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28)화 (28/135)

28.

“다니엘 부인!”

정원에서 양산을 들고 선 지젤은 조나단이 자신을 부르는 걸 들으며,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지젤의 웃음은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했다. 친절했고, 다정해 보였다. 왕자는 이쪽을 잠깐 보다가 다시 시종과의 공놀이에 집중했다. 문득, 이엘리야와 함께 잔디밭에서 뒹굴며 놀던 시간들이 떠올라서 그녀는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괜찮아. 얼마 안 남았으니.

왕자 옆에 서있던 황태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면서, 지젤은 작게 한숨 쉬었다. 벌써 피곤해. 와중에 젊은 시종 중에 한 명이 눈치를 보다가 슬쩍 지젤의 손에 작은 종이를 쥐여줬다.

“백작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의상실, 오후 4시.]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종이를 잠깐 내려다보고 있던 지젤은 이내 그걸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잉크의 쓴맛과 종이 특유의 냄새가 그녀의 입 안을 메웠다. 백작과 만나기로 한 날은 내일이었다. 황태자가 뭐라 하든, 내일은 시내 의상실로 가야 했다.

지젤은 자연스럽게 기침을 하며,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종이 뭉치를 손수건에 뱉어냈다. 그리는 연신 잔기침을 하며 방금 그녀에게 쪽지를 줬던 시종에게 그걸 내어줬다.

“내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으니, 그것 좀 태워버려 주겠어요? 혹여나 왕자님 옮으실까 무섭네요.”

“지젤 님, 의원을 부를까요?”

지젤이 부러 기침을 계속하며 인상을 찌푸리자, 후작가의 호위 기사 중 하나가 그녀에게 물었다.

“저녁에도 나아지지 않으면 저택으로 가서 진찰을 받을게요.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

그 말에 기사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지젤은 기침을 삼켜내듯 입을 가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대로 저택으로 돌아가서 진찰받은 뒤 아프다고 하면, 내일 왕궁에 오지 않는 게 자연스럽겠지. 왕자에게 옮길 수는 없으니까.

“어디가 아프다고?”

성큼성큼 다가오던 황태자가 방금 말을 들었는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던 지젤의 손목을 휙- 낚아챘다. 굳은살이 가득한 커다란 손에 잡힌 손목이 살짝 아려왔다.

“저하.”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많이 아픈가?”

지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치고 지나가는 걸 알면서도, 이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프다니, 어디가 또? 빌어먹을 후작 새끼가 분풀이로 괴롭힌 거 아니야?

“저는- 괜찮습니다. 놓아주세요.”

그녀는 황태자가 걱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걸 보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진짜 미친놈인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안 괜찮아 보이니 하는 말이지.”

이안이 짧게 혀를 차고는 제인에게 휘적휘적 손짓했다. 잠깐 짜증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던 제인은 이내 무표정을 되찾고 다른 사람 손을 빌려 의자를 준비했다. 그 순간까지도 손목을 놓지 않은 황태자는 지젤을 의자에 앉히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줬다. 그러면서도 이안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실크 장갑의 감촉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저하, 이렇게 함부로 만지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슬쩍 시종들과 기사들을 보며 하는 말에 이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대답 없이 그녀의 옆 의자에 거칠게 소리 내 앉았다. 그러고는, 마치 심술이 가득 난 아이처럼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지젤은 그런 그를 보면서 한마디 더 하려다가 그만뒀다. 황태자가 언제 또 변덕 부릴지도 모르고, 지금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 이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했다.

“점심은?”

그러나, 황태자가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고 태연하게 묻는 말에 지젤은 미간을 구기고 대답 대신 참았던 말을 쏟아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저하께서 이러시는 게 무섭고 부담스럽습니다.”

지젤이 다시금 선을 긋고자 하는 말에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얄미운 말만 조잘거리는 지젤이 미웠지만 그걸 표출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머리카락은 계속 기르는 건가?”

허리를 넘어섰는데. 이안이 커다란 오른손으로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 끝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물었다.

“너무 길면, 번거롭지 않은가?”

“제가 방금 드린 말씀 들으셨습니까?”

“아니, 그대가 하고 싶은 말만 하니.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했는데.”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어린애도 아니고. 지젤이 정말 이상한 사람 보듯이 그를 훑어보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과거를 상기시켜 보면 익숙한 대우였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기로 했다.

“사소한 부탁 하나 할게.”

난데없는 말에 지젤이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프면.”

지젤은 황태자의 손가락이 자신의 뺨에 닿는 걸 보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검지로 툭 눈가를 스치듯 매만지다가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놀림이 익숙했다.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그 손놀림이 너무 익숙한 것이라 지젤은 숨을 멈췄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지젤이 푸른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자, 이안이 옅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말만 해줘.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의 지젤에게는 그보다 어려운 일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너무 아팠다. 미하엘과 닮은 얼굴이 조금 비슷하게 행동한다고, 마음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미친년처럼, 황태자한테 당신 미하엘 아니냐고 물을 것 같았다.

“왕자 공놀이도 곧 끝날 때가 된 것 같으니, 안에 들어가서 차나 마시지.”

이안은 방금 자신이 손에 쥐었던 지젤의 손목에 가득하다던 상흔이 떠올라서 주먹을 꽉 쥐었다. 5년 동안 방관했던 주제에, 아픈 걸 알려달라 욕심부리는 자신의 이중성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기에 그는 조나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이것 봐, 너무 예뻐.”

후원에 앉아 찻잔을 들었던 지젤은 조나단이 양손으로 꽉 새를 잡고 있는 게 껄끄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카나리아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한 어린아이 손에 잡혀 바등거리고 있었다.

삑-! 삑-! 삐이익!

새된 소리가 유난히 귓가에 크게 울렸다. 그녀는 왕자에게 싫은 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 그저 그걸 외면하기만 했다.

“예쁘지?”

기어코 지젤의 코앞까지 그걸 들이미는 조나단의 말간 얼굴을 보며 그녀는 차마 예쁘다 하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닫았다. 노래를 듣고 싶어서 잡아 왔으면, 그냥 새장에 넣어놓기라도 해. 왜 아프게 하는 거야? 아무리 무지한 어린아이라지만, 그렇게 하면 아플 거라고 생각조차 안 하는 거야? 하고 싶은 말들이 목 밑까지 차올랐지만 지젤은 그걸 삼켜냈다.

과민반응 하지 마. 그녀가 스스로를 다독이며 차를 입에 머금었다.

이안이 그런 지젤과 조나단을 가만히 보다가 제인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제인이 깊게 한숨을 쉬며 조나단의 앞을 가로막았다.

“왕자님, 새는 새장에 넣어두시고 저랑 후원이나 한 바퀴 도실까요?”

평소라면 너무 예쁘다며 박수 쳐 줄 후작 부인이 아무 반응도 없었기에, 한 번 더 카나리아를 자랑하려던 조나단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든 놀아주면 즐거웠다.

이안은 왕자가 제인 경의 손을 잡고 사라지는 걸 보면서, 지젤의 표정을 흘끔 살폈다. 옅게 미소 짓고 있는 표정 아래 숨겨진 불쾌함을 눈치챈 이안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본인의 실수에 대해 반성하는데, 지젤이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을 깨버렸다.

“곧 결혼도 앞두셨는데, 언제 돌아가시나요?”

저번에도 한 번 들었던 질문에 이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빨리 꺼지길 바라는 듯한 질문인 걸 너무 잘 알아서 더 속이 뒤집어졌다.

“내 약혼은.”

그가 잇새로 겨우 한마디 내뱉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마땅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황제가 되려면 해야 하는 결혼이라고, 말하면 믿어나 줄까. 지금 그저 옆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불신 가득한 표정인데. 사실 황제고 뭐고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너만 다시 돌아오면 좋겠다고 얘기하면 정말 제정신 아닌 놈 취급하겠지. 이안은 그 많은 문장들을 다 축약해서 딱 한마디 내뱉었다.

“의미 없어.”

그걸 들은 지젤이 푸른 눈을 토끼처럼 크게 뜨고는, 뭔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하, 외람되지만 그것참. 전형적인 바람둥이 대사 아닌가 싶습니다.”

내 결혼 생활은 의미 없어. 내 부인과의 관계는 의미 없어. 가련하고 애절한 사랑꾼 흉내 내기 딱 좋은 말이었다. 지젤의 말에 이안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인상을 팍 구겼다.

“전형적인 대사?”

“여러 책임과 의무를 가볍게 뒤로할 수 있는 마법의 문장 아닌가요. 감정적 죄책감도 덜 수 있고 말입니다.”

나긋한 말투와는 다르게 신랄하게 비꼬는 지젤을 보며, 이안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아주, 날 파렴치하게 보나 본데?”

지젤은 욕을 먹고도 이쪽을 보며 웃는 황태자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미간을 구겼다.

“저하, 곧 결혼 앞두신 분이 유부녀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구시면, 구설수에 오르실 겁니다.”

“어떤 구설수.”

“설명하기도 민망할 구설수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설명하기도 민망하다?”

이안이 등받이에 기대며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는 지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뭘 하기에 민망할까.”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검은 눈이, 웃음기를 담고 휘는 걸 보자 지젤은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수작을 부리는 황태자를 비웃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미하엘이 겹치고 떠올라서 지젤은 찻잔을 든 손을 바르르 떨었다.

“응?”

이안이 놀리듯 그녀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지젤은 의식적으로 황태자를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속이 메슥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울렁거렸다. 정색을 하고 반응을 하면 안 되는데,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이렇게 바보같이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굳어버리다니.

지젤이 그 이상 답하지 않자, 이안도 그녀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다만 집요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