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29)화 (29/135)

29.

“요즘 황국에서 유행하는 원단이랍니다. 은은한 광택이 돌아서 입고 있는 사람을 돋보이게 해준답니다. 황국 수도에서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워낙 귀한 소재라, 정말 딱 하나만 만든 드레스입니다.”

의상실의 주인이 검은색 드레스를 들고 심드렁한 표정의 지젤을 향해 열심히 떠들었다.

“어떻게 다들 아셨는지, 구매하고 싶다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난처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지젤 님을 위해 꼭 숨겨놓고 가지고 있었답니다. 어떠세요?”

후작 부인의 씀씀이는 다른 귀부인들과 견줄 바가 아니었다. 후작은 후작 부인이 마음에 들어 하는 물건에 돈 쓰기를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수도의 모든 장사치들은 후작 부인의 눈에 들고 싶어 했다. 후작 부인이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 하는 날에도, 후작가의 집사는 그녀가 집었던 물건들을 결제해 가고는 했다. 아마 왕국 유일 후작의 체면을 지키려는 거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돈만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근데, 검은색이라.”

푹신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지젤이 고민된다는 듯 드레스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자 그 뒤에 서있던 하녀가 끼어들었다.

“지젤 님께서는 피부가 하얗다 보니,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입어라도 보심이 어떠실까요?”

그 말을 들은 지젤이 흘끔 의상실 안쪽 탈의실을 곁눈질했다. 그러고는 마치 설득이라도 당한 것처럼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앙카, 네가 또 보는 눈이 있지.”

의상실의 주인이 비앙카라 불린 붉은 머리 단발 소녀를 슬쩍 보고 입을 삐죽였다. 후작 부인이 아끼는 어린애라더니, 매번 의상실까지 데려오고는 했다. 기껏해야 스무 살이나 되었을 법한 고양의 상의 여자아이는 선이 굵고 인상이 날카로웠다. 허름하지는 않지만, 세련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은 헐렁한 갈색 일상복이 평범했다.

“비앙카, 옷시중 좀 들어주렴.”

“네, 지젤 님.”

자리에서 일어선 지젤이 하는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한 비앙카가 드레스를 받아 들고 안쪽 탈의실로 향했다. 의상실 주인은 찰나에 본 비앙카라는 여자애 손에 가득한 굳은살을 보고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끼는 아이라 데리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험한 일을 시키는 건가?

***

“황태자와 척을 지지는 마십쇼. 아픈 왕비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온 것 같지만, 대놓고 적이 될 필요는 없어요.”

탈의실 안쪽, 벽을 보고 선 달리아 백작이 조용하게 하는 말에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황태자는 곧 돌아갈 테니, 크게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아요.”

비앙카가 그런 지젤이 드레스를 벗는 걸 도왔다. 비앙카는 작지만 굳은살과 생채기가 많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등의 단추를 풀어냈다. 지젤의 새하얀 피부에 딱 감겨 떨어지던 파란색 드레스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잠깐 침묵을 유지하던 백작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조지 콜튼이 수도 여기저기를 드나들고 있더군요. 왕자의 대모를 할 다른 사람을 물색하는 것 같던데.”

왕과 왕비가 골골거리는 판국에, 형식적으로나마 왕자의 보호자가 된다는 건 꽤 매력적인 일이었다. 왕권이야 황국의 허락 없이는 쉽게 휘두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것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다들 내 눈치를 보느라 쉽게 나서지 못할 테니까요.”

정확하게는 후작의 눈치를 보는 거겠지만. 지젤이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비앙카가 든 검은 드레스 소매에 팔을 집어넣었다. 창문이 없어 어둑어둑한 탈의실에서도 은은하게 광택이 도는 검은 원단이 그녀의 가는 팔을 감쌌다.

“후작이 권력에서 밀리는 걸, 바보처럼 보고만 있을 사람도 아니고 말입니다.”

지젤의 냉소적인 말에 달리아 백작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몇 년 사이 더 대담해진 지젤이 걱정되었지만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둘은 가족의 형태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지젤이 그의 손녀라는 걸 증명해 줄 마부를 찾지 못한 그가 지젤의 허무맹랑한 말을 믿고, 여기까지 온 것도 결국 이것 외에는 타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궁 의원의 말이, 올해를 못 넘길 거라고 하니 알고 계세요.”

주어 없는 말에, 검은 드레스를 다 입은 지젤이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도도하게만 굴던 왕비가 절박하게 바둥거리는 꼴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안식의 곁으로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고요하게 분노를 곱씹고 있는 후작 부인을 보면서 비앙카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로, 그녀의 구겨진 치마 끝부분을 정돈했다. 지젤이 그런 얼굴을 이쪽에 보여주기 싫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젤은 그런 비앙카의 작은 머리를 내려다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분노를 함부로 내보이면, 그건 약점이 된다.

“알겠으니, 한동안은 움직이지 마세요. 황태자가 저를 좀 귀찮게 해서, 저도 한동안은 쉽게 못 움직일 것 같아요.”

지젤이 무릎 꿇고 있는 비앙카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쥐었다. 그러자, 비앙카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창고 뒤쪽으로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는 걸 아는 백작이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을 주저하다가, 기어코 입을 열었다.

“많이-, 어리지 않습니까.”

그는 무표정하게 자신을 보고 있을 지젤을 너무 잘 알았지만, 그래도 만류하고자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왕자는.”

지젤은 계속해서 주절거리는 백작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제는 완전히 하얗게 세버린 머리색과 작아진 키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나 그렇듯 세월을 피해 가지 못한 백작은 5년 전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적당히 마무리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시간이 공평하기는 한가 봅니다.”

비앙카는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지젤의 푸른 눈을 보고 작게 입을 벌렸다. 그녀는 명백하게 백작을 비웃고 있었다.

“백작님께서도 나이가 드시니, 이리 감성적으로 구시네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백작이 깊게 한숨을 쉬며 지젤의 말을 부정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지젤은 작게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연민은-, 그런 측은지심과 동정도 말입니다.”

지난 5년 동안 조금이나마 납득해보려고 곱씹고, 각자의 입장이 달랐다 생각해보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용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명확한 이유를 찾고자 했던 것인데도 그녀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 한순간에 모든 걸 잃어야 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적선도.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사람은, 베풀 수가 없는 것이에요.”

응어리 맺힌 감정이 담긴 지젤의 말에 백작은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감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젤은 그런 그를 소리 없이 바라보다가 화제를 바꿨다.

“황태자가 황국에서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봐주세요.”

왕비와 얼마나 친하길래, 돌아갈 기약도 없이 여기 머무는 것인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지젤은 무어라 더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다물었다. 혹시나 하는, 말도 안 되는 허튼 희망이 죽은 미하엘과 황태자가 너무 닮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부추겼다. 말 그대로 헛된 희망인 걸 너무 잘 아는 지젤은 처연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어쩌면 이제 미하엘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흔한 초상화 하나가 없었고,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들은 바가 없었다.

황국 국경 끝에 본가가 있으며, 누나가 하나 있다고 들었었다. 누나 이름이 굉장히 예뻤던 것 같은데,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기억은 언제나 왜곡되었고, 지젤은 자신의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았다.

비앙카는 지젤이 서글프게 웃는 걸 무표정한 얼굴로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건, 아까와는 다르게 비앙카가 보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

“요즘 들어 더 잠을 깊게 못 주무시는 것 같아요.”

지젤의 붉은 머리카락을 빗질하던 미아가 걱정스러운 듯 말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녀리고, 예민한 그녀의 후작 부인은 사소한 일에도 잘 놀라고 후작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었다.

“또 시작이니? 날씨가 더워서 그러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미아는 지젤이 조금만 피곤해해도 유난을 떨었다. 지젤이 옅게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작님을 습격한 괴한을 잡지 못해서 신경 쓰이시는 거죠?”

그럴수록, 잘 주무시고 잘 챙겨 드셔야 해요.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진 미아가 잔소리를 늘어놓자, 그 뒤에 선 비앙카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미아가 그런 비앙카를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금방 잡을 겁니다. 왕궁에서도 수도 내 경비를 더 강화하겠다고 했다면서요. 지젤 님께서는 아무런 걱정하지 마시고, 그저 푹 쉬세요.”

“그래.”

지젤이 웃으며 그러겠노라 답했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후작이 누구에게 원한을 사서 그런 습격을 받았는지 고민해야 했으며, 왕궁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왕비가 갑자기 어느 날 죽어버리는 악몽까지 꾸고는 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젤 님, 좀 주무시겠어요?”

여태 가만히 침묵을 유지하던 비앙카가 피로한 듯 눈을 감고 있는 지젤에게 묻자 지젤은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잠이나 자고 있을 수는 없었다.

“비앙카, 너는 주방에 가서 내일 쓸 찻잎이나 살피는 게 어떠니?”

멍하니 거기 서있지 말고. 이제는 저택에서 한 가닥 하는 미아는 비앙카를 탐탁지 않아 하는 걸 숨기지 않았다. 지젤과 후작이 아침마다 서재에서 마시는 찻잎은 매일 비앙카가 말리고 관리했다. 비앙카는 군말 없이 침실을 나섰고, 미아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는 미간을 구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안 드는 아이였다. 저택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지젤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것도 싫었고, 지젤이 그런 비앙카를 은근하게 끼고도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미아는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앉아있는 지젤을 보며 다정하게 손을 움직였다. 이 저택에서 지젤이 유일하게 마음 주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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