤은 대답 없이 그를 훑었다. 희고 굵은 손가락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금으로 장식된 우드 파이프가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담배를 피우는구나. 냄새가 안 나서 전혀 몰랐는데. 지젤이 놀란 표정을 애써 숨기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안은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연회장이 시끄러워지면 와서 종종 쉬는 곳이라, 저하께서 먼저 자리하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제가-”
“나는 몰랐어.”
방해해서 죄송하다고 자리를 뜨려던 지젤은 황태자의 뜬금없는 고백에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이안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희뿌연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가 담배 연기를 내뱉는 무거운 바람 소리가 지젤의 귀를 사로잡았다.
“네?”
“와인을 싫어하는 줄 몰랐다고.”
아까, 다이한이 와인 잔을 빼앗아간 걸 마음에 두고 있나? 지젤은 잠깐 그 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의미를 모르겠는데.
“저도 저하께서, 담배를 즐겨 피우시는지 몰랐는걸요.”
저희가 만난 지 얼마 안 되기도 하였고, 애초에 서로의 기호를 알 만큼 가까워질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니까요.
“서로 모를 수밖에 없는 그런. 당연한 일이죠.”
선을 긋는 그녀의 말에, 이안은 파이프를 다시 입에 물었다. 파이프가 입술 사이에 닿는 그 짧은 순간 내보여진 붉은 혀를 보고 나서야, 지젤은 그를 너무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래서는 안 돼. 지젤이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아 그곳을 떠나려는 순간, 이안이 눈썹을 까딱였다.
“또?”
“예?”
“싫어하는 게 또 뭐가 있냐고.”
“그게, 왜 궁금하세요.”
지젤의 꽤나 공격적인 질문에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지젤에게로 다가섰다. 그가 파이프를 테이블 한편에 내려두고 오는 것을 보며 지젤은 몸을 움찔 떨었다. 여기서, 도망가면 더 쫓아오고 싶어 하지 않을까. 사냥개들이 보통 그런다던데. 지젤은 그 자리에 서서 숨죽이고, 눈앞에 당도한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각오는 했는데.”
충분히 마음먹었다 생각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는 지젤에게 퍽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까 그건 좀 속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