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24)화 (24/135)

24.

“뭐든 물어라?”

지젤은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이죽거린다는 걸 눈치챌 수가 있었다. 방금 뭔가 실수했나? 왜 갑자기 또 저렇게 대놓고 화를 내는 거지? 그러면 안 되는데, 미하엘이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 같아서. 지젤은 애꿎은 혀를 씹어 눌렀다.

“후작 부부 사이가 워낙 다정하다 하니. 비결이 뭔가 싶어서 밤잠을 못 이루겠던데. 좀 가르쳐주지?”

지젤은 이를 악물고 있는 이안의 검은 눈에 자신이 거울처럼 비쳐 보인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능숙하게 입을 열었다.

“다들 저희 사이가 좋다고 하시지만 과장된 소문입니다. 저는 저희 부부가 평범하다 생각하는지라, 저하께 만족스러운 답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대는 후작이 뭐가 그렇게 좋은가. 재력? 권력?”

리안나는 지젤의 입가에서 미소가 조금씩 사라지는 걸 보며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뭔지 모르지만, 황태자는 누가 봐도 지젤에게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지젤 님과 다이한 님의 사이가 워낙 좋다 보니, 저하께서도 결혼 앞두시고 궁금하신가 봅니다. 부부가 사이좋은 비결이 뭐가 있을까요. 그저 둘이 마음이 맞-”

“내 그대에게 묻지 않았는데.”

이안이 리안나의 말을 차갑게 잘라내고 지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귀족들이 이리저리 저울질해보고 결혼하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그냥 묻는 건데 불편한가?”

본인이 속물이라는 걸 인정하는 게?

그는 지젤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는 걸 보며 수긍했다. 어차피 미움받고 있는데, 저 정도가 무서울 리가. 그는 비겁하게도 본인이 아픈 만큼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데도.

사실, 뭐든 그녀의 심정에서 흘러나오는 솔직한 말이라도 듣길 원했다. 제대로 된 실망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는 계속 자신의 행동에 이유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이한 님이 후작님이 아니셨다면 글쎄요. 결혼을 안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아, 곧 결혼하실 저하를 두고 제가 너무 솔직했나요? 아직 로맨틱하실 때인데-.”

지젤이 유쾌하게 웃어 보이며 하는 말에 스텔라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공감했다.

“솔직히, 저도 우리 자작님 작위 못 받았으면 결혼 안 했습니다. 뭐 볼 게 있어서요?”

“나야말로, 우리 백작님 이렇게 대머리 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도망갔죠.”

귀부인들이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한마디씩 거드는데, 이안은 웃지 못했다. 마가렛 왕비는 그런 이안을 가만히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희극에 나오는 것처럼 절절하게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지만, 제게 과분하게도 제일 나은 선택이었던 거죠.”

지젤이 이안에게 설명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미하엘과 닮은 이 남자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껄끄러워 도망치고 싶었다. 무례하다 한마디 하면서 나가버리고 싶은데, 황태자니까 그럴 수도 없고.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으면, 후작이랑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안이 지젤의 말을 정리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를 평민이라 생각했으니, 나는 그런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는 욕을 하지 않기 위해 입 안의 살을 짓씹어야 했다.

그럼 지금은? 나는 곧 황제가 될 사람인데. 이제는 내가 눈에 차? 지금은 내가 더 나은 선택지 아닌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그게 네 기준이라면. 그럼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황태자니까, 나랑도 함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안이 그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지젤이 차분하게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그랬겠지만. 그렇지만 같은-. 이미 지나간 일에 만약에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해봤자 소용없는 짓이죠.”

지젤이 어딘지 멍하니 생각에 잠긴 이안을 보며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다시 돌이킬 수 없고, 현재는 과거가 쌓여 만들어졌으며, 미래는 지금을 기반으로 완성된다.

지젤은 황태자의 옆에 앉은 마가렛을 힐끔 보며 더 화사하게 웃으며 눈을 휘어 보였다. 네가 지금 겪는 일은, 앞으로 겪을 일은 네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네.

“후작 부인의 속내가 이런데, 서로 너무나 사랑하는 화목한 부부라 불리다니.”

이안이 연신 웃고 있는 지젤의 하얀 목을 죄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말을 이었다. 원망과 분노를 기반한 순간적인 충동을 억지로 삼켜낸 그는 대신 모난 말을 뱉어냈다. 뻔뻔하게 날 모르는 척하는 것까지.

“참으로 가증스럽네.”

공작 부인인 리안나는 이 상황이 짜증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애써서 웃고, 분위기를 풀어봤자 황태자가 저렇게 한마디씩 매섭게 쏘아붙이면 물거품이었다. 왕비 편을 들어주려고 온 건가. 그래서 지젤에게 적대적으로 군다고? 왜? 후작은 충분히 황국의 사람인데, 후작 부인을? 정세가 바뀌었나?

싸한 공기가 무겁게 바닥에 깔렸지만, 지젤은 옅게나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가렛이 그런 사람들을 쭉 훑어보다가 피식 웃으며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몸이 좋지 못해 이만 가봐야겠군. 저하, 좀 부축해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이안이 마가렛을 부축해 일어서는 걸 보며, 지젤을 천천히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냈다. 황태자가 온 목적이 이쪽을 위축시키고 황가에서 내놓은 것처럼 보였던 왕비를 추켜세워주기 위함이라면 곤란했다.

***

복도를 거닐던 마가렛은 이쪽은 신경도 안 쓰고 생각에 잠긴 채로 걸음을 옮기는 이안을 보고 입을 열었다.

“후작 부인에게 관심이 좀 과하십니다?”

“그딴 쓸데없는 소리를 할 기력이 있으면, 힘을 좀 비축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안색을 보아하니,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데.”

이안이 쏘아붙이자 마가렛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이안과 엘레노어, 그러니까 황태자 남매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남에게 관심은커녕 말 섞는 것조차 까칠하게 구는 사람들인데.

엘레노어에게 호되게 당했던 과거들을 떠올린 마가렛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안이 지젤에게 보이는 행동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단순히 심술을 부린다기에는 기묘했다. 어찌 되었든, 이쪽에는 잘된 일이니 마가렛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긴. 저하께서 뭐 틀린 말씀을 하셨다고, 아까 눈가를 파르르 떨면서도 웃으려 하는 꼴이 기가 막히더군요. 정말 제정신 아닌 여자인 게 한눈에 보인다니까요.”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이안이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마가렛을 내려다봤다. 이 욕심만 많은 종자는, 여기서도 비슷하게 사는지 위태로워 보였다. 이안은 엘레노어가 마가렛을 비웃던 걸 떠올리고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하여튼, 그 여자 목소리도 징그럽지 않았나요? 말하는 거 듣기 싫어 죽겠습니다.”

어떻게든 헐뜯으려는 마가렛의 말에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대체 왜 그런지 물었어야 하는 건데 이쪽 감정이 앞서서는. 본인이 유치하고도 치졸하며 비겁하게 느껴져서 그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가족들 다 죽고 큰 병을 앓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도 아니면서 가련한 척 동정과 관심 사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어요.”

“그게 아니면.”

대꾸는 해줬지만 이안은 마가렛의 얘기에 크게 귀 기울일 생각이 없었다. 제인을 움직여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된 건지, 그럼 이제 노래를 못 부르는 건지. 직접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들 지젤이 원래 그 목소리를 가진 사람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으니 일시적인 건 아닐 터였다.

“자살하려고 먹은 약 때문에 목소리가 기괴해진 겁니다. 후작이 본인 체면 챙기느라 쉬쉬하지만, 후작저에 제 사람들이 있었기에 저는 진상을 알죠.”

그녀의 말에 이안이 그대로 숨을 멈췄다.

“왜?”

“하, 정말 몇 번을 죽으려 했다던지. 후작이 아주 애썼습니다. 그러니, 저하의 말씀처럼 가증스러운 계집이죠. 그런 주제에 왕자의 대모를 하겠는다는-”

마가렛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마가렛을 향해 물었다.

“지젤이 자살하려 했다는 게 무슨 소리야.”

마가렛은 이안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지젤의 끔찍함에 질색하는 표정이라 착각해서 말을 이었다. 황태자가 관심을 가진다는 것에 놀란 그녀는 황태자가 후작 부인을 이름으로 부르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예, 아주 정신이 나간 년이라니까요. 손목을 하도 그어대서 한여름에도 장갑을 못 벗습니다. 근데 우리 왕자를-. 기가 막힌다니까.”

“내가 그걸 왜 몰랐지?”

이안이 자신의 뒤에서 멀찍이 따라오다 굳은 제인 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제인이 이안의 희번덕이는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후작이 숨겨서 몰랐던 거지, 뭐 어쩌라고. 그녀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짜증을 애써 갈무리해야 했다.

“이안 님, 절 좀 도와주셔야 합니다. 이 왕궁에 제대로 된 제 사람이 없어요. 그 계집이 제가 죽으면 왕자를 어찌할지 몰라요. 이제 겨우 여덟 살 된 아이인데-. 왕자가 어려서 후작 부인을 잘 따르지만, 그건 뭘 몰라서 그런 겁니다.”

그의 반응을 어떻게 착각한 건지 마가렛이 애절하게 이안의 손을 부여잡았다. 이안이 그런 마가렛을 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그 계집이 기억을 잃은 척하고 후작을 속이고 있지만, 그게 아닙니다. 저는 알아요. 그 년이 속으로 칼을 갈아대며 후작과 제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저하, 절 좀 도와주세요.”

“죽으려 하고, 기억을 잃어?”

“예! 후작이 쉬쉬하고 있지만, 전 압니다. 연기하는 거예요. 정말 기억을 못 한다면 나를 이렇게 궁지에 몰 리가 없어요. 이건, 저하. 제 얘기를 길게 들어보시면 충분히.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마가렛이 무언가 설명하려 했지만 이안은 그녀의 손을 내치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젤이 기억을 못 한다는 게. 어디서 어디까지 기억을 못 한다는 건데. 그가 드물게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몇 번을 죽으려고 했다고? 잘 사는 게 아니었다고. 그는 후작가에 보냈던 시종들에게 전해 들었던 단란한 부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안 님, 어쩌면 저한테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몰라요.”

얄팍한 동정심에라도 호소하기 위해 마가렛이 이안의 손을 다시 잡아보려 했지만, 이안이 몸을 휙 뒤로 빼내고는 등을 돌렸다.

“제인.”

많은 의미가 담긴 황태자의 부름에 제인은 이를 악물었다.

“저하, 부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알아내야 할 게 많지만, 병자가 생각나는 대로 주절거리는 말을 오래 들어줄 의향은 없었다. 이안은 애처롭게 자신을 부르는 마가렛을 무시하고 제인에게 눈짓했다. 제인은 깊게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랐다. 일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머리 아프게 흘러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