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22)화 (22/135)

22.

지젤이 기절함과 동시에, 샴페인 잔이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귀부인 중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자 모두의 시선이 쓰러진 지젤에게로 쏠렸다. 멀찍한 곳에 있던 다이한이 한걸음에 달려와 바닥에 쓰러진 지젤을 품에 안고 그녀를 살폈다.

“지젤, 정신 차려.”

다이한이 입술을 바들바들 떤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지젤의 뺨을 그러쥐며 고개를 저었다. 놀란 그의 안색도 지젤만큼이나 새하얗게 질렸다.

반사적으로 지젤을 붙들기 위해 손을 뻗었던 황태자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덧없이 허공을 휘저었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스스로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토해냈다.

“부인께서 몸이 많이 약하신가.”

내용과 다르게 걱정은커녕 분노가 담긴 그 음성에 다이한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숨을 멈췄다.

“환대는 후작 부인이 정신을 차리면, 다시 받도록 하지.”

이안은 자신을 알아보는 다이한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뒤돌아섰다. 무표정한 얼굴과 다르게 꽉 쥐다 못해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

제인 경은 가끔 황녀인 엘레노어에게 따져 들고 싶었다. 유능하다고 그렇게 칭찬을 하시면서 왜 저를 항상 이 망나니와 엮으시는 건가요. 제인은 본인이 여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엘레노어의 호위를 맡을 것이라 생각하며 검술을 배웠던 나날들을 후회했다.

“저하.”

“입 다물어.”

잘 먹고, 잘 산다더니. 툭 건드리면 쓰러지게 생겨가지고는 기어코 기절이나 해대고. 내가 뭘 했다고. 내가-.

“겨우 얼굴이나 봤으면서.”

새어 나오는 원망을 숨기지 못하는 황태자를 보며 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좋은 꼴 못 볼 거라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렇게 행복하더라는 소리를 듣고 미련 버린 줄 알았더니. 즉위식과 결혼이 코앞에 들이닥치자 미련 못 버린 티를 팍팍 내며 이 악물고 여기까지 온 꼴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제인은 아까부터 평온을 가장한 채 수십 번을 거울을 보며, 답지 않게 본인의 옷매무새를 정돈했던 황태자가 어떤 면에서는 애처롭다고 생각했다. 근데, 저쪽에서는 얼마나 싫으면 기절까지 하겠냐고.

“이안 님, 조용히 전하실 말씀만 전하시고 빠른 시일 내로 황국으로 귀환하심이-”

와장창-.

제인의 부름에 이안이 손에 쥐고 있던 와인 잔과 그 옆의 테이블을 그대로 바닥에 집어 던지며 씨근덕거렸다. 제인은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과 음식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사는 게 지겨운 게 아니라면 입 다물고, 숨 쉬는 데나 집중하지?”

집어 던진 와인 잔 대신에 와인병을 들고 발코니에 걸터앉아서 무언가 곱씹듯 이를 악문 황태자를 보며 제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잔뜩 가라앉은 꼴을 보니, 여차하면 오늘 또 피를 볼 게 분명했다. 굳이 내가 자처해서 화풀이 받아낼 필요가 없지.

“그럼, 저는 착실하게 입 다물고. 가서 와인이나 더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녀는 어차피 이쪽 말은 듣지도 않을 게 뻔한 황태자를 버려두고 연회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예쁜가 싶었는데, 그렇게 대단한 미인도 아니더만. 잔뜩 메말라가지고 핏기도 없는 걸 화장으로 가린 느낌?

“후작 부인 저러다 죽는 거 아니래요?”

지나는 길에 들리는 말소리가 꽤나 흥미로워서 제인은 걷는 속도를 늦췄다.

죽는대? 언제? 이왕이면 빨리 죽어야, 이쪽도 빨리 황국으로 돌아갈 텐데.

“죽지는 않겠지만, 목소리도 쫙쫙 갈라지는 게 가끔 소름 끼치는데. 은근 민폐라니까.”

“후작 부인이 장갑을 왜 안 벗는지 알아요?”

“왜?”

아까부터 너무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하게 된 자작 부인, 스텔라가 근질거리는 입을 열었다.

“왜요? 답답해서 숨 쉬기 힘들어요. 빨리 말해주세요.”

“손목에 자살하려고 한 흉터가 가득하다잖아.”

“뭐? 그 후작 부인이?”

되게 흥미롭네. 제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그 옆 기둥에 슬쩍 자리 잡고 섰다. 아무래도 황국과 거리가 멀고, 은근 폐쇄적인 시골 마을 느낌의 왕국 분위기 때문에 이런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 황태자만 해도 사람을 보내 잘 살고 있는지 확인만 하고는 했으니까.

“목소리가 괴상하게 변한 것도, 자살하려고 독극물을 삼켰다가 그렇게 된 거라잖아요?”

“세상에-. 그렇게 단란한 부부인 척하더니.”

“에이, 뜬소문이겠죠. 후작 부인이 뭐 때문에? 부족한 게 없는데. 아니면, 우울증인가?”

“아니아니,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었잖아. 결혼식 때 생각해봐요, 그렇게 서럽게 울었는데-.”

“그거야 어릴 때 얘기고, 말도 안 되는 소문이겠지.”

“이거 진짜 비밀인데, 우리 하녀 중에 한 명한테서 들은 거예요. 걔가 후작저에서 일하다 도망쳐 나왔거든.”

제인은 팔짱을 낀 채로 조용히 고개를 까딱였다. 소문들 수준이 꽤 재밌네. 아까 냅다 기절해버려서 후작 부인 목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제인이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는데,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리안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정말 그런 못 배운 계집애가 막 지어내는 말을 믿는 바보들은 아니시죠? 그래도 우리가 교육이라는 걸 받은 교양 있는 사람들인데.”

리안나의 우아한 어조에 제인은 슬쩍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공작 부인이라 했나?

“아니-”

이야기의 중심에서 신나게 떠들던 여자가 인상을 살짝 구기고 입을 여는데, 리안나가 능숙하게 그걸 막아냈다.

“그러고 보니, 스텔라. 우리 자작님 무역 사업에 후작님께서 꽤 큰 투자를 하셨다면서요? 지젤 님께서 말씀을 잘 해주신 모양이죠?”

귀부인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큰언니 리안나가 눈썹을 까딱이며 무언의 경고를 주자, 스텔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제인은 소문에 관한 대화가 끊겼다고 판단 내리자 다시 걸음을 옮겼다.

뭐,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건 맞는데. 그녀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시키지도 않은 걸 알아내서 황태자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실제로 그렇다 한들 어쩔 건데, 일만 복잡해지지.

“저하께서 입 다물라고 하셨으니.”

닥치고 있어야지. 세상 귀찮은 걸 제일 싫어하는 그녀는 못 들은 걸로 하기로 하고 그대로 가던 길을 걸었다.

***

눈을 뜬 지젤은 자신의 침실에 누워있다는 걸 깨닫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하게 닮은 거겠지? 비슷한 향수를 쓸 뿐이겠지? 미하엘이 아니잖아. 미하엘은 평민이었고, 황태자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죽었다고 했잖아. 너무 힘들어서 내가 혼자.

“괜찮은 건가?”

퍼뜩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젤이 좀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다이한이 침대 옆에 앉아있었다. 그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는 그녀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며 혀를 찼다. 열은 없는데, 지젤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면 아직도 아파 보였다.

“의원을 다시 불러올까?”

정말로 네가 그때 확실하게 미하엘을 죽였었는지 물어볼 수가 없어서. 황태자가 혹시나 미하엘이 아닐까 하는 헛된 희망이 순식간에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미하엘은 평민이었으니까, 황태자일 수 없지만. 당연히 그렇지만 너무 닮아서-. 지젤은 태연하게 속내를 감추고 미안하다는 듯 울상 지었다.

“아니요, 더위를 먹었나 봐요. 죄송해요, 중요한 자리인데 저 때문에 망쳤네요.”

“되었으니, 쉬어.”

딱딱한 어조로 답한 다이한은 그녀가 정말 쉬려면, 자신이 여길 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3개월에 한 번 있는 합방 때도 그는 해가 뜨기 전에 그녀의 침실을 나서고는 했다. 지젤은 그가 옆에 있으면, 전혀 쉬지를 못하니까. 알게 모르게 굳은 어깨와 묘하게 그의 반대 방향으로 틀어진 몸 방향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황태자 저하께서는 왕궁에서 지내시는 거죠? 제가 내일 왕자님 뵙기 전에 찾아뵙고 사과드릴게요.”

“신경 쓰지 말고 자.”

말을 끝마친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지젤은 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한은 바로 침실을 나서지 못하고 지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요?”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녀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답지 않게 한참을 주저하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한 지젤이 눈을 가늘게 뜨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에도 서재로 올 건가?”

난데없는 물음에 덩달아 긴장했던 지젤이 작게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몸이 안 좋지는 않아요. 당연히 내일도 가겠죠.”

“그래.”

다이한은 그 이상 묻지 않고 그대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침실 문이 굳게 닫히고, 혼자 남은 지젤은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닮은 사람일 뿐이겠지. 다른 건 몰라도, 후작이 그런 일은 확실하게 하잖아. 살려뒀을 리가 없는데. 지젤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 보고 싶은 대로 봤기 때문에 닮아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너무 그리워서, 너무 간절해서. 사실, 내가 미하엘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걸지도 몰라.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며 부정했다.

정말 미하엘이라면 후작이 저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

“지젤 님, 정말로 다들 너무 걱정했답니다.”

제가 제일 걱정했어요. 지젤은 자작 부인인 스텔라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하는 말에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욕이나 열심히 했겠지. 속이 훤히 보이는데, 걱정은 무슨.

“그 덕분인가, 금방 나아졌답니다.”

지젤은 애써서 미하엘과 황태자 생각은 안 하려고 노력했다. 다과회에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이따가 조용히 달리아 백작도 만나야 하고.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왕자님 여덟 살 생일이시죠? 이번에 드디어 세례를 받으시겠네요.”

리안나의 말에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가 벌써 여덟 살이니, 세례를 받기에는 늦은 감도 좀 있지.

“그럼, 올해 생일에는 드디어 후작 부부께서 대모와 대부가 되시나요?”

누군가가 던진 질문에 지젤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왕비가 아무리 지젤을 싫어한다 해도, 후작의 뒤에 서있는 다른 친황국파들 눈치를 보느라 이만 바득바득 갈고 있으니. 자연스레 이루어질 일이었다.

지젤은 왕비가 이렇게 쉽게, 빠르게 고립된 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왕은 당장 오늘내일하고, 왕자는 어리고. 실권을 쥔 후작이 왕비를 배척하니, 눈치 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터였다. 게다가, 왕비 또한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아 언제 죽을지 모르니. 당연히 후작으로 권력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지젤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귀 뒤로 넘기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왕비가 병으로 누워서 시름시름 앓다가 곱게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더 무력하게, 더 비참하게 눈으로 보고 죽기를 원했다.

“다들 그렇게 말씀들은 하시지만-”

“황태자 저하와 왕비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오래된 시종 중 하나가 슬쩍 민감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는 귀부인들에게 일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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