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지젤은 대답 없이 그의 연녹색 눈을 빤히 올려다봤다. 다이한은 지젤의 푸른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아까 연회장에서는 듣지 못했던 소리였다. 작은 짐승의 숨소리보다 더 작게 들리는, 그 소리가 너무 와닿아서 그를 한계치까지 몰아세웠다. 그 이상 참지 못한 다이한이 다소 거칠게 그녀를 잡아당겨 입 맞췄다.
지젤은 우악스럽게 입 맞춰 오는 그의 태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반사적으로 몸이 뒤로 밀려 한 발 물러서면, 다이한은 곧바로 그만큼 쫓아왔다. 고개가 비틀어지고, 틈새로 파고든 붉은 살덩어리가 그녀의 숨을 탐욕스럽게 앗아갔다. 자신보다 두 배는 덩치 큰 남자가 몰아붙일수록, 지젤은 어쩔 수 없이 뒷걸음질 쳐야 했다.
그렇게 뒤로 밀리다 밀리다 침실 입구에서 침대까지는 순식간이었다. 푹신한 침대가 등에 닿고, 묵직한 무게가 지젤의 몸 위로 엎어졌다. 다리가 얽히고, 숨이 섞이고 체온이 들끓어 열이 몰렸다. 다이한은 그녀의 새하얀 목에 입 맞췄다. 지젤의 붉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 엉켰다. 그녀가 그를 허락했다는 걸 확인이라도 받으려는 듯 그가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지젤.”
지젤은 조용히 그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로 무표정하게 천장을 바라봤다. 다이한이 그녀의 목에 파고들듯 얼굴을 묻었으나, 지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이한의 금발이 그녀의 목 언저리를 간질였다.
오늘을 기점으로 세 달에 한 번은 합방이 이루어질 테니, 영구적인 피임약이 필요하겠네. 지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약을 어디서 구할지 고민하며 다이한의 어깨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이 밤을 기점으로, 기어코 지젤 아벨린은 죽었다 믿었다.
***
“손.”
마차에서 내리던 지젤은 다이한이 자신을 향해 내미는 손을 보고 옅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순순히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일이었다.
황국 손님맞이를 위해 연회장에 모여 서있던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언제나처럼, 젊은 후작 부부가 손을 꼭 붙잡고 들어서는 걸 보며 그들은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말을 뱉어냈다.
“어쩜, 5년이 지난 부부가 저리도 다정할까? 각자 애인도 없는 것 같고.”
누군가가 꺼낸 다정이라는 말에, 몇몇 귀족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요, 후작 내외는 다정하다기보다는.”
“그래, 마냥 다정하다기보다는- 그. 뭐라 해야 좋을까?”
사이가 무척 좋다기에는 서로를 향한 몸짓이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후작은 어디서든 자신의 아내의 근처만 맴돌았다. 그게 좀 유난이기는 했지만, 다정한 사이라기에는 묘한 어폐가 있었다.
“착실하게 의무를 다하는 느낌이지. 남들 보란 듯이.”
“아.”
공작 부인인 리안나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주위에 있던 귀부인들이 작게 탄식했다.
“근데, 그런 것치고는 저 딱딱한 후작님이 부인을 너무 살뜰히 챙기지 않아요?”
“아무래도 후작 부인 몸이 약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하긴. 한여름에도 장갑 한 번을 벗질 않고, 저번에 왕자님께서 후작 부인에게 주스를 엎었을 때도-”
“크흠.”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후작 내외를 발견하고 작게 헛기침을 하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후작 부인께서는 오늘도 변함없이 어여쁘시네요. 아침부터 열심히 단장한 제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예요.”
리안나가 화려하진 않지만 척 봐도 값비싸 보이는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지젤에게 웃으며 말하자, 지젤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짓궃게 놀리지 마세요. 부끄럽습니다.”
“놀리다니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리안나는 지젤이 순둥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최대한 그녀에게 호의적으로 구는 데 집중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귀부인들이 지젤의 눈에 들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작년부터 몸이 안 좋아 공식 석상 외에는 잘 나서지 않는 왕비를 제외하면, 후작 부인이 가장 권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왕비가 오래전부터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왕과 같은 병에 걸렸다 했지만, 왕비의 병명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의원은 없었다. 대신 혹시라도 옮을까 두려웠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왕비를 멀리했다.
왕국에 친인척이 없는 왕비 대신 왕자를 돌보는 일을 귀부인들이 나눠 한다지만, 왕자가 지젤을 가장 잘 따랐기 때문에 실질적인 유모 역을 맡고 있는 건 지젤이었다. 친황국파인 후작의 부인이니,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왕비는 몹시도 싫어했지만.
“잠시.”
다이한이 귀부인들에게 지젤을 데려다 놓고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지젤은 그런 그를 보며 옅게 미소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좀 늦게 오셨는데, 혹시 몸이 안 좋으신가요?”
자작 부인인 스텔라가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지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더워 그런가. 머리가 어지러워 잠시 마차를 세웠답니다. 더위 때문에 정말 힘드네요.”
“저런, 이런 날 빠지실 수도 없고 고생이셨겠어요. 황태자 저하께서 왕국에 오신 건 처음이라면서요.”
“이제 곧 즉위를 앞뒀다고 하던데, 그래서 방문한 게 아닐까요?”
“아까 지젤 님이 보셨어야 하는 건데. 약혼녀가 있으시다지만, 다들 눈에 들어보려고 자기 딸들 앞세우기 바쁘던데요. 드랑 부인이 큰딸 들이미는 거 보셨어요? 얼마나 웃기던지.”
“근데, 방금까지만 해도 여기 계셨었는데 어딜 가신 거죠? 후작님과 지젤 님께서는 아직 뵙지 못하셨잖아요. 그죠?”
지젤에게 뭐 하나라도 얻어들으려는 듯 떠보듯 묻는 말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이한에게 크게 이렇다 들은 얘기가 없었다. 단지, 다이한도 어릴 적부터 사교계와 거리를 멀리한 황태자를 이번에 처음 본다고만 알고 있을 뿐. 이름이, 이안? 어리다던데. 이십 대 중반인가.
“저 때문에 늦게 도착해서는 아직 뵙지 못했네요. 바람이라도 쐬러 가신 게 아닐까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운지.”
대강 대답을 한 지젤이 밀려오는 더위에 눈을 끔뻑거리자, 눈치 빠른 자작이 잽싸게 그녀에게 차가운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지젤 님.”
“어쩜, 감사해요.”
지젤이 환하게 웃어 보이며, 연분홍색 액체로 가득 찬 길쭉한 유리잔을 받아 들었다. 황태자든 뭐든, 상관없었다. 지젤은 힘없이 왕좌에 앉아있는 왕비를 흘끔 올려다보고는 그 뒤에 선 충실한 기사 조지 콜튼 경을 향해 눈웃음 지었다. 그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조지 경은 작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싫어하든가 말든가. 지젤은 이쪽을 슬쩍 쳐다보고 지나가는 달리아 백작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숨을 들이마셨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일이 술술 풀려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심호흡을 위해 크게 숨을 들이마셨던 지젤은 그대로 몸을 굳혔다.
“무슨-.”
저도 모르게 입에서 당혹스러움이 튀어나왔다. 수십 가지의 향수와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 그 사이로 익숙한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스치고 갔다. 가벼운 비누 향으로 시작해서, 포근한 사향으로 마무리되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지만, 희미하게 빛바랜 추억으로 남은 그 향기는 단숨에 숨통을 조였다.
“어머, 저기 오시네.”
지젤은 귀부인들이 자신의 뒤쪽을 보고 급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걸 보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유난히 둔탁한 구두 소리가, 너무나 생경하게 귓가에 안착했다. 그냥 비슷한 향수일 뿐이야. 흔하고, 흔한 향수일 뿐이니까. 그녀가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굳은 몸은 움직이질 않았다.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리안나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하는 인사말에, 얼어붙은 듯 서있던 지젤이 애써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입 벌려 탄식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아.”
황태자라 불린 이가 낮은 음성으로 작게 소리 내 탄식했다. 흑발과 검은 눈이 유난히 짙은 인상을 더 짙어 보이게 만드는 그 얼굴이 너무나 낯설고도 익숙했다.
“저하, 죄송합니다. 후작 부인께서 오늘 몸이 좋지 않으-”
“그 유명한 후작 부인?”
지젤이 아무 말 없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태자를 보고만 있자, 눈치 빠른 리안나가 다급하게 대신 사과를 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 황태자가 그런 그녀의 말을 냉하게 잘라 먹고 한쪽 입꼬리를 어그러트렸다.
“그렇지 않아도, 후작 부부께서 그리도 금슬이 좋다고 하니 비결이나 배워볼까 싶었는데.”
비소를 머금으며,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차가웠다. 지젤은 대답을 할 생각조차 못 하고 자신보다 훨씬 큰 키를 가진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깊은 눈매와 반듯한 콧대, 붉은 입술이 그녀가 아는 그 얼굴이었다. 하지만, 선이 굵어진 골격과 기억보다도 더 큰 키. 그가 걸치고 있는 흰색 정복이 낯설기 짝이 없었다. 그의 차림새는 누가 봐도 황태자임을 알 수 있었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나 애틋하신지, 그 먼 황국까지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렇게 그리워하고, 후회하고,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로. 그 얼굴로 이죽거리는 너무도 다른 사람. 지젤은 눈앞의 상대가 환영임을 증명해 보이려 애썼다. 그러나, 본인의 속눈썹이 보인다고 생각될 만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것 따위로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젤 님, 왜 그러세요?”
모두가 이상하게 보는 그 광경 속에서 지젤은 멍하니 황태자의 얼굴만 바라봤다. 황태자가 여전히 아무 말 없는 그녀를 비웃듯 비아냥거렸다.
“결혼하고 근 5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서로를 어찌나 위한다던지, 몹시 궁금하던 차였지.”
숨길 수 없는 원망과 비난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비꼬는 황태자를 보며 지젤은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그게 자신이 떨어트린 샴페인 잔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그녀는 뺨에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닿고 나서야 자신이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는 걸 알아챘다.
“지젤!”
다이한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지젤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