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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27)화 (27/135)

27.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 이안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다이한을 향해 살풋 웃어 보이며 양해를 구했다.

“내가 그쪽으로 덕목이 많이 부족하니, 후작께서 너그럽게 이해하셔야겠는데?”

“저하의 도덕성이 결여된 것을 제가 왜 이해해야 합니까?”

다이한이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것을 이안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받아쳤다.

“그 이유야 후작, 본인께서 가장 잘 아시겠지.”

다이한은 거만하게 이쪽을 내려다보는 황태자를 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마찬가지로, 이안 또한 이쪽을 매섭게 노려보는 다이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사실 오기 전에는 좀 헷갈렸거든.”

대체 뭐가 좋다고, 굳이 내 발로 또 찾아가서 비참해지려고 하는 걸까. 이제 와 화를 내고 싶은 걸까. 사과받고 싶은 걸까. 나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근데 막상 와보니 단숨에 명확해졌지 뭔가.”

이안이 천천히 의미 모를 말들을 풀어내자, 다이한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때 정확하게 그 평민 새끼가 맞는지 확인하고 죽였어야 하는 건데, 왜 황태자가 평민인 척하고 지젤의 옆에 붙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는 늦은 일이었다.

그녀는 후작 부인이었고, 둘의 사이는 결혼 초와는 달랐다. 그래, 지젤은 이제 그의 옆에 있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다이한이 자신의 불안을 애써 잠재우려 하는데, 이안이 태연하게 그에게 기름을 들이부었다.

“더 일찍 오지 않은 것이 사무치게 후회될 정도로.”

“하.”

다이한이 기가 막힌다는 듯 거친 숨을 내뱉자, 이안은 와인 잔을 들고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이안은 눈앞의 후작 새끼를 당장 죽여버리고 싶었다. 지젤을 억지로 데려가서는, 그 좋아하는 노래도 못 하게 만들어? 그렇게 아프게 해? 제까짓 게 뭐라고-.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지만, 기묘한 신경전을 눈치챈 자작과 공작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조용하고도 빠르게 와인을 소진하는 데 집중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불똥 튀면 곤란한 건 약자들이었다.

***

덜그럭거리는 마차 안에서 다이한은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지젤을 신경 쓰느라 그깟 평민 머리색만 듣고 치워버린 게 실수였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그런 일 처리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생각이 다른 쪽에 쏠려서는-. 그는 비겁하게 와중에도 지젤 탓을 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황태자가 왜 그런 평민 놀이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요즘에야 자리 잡았다지만 별것도 아닌 사교계 놀이나 하는 어린애일 뿐이었다. 적어도 이 왕국에서는 그러했다. 무슨 심술을 부리려고 여길 다시 왔는지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결혼을 앞둔 황태자가 후작 부인을 상대로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지젤이 이제 와 황태자를 따라갈 리 없었다.

“황국으로 갈 리가 없지.”

다이한은 불안한 본인의 심정을 애써 잠재우며 거칠어진 숨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

“으악!”

다이한이 평온을 가장하기 위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는 동시에 마부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그의 시야가 뒤집혔다. 정확하게는 중심을 잃은 마차가 그대로 뒤집어지며 공중에 붕 떴다. 다이한이 뭔가 하기도 전에 전복된 마차는 땅에 처박혔다.

찌그러진 마차 문 사이로, 화살에 맞은 채 길에 나뒹구는 마부의 시체가 보였다. 다이한이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며 허리춤에 있는 검을 빼 들었다. 어그러진 마차 문이 열리지 않아, 두어 번 거칠게 발로 차내고 나서야 그는 문을 열 수 있었다.

바닥에 부딪힌 왼 어깨가 으스러진 것 같았다. 그가 고통 섞인 숨을 토해내며 마차에서 기어 나왔다. 이마 어디도 찢어졌는지 뜨거운 선혈이 주륵 흘러내려 그의 얼굴을 더럽혔다. 마차 뒤쪽에서 후작가의 기사들이 난데없이 나타난 괴한들과 검을 맞대며 싸우고 있는 걸 확인한 다이한이 완전히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행복한 저택으로 향하는 즐거운 귀가 시간을, 내가 방해했나?”

다이한은 바로 앞에서 자신의 턱에 날카로운 검 끝을 가져다 대고 있는 황태자를 보고 기가 막히다는 듯 웃음을 토해냈다. 피에 젖은 그의 금발이 달빛에 반짝였다. 그 앞에 선 이안의 검은 눈도 분노로 들끓어 이채가 번득였다.

“이럴 거면 아까 자작가에서 죽이지 그러셨습니까.”

“난 널 지금 죽일 생각이 없어.”

말과는 다르게 이안이 검에 힘을 줘서, 다이한의 목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아직은 아니야.”

이안이 경멸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다이한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사실 그는 지금 당장 이 후작 놈의 사지를 찢어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편안한 죽음은 그저 안식일 뿐이었다.

“너도 네 나약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무력감과 비참함에 잠 못 이뤄봐야 하지 않겠어?”

적어도 그래야 공평하지 않을까. 다이한은 이안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지젤이 곁에 있으면 그녀를 망쳐낸 후회가 그의 숨통을 쥐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내 아내인데 뭘 어찌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럼에도, 그는 지젤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생에 있어 유일한 안식이었으므로. 다이한의 녹색 눈이 이안과 마찬가지로 광기에 번득였다. 어차피 황태자는 지금 지젤이 기억을 잃은 채로 자신의 곁에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는 버림받은 전 애인으로 남을 것이었다.

“미련 못 버리고 이제 와 질척거리는 게 추합니다.”

그걸 보면서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반대로 꺾었다. 당장 저 눈을 파내버리고 싶었다. 이 비열한 새끼의 피눈물을 보고 나면, 기분이 좀 괜찮아질 것 같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잘나신 남편께서.”

이안의 호흡이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로 거칠어졌다.

“그 어여쁜 애를 감히 죽음으로 내몰고.”

자살? 그가 아는 그의 지젤은 그런 단어를 입에 담지도 않을 사람이었다. 그렇게, 예쁘고 반짝이고 강인한 사람이 죽음으로 도망치려 했다면. 그 과정을 상상하기조차 힘들어서, 이안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물리적 타살만이 살인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숨통 트던 노래조차 못하게 만들어?”

지금, 그가 더 화가 나는 이유는 지젤이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못 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름만 있는 황태자, 전쟁 영웅인 후작 하나 꺾어내지 못해서. 아니, 또 버림받을까 무서워서 자존심에 같이 맨몸으로 도망치자 애원하러 오지도 않았다는 게 후회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억지로 한 결혼이라면서, 그렇게 행복해하노라는 전언을 듣고 나니 배신당했다 분노해서 5년 동안. 그 긴 시간인 5년 동안 한 번을 그녀를 확인하러 오지 않았던 것이-.

“내가 아니었으면 지젤은 죽었을 겁니다.”

다이한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이안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뒤에서 복면을 쓰고 있던 제인은 이안의 손에 힘이 들어간 걸 보며 몸을 움찔 떨었다. 저러다 진짜 죽이면 곤란했다. 아니, 얼굴 봤으니 그냥 죽이는 게 맞나.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지젤은 죽었다고.”

다이한이 당장 목숨을 위협받는 사람치고는 태연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뱉어냈다. 그러자, 이안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검을 내린 뒤 조용히 한 발 물러섰다. 그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놈이 아직도 잘못을 모르고 입을 함부로 놀려.”

“지젤은 다니엘 후작 부인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겁니다.”

후작이 아니었으면 진작 죽었을 거라는 그 말에 이안은 혐오를 숨길 수 없었다.

“그 상황을 네 좋을 대로 이용해서, 취하고 싶은 대로 취해 놓고.”

이안은 격앙돼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말을 이었다.

“휘두르고 싶은 대로 휘둘러 욕심을 채우고는. 그럴듯하게 지어내는 걸 보니 역겨워.”

다이한은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나려는 이안에게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하께서 저와 같은 상황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합니까?”

다이한의 그 질문에, 이안은 조용히 비소를 머금고 고개를 뒤로 돌려 답했다.

“내가 감히?”

제인은 원하는 대로 후작을 헤집어놓고 떠나는 이안의 뒤를 따르며 슬쩍 다이한의 표정을 확인했다. 방금까지 어딘지 딱딱하고 무덤덤하기만 했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진 걸 확인한 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그 여자는 무슨 매력이 있는 거야?

제인은 관심 가지지 말라는 황녀의 경고를 슬그머니 넘길 정도로, 진지하게 지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세상에! 다이한 님!”

“후작님! 의원을-”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던 지젤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 밤중에 저택을 다 훤하게 밝히기라도 하는 건지, 침실 문 밑 틈으로 밝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침대에서 벗어나 땅에 발을 디딘 동시에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지젤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후작님?”

그녀의 침실에 성큼 걸어 들어온 다이한이 대답도 없이 침대에 걸터앉은 지젤을 품에 안았다. 언뜻 봐도 상태가 이상했다. 훅- 하니 코를 감싸는 피비린내와 흙냄새에 지젤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자신을 감싸 안고 있는 후작의 상태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를 손바닥으로 힘줘 밀어냈다.

“잠깐-. 어디 다치신 건가요?”

그러나 우악스럽게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다이한은 지젤의 힘에 밀리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피부와 옷에 묻은 흙이 불쾌했다. 아니, 피인가? 역겨움을 참아낸 지젤이 깊게 한숨을 쉬며 차분하게 그를 다시 불렀다.

“후작님.”

“가만히.”

다이한의 탁한 목소리를 들으며 지젤은 고개를 올렸다가 그대로 굳어 들었다. 그의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붉은 핏방울이 그녀의 이마를 적셨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 밤중에 무슨 사고라도 있었던가? 자작가를 갔던 게 아니었나?

“후작님,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지젤이 손을 뻗어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그의 얼굴을 매만지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아릿하게 통증이 퍼진 얼굴에 닿는 손가락이 그를 안심시켰다.

“의원이 오기 전까지만. 그 잠시만 이렇게 있을 테니.”

다이한이 뒷말을 잊지 못하고 삼켜냈다. 지젤은 이상하게 구는 다이한의 요구대로 그렇게 숨죽이고 안겨만 있었다. 그녀는 그의 상처가 걱정되지 않았기에, 그렇게 조용히 한참을 석상처럼 그의 품에 안겨 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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