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25)화 (25/135)

25.

“후작 부인이 결혼식 당일부터 자살 시도를 했다는 얘기들은, 정말 단순한 소문이라 여겨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

제인이 변명하듯 말을 하며, 무표정하게 창가에 기대서 있는 이안의 얼굴을 살폈다.

젠장, 왕비라는 여자가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주절주절해대서는. 이쪽 일만 늘어나게 생겼네.

‘제인, 무슨 일이 있어도 이안은 조용하고 빠르게 황국으로 돌아와야 해. 말을 전한다는 핑계로 별 볼 일 없는 왕국에 가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엘레노어의 그 당부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차라리 한 대 맞으면 맞았지, 쓸데없이 유부녀 과거나 캐는 치졸한 짓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저하, 송구스럽게도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5년 전 후작저에 있던 사용인들은 대부분 사고나 병으로 죽거나, 고향으로 돌아갔고. 두어 명 남았으나 후작 내외의 측근으로 금화 몇 개에 말을 흘릴 자들이 아닙니다.”

“진찰했다던 의원은?”

“의원도 알아봤지만, 후작이 무서운지 입을 쉽게 열지 않습니다. 찾아가서 추궁해봤지만, 부정도 긍정도 없이 후작 내외에 관해서는 말해줄 수 없다고만 합니다.”

이안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허튼 소문이라고, 후작 부인은 기억을 잃지 않았다고 말해야 더 자연스럽지 않나.

“말해줄 수 없다고?”

“이안 님, 왕비께서 하시는 얘기들은 그저 미움에서 우러나오는 말들 아니겠습니까?”

마가렛이 심보가 충분히 못돼 먹은 사람임을 기억해낸 제인이 덧붙였다. 그러나, 이안은 제인이 열과 성의를 다해 주절거리는 걸 하나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럼, 5년 동안 날 찾지 않은 게 말이 되지.”

“예?”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안을 만류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제발 그냥 황국 가자고.

“애초에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너무 긍정적인 판단 아닌가. 어딘지 기뻐 보이기까지 하는 황태자의 얼굴을 본 제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삐죽였다. 평민이라 했고, 이름도 가명을 썼다며? 갑자기 난데없이 황태자가 돼서 나타날 거라 생각 못 하고 있는 거 아니고?

“저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안은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날 잊은 거야. 날 아예 잊어서, 모르는 거야. 그 긴 시간을 한 번도 날 찾지 않을 리가 없지.

“넌 황국으로 가서 시간이나 벌어둬.”

이안이 작게 웃음까지 터트리며 하는 말에 제인은 아연해졌다. 미친놈이 왜 웃는 건데?

“지금 저 혼자 황국으로 귀환하라 하셨습니까?”

“다시 부르기 전까지 오지 마.”

죽어도 안 됩니다. 저 혼자 가면 황녀님이 절 죽이실 텐데. 제인은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이 별 볼 일 없는 나라에서 뭐 하시게요? 저하, 지금 정말 즉위가 코 앞인데-”

제인이 이안의 앞으로 성큼 걸어가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이안이 제인의 어깨를 꽉 잡아 쥐자 그녀가 몸을 비틀었다. 자비 없이 폭력적인 손힘과 다르게, 정말 기뻐 보이기는 표정으로. 아니 어떤 희열에 사로잡힌 얼굴로 그가 제인에게 말했다.

“지젤이 나를 안다면,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정말 미친 것 같은 그 발언에, 제인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속마음을 전부 꺼내지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외람되지만, 드디어 마약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유부녀를 상대로 대체 무슨 자신감이십니까? 아니, 저하의 결혼식이 당장 올해 가을 끝 무렵인데요?”

제인의 말을 가볍게 흘려들은 이안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렇게 사랑해줬고, 사랑했는데 그럴 수가 없지.

“날 찾지 않은 게 아니라, 찾지 못한 거고. 후작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날 알지 못할 뿐이야.”

“그게 무슨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세요? 저하, 지금 괜찮으신 거 맞아요? 이안 님, 이게 몇 개로 보이세요?”

제인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며 그의 앞에 흔드는데도 이안은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차마 납득하지 못했던 지젤의 변심을 순식간에 납득할 수 있었다.

출생에 관하여 후작에게 협박받았다는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걸 함께 해결할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고 쌩하니 후작의 손을 잡은 게.

“도무지 저하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대체 무슨-.”

“협박을 핑계로 죄책감을 덜어낸 배신이라 생각했는데. 잘못된 선택의 후회조차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정말 그냥 버림받았다 생각했는데.”

그는 원망과 증오 속에서도 계속 기다렸었다. 결혼식 이후라도 지젤이 후회하고 용서를 빌며 함께 도망가자고 다시 돌아오기를.

“근데, 날 잊었으니 돌아올 수가 없었던 거지.”

제인은 황태자가 하고 있는 생각의 흐름을 쫓을 수가 없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미친 황태자와 다르게 그녀는 온전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기에,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기억을 잃은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저 소문이면 어찌하시려고요?”

“의원이 부정도 긍정도 못 하는 걸 어떻게 설명할 건데.”

솔직히 그건 뭐. 아, 그래 솔직하게 미심쩍은 상황은 맞았다. 이리저리 살펴볼수록 충분히 이상했고, 의심이 가는 상황은 맞다. 그렇지만 유부녀를 뭐? 제인은 빠르게 말을 바꿨다.

“뭐, 그렇다 치고요. 기억을 잃었다면, 더욱. 더욱 저하께서 여기 계시면 안 되지 말입니다? 아예 저하를 모르는 사람인데요?”

“날 알면, 지젤은 나를 가장 사랑할 수밖에.”

“네?”

당신같이 툭하면 사람 목을 비트는 잔인한 사람을.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는 데다가, 성격이 더럽게 까칠해서 즉위하자마자 폭군이 될지도 모른다 수군거리는 사람을 후작 부인이 왜?

“기억 못하더라도 지젤은 다시 나를 사랑하게 될 테니까.”

제인이 혼란스러워 허덕이는 와중에 이안이 화사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제인은 정녕 미친 사람같이 환하게 웃어 보이는 황태자를 보고 눈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황태자가 저렇게 웃는 걸 처음 봐서 공포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하, 애초에 이러려고 오신 거죠. 그럴듯한 명분들은 말 그대로 핑계일 뿐이었던 거죠?”

처음부터, 후작 부인 다시 꼬셔내러 온 게 아니냐고 묻는 제인의 말에 이안은 답하지 않았다. 긍정 어린 그 침묵에 제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제정신 아닌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녀는 일이 점점 더 진창으로 굴러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며, 그저 입을 다물었다.

***

서재에 앉은 다이한은 여느 때처럼 답신을 쓸 중요한 서신 몇 개를 골라내다가, 책 넘기는 소리가 멈췄다는 걸 눈치챘다. 그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건너편 의자에 기대 잠든 지젤을 바라봤다. 단정하게 어깨 뒤로 넘기고 있던 붉은 곱슬머리가 그녀의 왼쪽 얼굴을 가릴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다. 지젤이 손에 쥐고 있던 책이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무릎에 걸쳐져 있는 걸 보고,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조심스럽고도, 소리 없이 움직여 꽤 깊게 잠든 것 같은 지젤의 앞에 섰다. 가끔 나비의 날갯짓처럼 보이는 그녀의 긴 속눈썹이 이제 떠오르기 시작하는 햇빛에 반짝였다. 부드럽게 감기는 뺨의 감촉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감히 쉽게 손대지 않았다.

“후작님, 콜튼 경이 뵙기를 청합니다.”

집사가 어딘지 난처한 듯 눈치를 보며 열린 문틈으로 들어서는데, 다이한이 집사를 향해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방해하지 말라는 그 뜻을 눈치챈 집사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동시에, 다이한은 지젤의 무릎 위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양장 책을 손쉽게 빼냈다.

지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기는 했지만,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의 평안을 지켜주고 싶었다. 이기적이게도 그는 지금처럼 자신의 곁에서, 그녀가 평온하길 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럴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알아.”

내 잘못이라는 걸. 그가 명확한 주어도 없이 깊게 잠든 지젤을 향해 비겁하게 고백했다. 다이한이 드물게 쓰게 웃어 보이며,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줬다. 투박한 손에 우러나오는 부드러운 손짓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다이한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닫았다. 그의 무거운 심정은 피곤에 지쳐 잠든 지젤에게 닿지 않았다.

***

“다니엘 부인!”

지젤은 자신을 향해 쪼르르 달려오는 왕자를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나 눈을 빛내며 뛰는지, 도토리를 주우러 나무에서 뛰어내려 오는 다람쥐 같았다. 화원에서 혼자 시간을 때우고 있었나? 지젤이 자연스럽게 양손을 내밀며 왕자를 끌어안아 줬다.

“왜 그렇게 급하게 뛰어오세요?”

지젤의 드레스에 폭 감긴 조나단은 신이 난 걸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왕자의 붉게 상기된 볼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지젤은 미소 지었다. 어린 왕자의 호감을 사는 법은 어렵지 않다. 유세 높은 귀족가 출신답게 왕비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아들을 크게 예뻐라 하는 법이 없었다. 왕비가 지체 높은 귀부인들에게 당당하게 보모 역할을 요구하며 본인의 권세를 표현하려 하는 멍청이인 덕분에 더 쉬웠다.

관심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에게 시간을 많이 내서 옆에 있어주고 항상 좋은 말을 해주니 그녀는 좋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왕자가 좋아하는 걸 다 손에 쥐여주고, 다 왕자님이 옳다고 속삭여주면 그녀는 쉽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나 선물 받았어! 봐!”

저거! 조나단이 손짓하자, 시종이 작은 새장을 내밀었다. 지젤은 금색 새장에 갇힌 하얀 카나리아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새? 주먹보다도 작은 새를 보던 그녀는 시종에게 눈짓했다. 제대로 돌보지도 못할 텐데, 누가 새를 선물한 거야?

그러자, 금발의 시종이 조용히 눈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 시선이 자신의 뒤를 향한다는 걸 알아챈 지젤이 몸을 돌렸다.

“요즘 황국 귀족들 사이에서는 유행이라기에.”

지젤은 자신의 바로 뒤에 선 황태자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미하엘을 닮은 그 잘생긴 얼굴도 3일 연속 보니, 덜 놀라웠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검은빛이 도는 푸른색 원단으로 만들어진 정복 때문인지, 아니면 바로 코앞에 서 있기 때문인지 황태자의 키가 어제보다 커 보였다. 자연스럽게 이쪽을 내려다보는 황태자의 시선에 지젤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반듯하게 쓸어 넘긴 검은 머리가 그의 인상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저하께서 여기 계신 줄 몰랐습니다.”

“난 후작 부인이 여기 있는 줄 알고 왔는데.”

지젤은 이안의 입가에 은은하게 퍼져있는 미소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왜 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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