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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20)화 (20/135)

20.

그가 방금 대화에 대한 어떤 설명을 요구하기 위해 그녀를 불렀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쪽을 빤히 올려다보는 푸른 눈이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샹들리에 불빛에 영롱하게 빛나는 그 눈이 언젠가 보았던 산꼭대기의 호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속눈썹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닿고 있지도 않은 그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그저 이쪽을 올려다보는 게 다인데도. 그뿐인데도.

다이한은 갑자기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붉은색 드레스가 너무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집사에게 값은 신경 쓰지 말고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 드레스를 고르게 하라 했지만. 저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끄는 것 같았다.

“다이한 님.”

지젤이 이를 악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왕비 쪽을 힐끔 보다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저 여자의 고통이 보고 싶었다. 그게 사소할지라도. 그래서 그녀는 다이한의 뺨을 잡아당겼다. 다이한의 눈이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그는 순순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고개를 숙였다. 다이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속삭이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는 걸, 그는 자신의 입술에 맞닿는 체온을 느끼고서야 깨달았다. 찰나였다. 정말 눈 한번 깜빡하고 나니 지젤은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근데, 그 짧은 순간의 열기가 그의 이성을 좀먹었다. 맥락 없는 입맞춤에, 그가 견고하게 쌓아뒀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는 지젤의 푸른 눈이 놀라서 동그랗게 변하는 걸 보며, 저도 모르게 지젤의 손목을 잡아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이한이 지젤을 끌고 발코니 한쪽으로 사라지자, 모두들 서로 눈치만 보며 말을 아꼈다. 신혼은 신혼인가 보다, 다이한 후작님도 별수가 없다며 놀리기에는 왕비의 표정이 살벌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한쪽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달리아 백작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

“다이한-.”

지젤은 그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없는 곳으로 거칠게 끌고 왔다고 받아들여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다이한은 그런 그녀의 말도 잘라먹고 입술을 겹쳤다. 부드러운 입술과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리고, 그 사이를 말캉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파고들었다. 지젤은 양 주먹을 꽉 쥐고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입을 다물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다이한은 숨을 쉬기 위해 반사적으로 물러나려는 그녀의 뒷머리와 허리를 끌어 잡아 고정시켰다. 이건 이상한 행동이었다. 그가 이 충동적인 행위에 대해 결론 내렸다. 그걸 인지하면서도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지젤의 모든 걸 다 가지고 싶다는 기이한 허기와 충동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네가 시작했잖아.

그가 말도 안 되게 지젤의 탓을 하며 그녀의 입 안을 탐닉했다. 거친 숨소리가 그녀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구분이 안 갔다. 지젤이 숨을 쉬지 못해 크게 헐떡이고 나서야 다이한은 입술을 떼어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다시 입 맞출 것처럼, 그녀의 입술에서 멀어지지는 않았다. 지젤은 정염에 젖어 색이 짙어진 다이한의 초록색 눈을 보며 턱이 덜덜 떨리는 걸 애써 참아냈다. 당장에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 후작님. 마실 것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다이한은 눈시울이 붉어진 지젤이 숨을 고르는 걸 잠깐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본인을 진정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저는 입술이 번진 것 같으니, 정돈 좀 하고 있을게요.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리겠어요.”

잠시 그대로 서있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 발코니를 나갔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지젤이 자신의 입을 드레스 소매로 벅벅 닦으며 이를 악물었다. 더러워. 손수건을 꺼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그녀는 난간을 붙잡고 버텨 섰다.

“두 분 내외 사이가 좋아 보이십니다.”

발코니 밖에서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그녀는 휙 고개를 돌렸다. 달리아 백작이 발코니 밖 나무에 기대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젤이 놀란 티를 내지 않고 그의 말에 대꾸했다.

“부부란 게, 원래 겉보기에는 좋아 보이는 법이죠.”

“후작께서 금방 돌아올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런 편지로 나한테 장난을 치는 이유가 뭡니까.”

“장난이라 생각하셨으면,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내 죽은 남작과의 우정을 생각해, 문제를 크게 만들지 않고 이렇게 긴밀히 찾아온 것을 감사히 여기세요.”

그의 푸른 눈에 담긴 고요한 분노를 확인한 지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답을 드리면, 제가 달리아 안나의 딸입니다.”

백작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급했다. 후작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까. 지젤의 깔끔한 대답에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나를 농락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믿지 못하셔도 방도가 없네요. 저를 구해내 데려다 키우신 제 아버지, 아벨린 남작께서는 여동생과 함께 왕비에게 살해당했으니까. 저는 증거도, 증언도. 허울 외에는 무엇도 없습니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백작은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데, 이건 뒤로 보나 앞으로 보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아무것도 없는데 그저 믿으라?

“내가 그 말을 믿으리라 생각합니까? 시답지 않은 계집이 가족의 죽음에 미쳐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걸?”

타당한 의심이었기에 지젤은 그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태연해 보이는 그 푸른 눈에 담긴 끓는 분노를 눈치챈 백작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제가 정말 백작님의 손녀라면, 직계 왕족이라는 정통성이 있으니 와해된 백작님의 권력을 모으는 명분은 될 수 있겠죠. 백작님, 저는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황국에 빌붙어 이 나라를 이용해 먹는 왕비와 후작을 무너트릴 기회요. 저는 권력이고 재물이고 다 필요 없습니다.”

전 왕비의 딸. 성인이 된 공주의 등장. 정통성을 중요시하는 늙은 귀족들을 움직이기에는 그럴듯한 명분이었다. 백작이 본인의 친손녀가 맞다고 확인만 해주면, 증언과 증거는 마음만 먹어도 만들 수 있었다.

“저를 이용하세요.”

“황국 앞잡이인 후작의 부인을 내가 어떻게 믿고?”

“아벨린 남작가의 화재를 캐보세요. 왕비가 제 아버지의 죽음을 원한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지젤이 선뜻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심란해 보이는 백작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이용 가치가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시고, 오래 고민하셔도 저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후작 부인이 남편의 몰락을 바라는데.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게, 권력도 돈도 아니다?”

“네.”

그게, 그녀가 바라는 전부였다.

“저는 후작과 왕비의 파멸만 보면 됩니다.”

그것만 볼 수 있노라면, 몇 년이 걸리든. 뭘 대가로 하든 그녀는 인내하고 참아낼 수 있었다. 지젤이 난간을 양손으로 꽉 쥐면서 그 무엇보다 환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정말로, 그걸 위해서라면 모든 할 수 있어요.”

백작은 그 광경이 참으로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어린 여자애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팔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주어 난간을 잡고 있는 모습이.

“이렇게, 나만 잃고 끝낼 수는 없어요.”

이를 악물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눈까지 휘어 해맑게 웃어 보이는 게. 정말 괴이하게 다가와서 백작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백작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죽은 자신의 딸 안나의 복수를 지젤을 이용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소름 끼쳐서 그는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지젤은 그런 그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백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손수건을 꺼내 입 주위를 닦아냈다.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

지젤이 어지럽다고 호소했기 때문에, 후작 부부는 연회의 끝을 보지 못하고 저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돌아오는 마차에서 다이한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굴었고, 그건 지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운 지젤은 지금 침실 문 밖에 서성이는 사람이 다이한일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고요한 밤중에 이따금 들려오는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그녀를 괴롭혔다.

당연하게도 달리아 백작은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니, 이쪽은 후작을 꽉 잡고 있어야겠지. 손에 쥔 작은 유리병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미아가 꽤나 도움이 되네.”

투명한 유리병에 일렁이는 파란색 물약이 그녀의 눈동자 색과 같았다.

1회분 피임약이기는 하지만, 월경 주기를 바꾸고 싶다는 말에 정말로 조용히 구해오다니. 이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라 그런가, 여기저기 아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았고.

무엇보다 백작에게 이상한 편지 전달을 시켰는데도, 불쌍히 죽은 여동생 일이라 하니 아무 말도 묻지를 않을 만큼 착하고 순진하다. 이쪽이 무슨 일이든 미아부터 찾으니, 이상한 책임감도 좀 느끼는 것 같고.

“아니면 멍청한 건가.”

지젤이 별생각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으며 유리병 안의 물약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올려진 물잔으로 입을 헹구며 숨을 들이마셨다. 이 야밤에 저렇게, 침실 앞을 어슬렁거리는 이유는 하나겠지.

그녀가 주저 없이 침실 문을 열어젖히자, 그 앞에 서있던 다이한이 그대로 굳어 들었다. 지젤은 그런 다이한을 아무 말 없이 훑어봤다.

“잠이 안 오시나 봐요.”

다이한은 언제나처럼 대답이 없었지만, 지젤은 그걸 답답하게 여기지 않았다. 첫날밤에 입었던 차림새랑 똑같네. 그냥 밤에는 저렇게 입는 건가. 그가 입고 있는 검은 바지와 단추가 두어 개 풀린 검은색 셔츠를 보며 지젤은 자문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가치가 있을까. 사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한다고 해서 뭘 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이 밤에 왜 왔는가 설명을 하자면.”

다이한은 왜 자신이 이 밤중에 여기 와있는지 변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젤이 갑자기 입 맞췄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고, 그걸 해소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었으나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그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녀가 굴욕적이라 했던 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후작님.”

지젤은 그와 자신의 주저함이 같잖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그녀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삼키며 그의 커다란 오른손을 자신의 뺨으로 이끌었다. 다이한은 몸을 움찔 떨었지만, 그걸 떨쳐내지는 않았다.

다이한은 자신의 몸에 닿는 따듯한 체온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지젤의 뺨에 닿은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그가 감정을 주체하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입 안에 굴렸다.

“지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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