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왕비가 도착했다는 시종의 말에 지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왕비가 날 싫어하니, 잘 모르겠다며 쓰게 웃어야 했는데. 그래야, 누구든 모두가 후작 부인이 대모가 되시는 걸 당연히 여긴다 소리를 했을 텐데.
지젤은 다들 흘끔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에 조용히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겉치레라도 예의는 지켜야 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오래 앉아있기도 힘들어하는 왕비가 늦게라도 다과회에 오는 게 발악이라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정원이 아닌, 여기들 있었나?”
왕비의 안색은 허옇다 못해 푸르고, 메마른 몸이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본인의 고귀함을 잃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지 화장을 하고 화려한 장신구를 빼놓지 않았다. 왕비가 이를 악물고 자신을 향해 고개 숙이고 있는 귀부인들을 훑어보다가 지젤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장소를 바꿨다면, 말이라도 할 것이지.”
“그게, 후작 부인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하여 오늘만 후원으로 옮겼습니다. 미리 말씀 못 드려 송구합니다.”
스텔라가 슬쩍 눈치를 살피며 왕비에게 사과했다. 지젤을 우선순위로 하고 있는 게 다분히 느껴지는 문장에 왕비가 이를 악물었다. 지젤은 고개를 들어 적당히 사과하고 자리에 앉으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몸을 굳혔다. 왕비 뒤에 선 황태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기절까지 하시더니, 오늘도 안색이 그리 좋지는 못해 보이는군.”
이안이 싸늘한 검은 눈으로 지젤을 훑어 내리며 말했다. 그는 눈앞의 붉은 머리 여자가 너무나 미웠다. 얼굴을 보고 비웃어주리라 다짐했는데, 고급스러운 남색 드레스를 입고 서있는 지젤이 그냥 미워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 앞에 선 지젤은 이쪽을 짜증스럽다 못해 분노한 얼굴로 보고 있는 황태자를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건 미하엘이 아니고, 황태자야.
오늘 이렇게 다시 보니, 다른 사람이라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냉하다 못해 따가운 시선과 오만한 표정이 그가 아는 미하엘이 아니었다. 지젤은 5년 동안 갈고닦은 인위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정중하게 그에게 사과했다.
“저하, 어제는 제가 흉한 모습 보여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이안이 그대로 숨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치고 지나갔다가 이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더위를 심하게 먹었는지, 그만 보여드려서는 안 되는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저하께서도 많이 놀라셨다는 걸 듣고는 죄송스러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낮게 갈라진 새된 소리가 무언가 찢어진 듯한 음색이었다. 지젤은 말 없는 이안이 분노했다 생각해, 차분하게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왕국에 처음 오셨다 들었는데, 유쾌하지 못한 경험 하시게 해드린 점 정말 송구합니다. 부디 저하의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길.”
그 정중하고도 예의 바른 사과를 듣고만 있던 이안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가 이내 다물렸다. 모두들 황태자가 후작 부인의 사과를 받아들이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안은 그대로 고개를 기울인 채 지젤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지젤이 드문드문 갈라지다 못해 새된 바람 소리처럼 들리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걸,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머무시는 동안 편히 계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젤이 재차 그에게 말하고 나서야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가 기묘한 표정으로 시종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그는 그제야 지젤이 요 몇 년 동안 병증에 괴로워한다는 왕비와 견줄 정도로 말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값비싼 드레스와 화사한 웃음이 가득한 얼굴 밑에 숨겨진 수척함. 괴리감을 느낀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
왕비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어지러운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연신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요즘 이쪽을 밀어내려는 달리아 백작은 그녀의 병이 전염병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내고 있었으나, 상관없었다. 그런 소문 따위 바람결에 흩날리듯 금세 사라질 게 뻔했다. 그렇지만 불안감을 전부 숨기지는 못하는 듯 왕비는 연신,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지젤 님께서 추천해주신 하녀가 일을 어찌나 잘하는지-. 제가 지젤 님께 보답이라도 해드리고 싶을 정도랍니다.”
기묘한 표정을 하고 있는 황태자의 안색을 살핀 스텔라가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가벼운 대화 주제를 꺼냈다. 지젤이 그런 스텔라는 보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루나 말이죠? 눈치도 빠르고, 똑똑해서 정말 아끼는 아이인데. 급하게 사람이 필요하시다니 내어드리는 수밖에 없었지 뭐예요.”
“저희도 지젤 님이 보내주신 하인이 너무 우직하게 일을 잘해서 집사가 아주 흡족해하더라구요. 어쩜 지젤 님은 사람 보는 눈도 그렇게 좋으신지.”
그 가벼운 이야기의 중심조차도 망할 후작 부인이었다. 아들 원하는 가문에 딸로 태어나 쓸모없는 취급 받던 게 겹쳐와 왕비, 마가렛은 이를 악물었다. 황국의 귀족가도 아닌, 겨우 이런 작은 소국의 늙은 왕과 결혼하고도 견뎌냈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설령, 이게 고칠 수 없는 병이라 얼마 못 가 죽는다 해도. 이제 겨우 여덟 살인 왕자가 저 가증스러운 후작 부인의 손에 들어가는 꼴은 죽어서도 볼 수가 없었다.
“저하께서는 정확히 언제까지 계실 생각이십니까?”
마가렛은 생전 얼굴 볼 일 없었던 자신의 사촌, 이안 황태자를 보며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조용히 앉아만 있던 이안에게로 쏠렸다. 황태자는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린 지젤의 눈을 마주 보며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고 답을 하지 않았다.
“곧 즉위식에, 결혼식까지 앞두고 계시다 들었으니. 오래는 못 계시겠지만 그래도 저하께서 편히 쉬다 가셨으면 좋겠네요. 가을 사냥대회가 가장 큰 행사이긴 하지만 조금 후에 일이고, 원하시는 만큼 연회를 열어드릴 테니 제게 편히 말을 해주세요.”
어찌 되었든, 마가렛은 이안이 이곳에 온 걸 기회라 여겼다. 왕비인 자신의 뒤에 황국이 굳건하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후작이 몇 개월 만에 지젤에게 질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으니 이쪽이 황가의 피가 섞인 사람이라는 걸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안이 오래 머물수록, 친밀히 지낼수록 사람들은 다시 자신을 두려워하게 될 터였다.
“예, 저하.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저희에게 말씀해주세요. 큰일 앞두시고 휴식이 필요해 오신 거라면, 왕궁에서 조금만 말을 타고 가도 한적하게 쉬실 만한 곳이 많습니다.”
지젤이 친절하게 하는 말을 들으며 리안나는 조용히 눈썹을 들어 올렸다. 황태자가 후작 부인을 너무 빤히 보기만 하는 게 이상한데. 어제 일로 화가 많이 났나?
“큰일들을 한 번에 하시려니, 저하께서 정신이 없으시겠습니다. 황국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조용히 쉬시기에 저희 왕국만 한 곳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리안나가 지젤의 말을 거드는 것에도 황태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었고, 적막이 길어졌다. 평소 같으면 시끄럽게 떠들 귀부인들이 황태자의 눈치만 보자, 마가렛이 대화를 주도하기 위해 재빠르게 말을 꺼냈다.
“저하의 약혼녀인 헬렌이 그렇게 미인으로 자랐다면서요? 어릴 때 보고, 몇 년 동안 보지 못했지만 얼마나 미인이 되었을지 짐작이 가네요.”
리안나도 적당히 황태자를 추켜세우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자기 약혼녀 칭찬은 기분이 나쁠 수가 없는 주제니까.
“황국 모두가 감히 저하를 부러워한다고 저도 들었습니다. 어찌나 잘 어울리시는지, 두 분이 서있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 하는 화가들이 줄을 선다고 말이죠.”
“그 품격과 우아함을 견줄 사람이 없다고 저도 들었답니다. 두 분의 미모에 모두가 감탄을 한다면서요?”
“세상에, 저하께서도 이렇게 출중하신데 미래의 황후 되실 분도 그리 아름다우시다니. 완벽한 한 쌍이네요.”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드는 그 활기찬 테이블에서 이안이 굳게 다물렸던 입을 열었다.
“후작 부인도 들었나?”
왕비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지젤에게 쏠렸다. 지젤은 갑자기 자신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는 황태자를 보고 얼떨떨하게 웃어 보였다. 뭘? 당신 약혼자 이야기를? 이 대륙 모두가 아는 그 얘기를 모를 리가 있나.
“예, 저도 풍문으로나마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라니?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 일단 입을 다문 지젤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당기며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 부던히 애썼다. 보면 볼수록, 얼굴이 역시 너무 닮았다. 사랑스러운 미하엘이 계속 생각나서 그녀는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안은 본인도 이걸 왜 묻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목소리에 대해 물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입 밖에서 나온 말은 다른 말이었다. 그래, 그래서? 내가 결혼이 코앞이라는데. 내가 결혼한다는데 너는.
그는 제인 경이 자신을 이성을 잃은 사람 취급하던 걸 떠올리면서도 지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름다우신 두 분이 함께 하실 결혼식이 얼마나 화려할지. 저는 당사자도 아닌데 주책맞게 정말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숨을 토해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내 결혼을 기대해? 저따위 말들을 들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다. 그래,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근데 막상 귀로 듣고 나니 누군가 그의 얼굴을 바닥에 내리꽂은 것 같았다. 맞아, 5년이나 지났지. 알아, 아는데.
그가 다리를 꼬고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운 채로 방금까지 지젤을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매서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물어나 볼까.”
“뭐든, 편하게 말씀하시면 답하겠습니다.”
“뭐든?”
이안의 입매가 그의 심기만큼이나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