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26)화 (26/135)

26.

정원 한쪽 나무 그늘에 황태자와 나란히 자리 잡고 앉은 지젤은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단둘이 앉아있게 될 줄 몰랐는데. 시종과 공놀이를 하고 있는 조나단을 보며 지젤이 입을 열었다.

“저하, 언제 황국으로 돌아가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지젤의 옆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그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왜?”

미하엘을 닮은 얼굴을 보는 게 불편해서, 네가 나한테 적대적인 게 거슬려서. 네가 오래 있을수록 다들 다시 왕비 눈치를 볼 테니까. 계산적인 속마음을 꿀꺽 삼켜낸 지젤이 살풋 웃어 보였다.

“일정이 어떻게 되시는가 싶어서 여쭸습니다.”

“그대는.”

지젤은 황태자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해 미간을 살짝 구겼다. 뭐가? 그러자, 이안이 친절하고도 다정하게 말을 덧붙였다.

“왕자를 보러 왕궁으로 매일 오는 건가?”

“다른 귀부인들과 번갈아 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왕비님께서 몸이 좋지 못하셔서 하루 종일 누워계셔야 하니까요.”

“오늘부터는 매일 오도록 해.”

난데없는 명령에 지젤은 바보같이 되묻지 않았다. 대신, 이유를 따져 물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경계심이 가득한 푸른 눈을 보며,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어릴 적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그 얼굴과 너무 비슷했다.

‘넌 뭔데 맨날 숨어서 내 노래를 훔쳐 들어? 계속 들을 거면 돈 줘.’

거기까지 회상한 이안이 작게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도 미친놈 같다 느껴져서 터진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저하?”

“내가 여기 있을 거니까.”

황태자는 왕국의 손님이었으므로, 그가 왕궁에 있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그게 내가 매일 입궁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고?

“그러니 매일 입궁해서 얼굴 보여줘.”

이안은 의아함을 가득 담고 있는 지젤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새삼 귀엽다고 느껴져 손을 뻗으려다 참아냈다. 짜증스럽게도, 아직 안 되는 일이었다.

“저하께서 왕궁에 계시니, 제가 매일 와야 한다는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왕자를 보러 오는 거고.”

지젤은 황태자의 눈이 웃음을 가득 담고 초승달 모양으로 휘는 걸 보며 손을 움찔 떨었다. 어제 봤던 냉하기만 했던 얼굴이 거짓된 기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웃는 얼굴이 해맑았다.

“후작 부인이 내 얼굴 보려면 명분이 필요하니까.”

그가 감미롭게 속삭이는 말에 지젤은 몸을 움츠렸다.

“왜 명분까지 만들어서 제가 저하를 만나 봬야 하는지 여쭤도 됩니까?”

“내가 보고 싶어서.”

황태자가 내뱉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못해 달콤했다. 뭐지? 왜? 손바닥 뒤집듯 갑자기 변한 황태자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제까지는 이쪽을 깎아내리려 하더니, 오늘은 왜? 단둘이 있어서? 황태자는 기본적으로 포악하고, 잔인하다 들었지만 이런 변덕쟁이라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답을 모르는 일은 솔직하게 해결하는 편이 가장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걸 아는 그녀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어제는 저에게 화를 내시고, 오늘은 이리도 다정하시니.”

이안이 이쪽을 집요하게 보는 게 부담스러웠던 지젤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지젤이 시선을 내리깔자, 그녀의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그걸 보며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내일은 어떠실까 두렵기까지 합니다.”

묘하게 비난 섞인 어조에 이안이 작게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놈 같겠지.

“그렇구나.”

고개를 들어 황태자의 웃는 얼굴을 올려다본 지젤의 미간이 구겨졌다. 환하게 빛이 날 것처럼 예쁘게 웃고 있는 지금의 황태자는,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사람 같았다. 냉담했던 어제의 얼굴과 비교돼서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그렇게 웃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젤은 황태자의 보조개가 푹 파이는 걸 보며, 입 안의 혀를 깨물었다. 미하엘도 보조개가 참 예쁘게 접혔는데.

“우리.”

대놓고 얼굴을 구긴 채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지젤을 확인한 이안은 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진짜 정신 나간 놈 같겠네. 한 번 더 소리 내 웃은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일도 보는구나 싶어서.”

지젤의 얼굴이 오묘해지는 걸 보면서, 이안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와중에도 얼굴이 은은하게나마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표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는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저하.”

지젤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가 경청하려는 듯 그녀의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고개를 까딱였다.

“기분 나쁘게 듣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애인 만들기가 공공연한 사교계에서 이런 일을 처음 겪은 건 아니었지만. 황태자가 후작 부인을 상대로 이럴 줄은 몰랐던 터라 지젤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결혼 전 가벼운 일탈을 함께 할 상대를 찾으신다면, 잘못 고르셨습니다.”

그녀의 말에 미하엘이 지젤을 향해 기울였던 몸을 똑바로 세우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지젤이 그런 그를 보며 쓰게 웃었다. 겨우 그 정도 가까워졌다고, 익숙한 향수 냄새가 그녀의 마음을 헤집었다. 나랑 엮이지 않았더라면, 미하엘도 저렇게 매력적인 청년으로 남았을 텐데. 불쌍한 나의 미하엘.

“제가 보기보다 일편단심이랍니다.”

지젤이 살포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농담조를 섞어 하는 말에 이안이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턱이 움찔거릴 정도로 이를 악문 그가 무언가를 꾹 참아내듯 주먹을 쥐며 입을 열었다.

“어쩌지.”

이안은 눈앞의 지젤이 내뱉은 말의 뜻을 곱씹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에게 일러줬다.

“나야말로 모자라 보일 정도로 일편단심인 사람인데.”

답지 않게 분노를 삼켜내려던 이안은 이내, 곧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후작을 향한 마음이 무려 일편단심?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지젤을 향한 자신의 애증을 완벽히 숨길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그대 얼굴 보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궁금한 게 아니라면, 하라는 대로 매일 입궁해.”

낮은 목소리로 경고 아닌 경고를 하는 황태자를 보며 지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게 그대와 내 신상에 좋을 테니.”

이제 마무리가 코앞인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

바르한 자작이 무역 사업의 투자를 더 받아내기 위해, 어렵게 만든 저녁 식사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기껏 황태자와 후작까지 한자리에 모였지만, 와인 따르는 소리 외에는 조용했다. 자작은 귀부인들을 빼놓고 자리를 만든 것을 깊이 후회했다.

황태자와 후작이 마주 앉은 채로 서로를 가만히 보기만 할 뿐, 그 어떤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일 나이가 많은 공작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일단 적당히 웃으며 황태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하, 언제까지 머무실 예정이십니까? 저희 공작저에 아주 좋은 와인이 한 병 들어와 감히 선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잃어버린 게 있어서, 그것만 찾으면 바로 돌아갈 생각이네.”

이안이 질문을 한 공작이 아닌 다이한 후작을 보며 눈썹을 까딱였다. 다이한은 입을 다문 채로 그런 황태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로를 향한 매서운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잃어버리셨다니요? 무엇을 말입니까? 제가 찾아드리겠습니다.”

자작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말을 꺼내자, 이안이 오른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댄 황태자는 지극히도 오만해 보였다.

“도둑맞았다고 표현해야 하나?”

이안이 다이한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자, 가운데 앉아있던 공작은 미간을 구겼다. 분위기가 기묘했다. 다이한이 자신을 향해 이죽거리는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황궁의 기사단이 제 영지에 드나들며, 늙은 의원을 괴롭힌다 들었습니다.”

“저런, 제인 경.”

이안이 무척 안타깝다는 듯 그의 뒤에 거리를 둔 채 서있던 제인을 부르자, 그녀가 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기사들 관리에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렇다는군.”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이안의 태도에 다이한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무표정하지만 누가 봐도 분노를 참고 있는 듯 보여서 이안은 작게 실소했다. 동시에 자작은 심기가 가라앉아 보이는 다이한이 좋아할 만한 화제를 빠르게 꺼내 들었다.

“후작님, 저도 비법 좀 가르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다이한은 그런 자작을 물끄러미 보면서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자작이 그런 다이한을 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아내가 후작 부인께서는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신다며, 비교된다고 하루 종일 한숨만 쉬지 뭡니까. 어쩌면 그렇게 날이 갈수록 미인이 되시는지 비결 좀 가르쳐 주십쇼. 저도 매번 뵐 때마다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 새끼 봐라. 이안이 자작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부터 시끄럽게 떠들기만 하는 게, 썩은 눈으로 누굴 보고 감탄을 해? 안타깝게도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자작이 계속 말을 주절거렸다.

“후작님께서는 정말로 복 받으셨습니다. 후작 부인께서는 수도에서 손꼽을 정도로 미인이신 데다가, 현명하시기까지 하시니 말입니다.”

제 사업의 진가를 알아보실 정도로 말이죠. 속이 훤히 보이는 자작의 발언에 공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한 후작은 후작 부인 이야기가 나오면, 안 그러는 듯하면서도 물러졌다.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떠다닐 자작의 허술한 사업에 거금을 투자한 것도, 지젤과 자작가의 친분 때문인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모두들 지젤과 잘 지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다이한의 굳은 표정이 풀리지 않고 있었기에 공작이 자작을 만류했다.

“로엘 자작. 후작 부인께서 미인이신 걸 우리 모두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 과한 관심은 오해를 살 수 있지 않은가.”

“아이고, 제가 그럴 의도가 아니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자작이 황태자까지 얼굴을 굳히고 있는 걸 그제야 발견하고 다급하게 변명했다.

“후작 부인을 상대로 감히 그런-. 저희 모두 그 정도 도덕성은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

자작의 비루한 변명에 이안이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우스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크게 웃는 황태자를 보며, 모두들 눈만 끔뻑거렸다. 다이한은 그런 이안을 보며 오른 주먹을 꽉 쥐어냈다.

“도덕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