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9)화 (19/135)

19.

“예? 하지만. 이렇게는-”

“예, 절 이렇게 대놓고 죽이고 나면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요?”

지젤이 조지의 말을 대신 이어받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어떤 명분으로 나를 죽이려고? 이렇게 보니 홧김에 아무런 말이나 하는 왕비가 멍청하고 하잖아 보였다.

“이제 제 출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후작 부인을 이렇게 때리시고는 갑자기 죽이시겠다고요? 제가 여기 걸어 들어온 걸 그 많은 사람들이 봤는데. 무슨 그럴듯한 명분으로?”

광기. 조지는 지젤의 커다란 푸른 눈을 보며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 고요한 듯 보였던 바다 같은 눈망울로 그저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왕비의 화풀이 상대로 당하다가 나갈 줄 알았는데, 저건 그냥 광견병 걸린 들짐승 같았다. 얌전히 앉아있다가 갑자기 눈이 돌아서, 물어 뜯어버리는.

“어린 왕자님께는 나중에 뭐라 설명하실 겁니까? 내 애인인 후작이 부인을 너무나 사랑하길래, 질투 나 죽였다고?”

“뭐, 이런 미친년이-!”

당황스러워서 굳어 있던 왕비가 손을 번쩍 들어 지젤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지젤의 얼굴이 휙 돌아갈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꽤 큰 타격이라 그대로 바닥에 넘어진 지젤은 입 안 가득 퍼지는 비릿한 맛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로 맞은 게 되었네. 이대로 저택에 돌아가면, 다들 또 얼마나 나를 짠하게 보고 후작을 흘겨볼까. 순진한 미아는 어쩌면, 가련하게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른 일이었다. 그럼, 더 내 쪽으로 감기겠지.

“이게 무슨 짓이야.”

지젤이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정말 잘 짜여진 연극처럼 다이한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지젤은 본인이 꽤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걸 후작이 직접 보다니.

“일어서.”

긴 다리로 성큼성큼 지젤에게 다가온 다이한이 거칠게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이를 아득 물었다. 그는 평소처럼 귀족들을 모아두고, 가벼운 논의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저택에서 지젤이 왕비에게 부름을 받고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다이한은 지체 없이 왕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이한! 이 계집이 기억을 잃은 척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가증스럽고-”

“피가 나잖아.”

다이한이 그런 왕비는 쳐다도 보지 않고, 지젤의 얼굴을 거칠게 잡아 살피며 혀를 찼다.

“아닙니다. 아니, 괜찮아요. 후작님, 일단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요. 지젤이 방금 표독스럽게 왕비에게 비아냥거렸다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처량하게 울상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보며, 다이한의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후작 부인을 이렇게까지 때리신 연유가 뭡니까.”

“내가 때리지 않았습니다. 저 영악한 년이 제 스스로 때린 겁니다. 콜튼 경을 포함하여, 여기 있는 모두가 봤어요. 심지어 날 겁박까지 했습니다!”

왕비의 말에 다이한이 입구에 서 있는 조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조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후작의 매서운 눈길에, 어딘지 저절로 위축되었다.

“외람되게도 후작 부인께서 자학적인 행동을 하신 것을 저도 보았습니다.”

“제가요? 아-.”

지젤이 조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울상 지으며, 작게 탄식했다. 다이한이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예, 제가. 제가, 저를 때렸나 보네요. 아니, 네.”

지젤은 처연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가 그랬습니다. 왕비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집에 가고 싶어요. 지젤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르며 푸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는 자신의 턱을 쥐고 있던 다이한의 커다란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마치 그의 손이 자신을 구해줄 동아줄인 것처럼 애처롭게 굴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벌을 받으라 하시면, 받을 것이니. 일단, 우리 저택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다이한은 겁에 질린 것처럼 파르르 떠는 지젤을 보다가,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뺨을 다시 확인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의 목에 핏대가 서는 걸 보며, 지젤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일단, 제가 왕비님께 사죄를-”

“같이 돌아갈 것이니, 먼저 나가 있어. 한센.”

다이한이 지젤을 문 쪽으로 가볍게 밀쳐내며, 자신의 수족에게 손짓했다. 그러고는 왕비를 향해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 왕비는 지젤의 행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숨을 뱉어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 가만히 보던 지젤은 무서워서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재빠르게 응접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와중에 그녀는 스치듯 지나가며, 얼이 빠진 채로 이쪽을 보고 있는 조지 콜튼을 보며 처음과 마찬가지로 살풋 미소 지었다.

이런 유치한 행동에도 자존심들 때문에 놀아나는 것들이란.

조지는 그런 지젤을 끝까지 눈으로 쫓으며 눈을 깜빡였다. 확실히 과감하게 미친 여자였다.

지젤이 한센의 부축을 받아 사라지자, 다이한은 사람들을 물리고 왕비와 독대하였는데. 그곳에 있던 모두들 다이한과 왕비가 무슨 대화를 했는지, 궁금해했지만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후작이 후작 부인을 세심하게 챙겨 저택으로 돌아갔다는 건 눈으로 보아 알 수 있었다. 왕궁에는 왕비가 후작과 끝났다는 소문이 빠르게 번졌다. 그날 후작저에서는 왕비의 입김이 닿는 사용인들 여럿이 이유 없이 내쫓겼다.

***

달리아 백작은 어린 소녀가 후작 부인의 편지를 백작님에게 전해야 한다고 저택 안으로 내던졌다는 종이를 손에 쥐고 허탈하게 숨을 내뱉었다.

[달리아 안나 왕비의 딸을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미 자신의 딸과 함께 사고로 죽은 지 오래였다. 마차에서 튕겨 나간 어린아이는 분명 숲 어딘가에서 썩어 문드러졌을 것이었다.

“이걸 들고 온 여자는 도망갔다고?”

“네, 후작 부인의 편지라는 말만 전하고는. 잡았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런 장난을-.”

후작 부인이 이런 걸 보낼 리가. 근데도, 그런데도 그는 그걸 시답잖은 장난이라고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정말 터무니없는 한 문장인데도,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데. 그는 그걸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작당이란 말인가.”

백작이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 넘기자, 그의 흰머리가 혼란스러운 그의 심정만큼 흐트러졌다.

***

비가 오고 길이 질척거리는지, 유난히 덜그럭거리는 마차 안에서 지젤은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왕비에게 뺨을 맞은 날 이후에도 후작은 별말이 없었다. 그가 왕비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후작저 사람들은 그녀를 더 지극정성으로 챙기기 시작했다. 미아는 얼굴이 퉁퉁 부은 지젤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후작은 기억을 잃었다거나 하는 그녀의 증세에 대해 함구령까지 내렸다. 사교계에 퍼져서 좋을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후작에 대한 적절한 공포와 묵직한 금화 주머니는 소문의 불씨 자체를 꺼버렸다. 그나저나, 미아가 생각보다도 순진하게 그저 하라는 대로 이쪽 뜻대로 움직여주니 다행이었다. 백작은 편지를 잘 받았겠지?

“손.”

다이한의 말에 지젤은 마차가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사람들 많은 곳에 가려니, 살짝 무섭네요.”

잠깐 자신의 손에 쥐여진 지젤의 작은 손을 내려다봤던 다이한은 이내 말없이 그녀를 이끌며 마차에서 내렸다.

왕비의 탄신일 축하 연회. 지젤은 애써 입에 미소를 머금고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왕비와 후작의 치정, 그 소문의 중심지인 지젤이 후작 부인으로서 처음으로 사교계에 발 들이는 날이었다.

***

축하 연회는 생각보다도 지루하고 따분했다. 가볍게 인사는 나누지만 지젤과 대화를 깊게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옆을 무뚝뚝하게 지키고 서 있는 다이한 후작 때문이었다. 모두들 젊은 권세가인 후작을 어려워했다.

사람들은 다이한 후작이 젊은 후작 부인을 본인들에게 소개시킬 때, 실수를 줄이기 위해 말수를 줄였다. 가족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심약해진 걸 넘어서 목소리까지 흉측해졌다는데, 그 앞에서 언행을 잘못해 후작에게 밉보이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다이한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모두들 눈을 빛내며 지젤에게 다가섰지만 먼저 선수 친 여자가 있었다.

“지루하시죠? 왕비님 비위 맞추기도 피로하고. 얼마나 대단한 날이라고.”

지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에 서서 왕비의 험담을 하는 금발의 여자를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중년의 여자가 소리 내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예법에 맞지 않게 먼저 인사드리는 무례를 부디 용서하시길. 헤넌 공작 부인입니다. 리안나, 그렇게 불러주세요.”

“그럼, 저도 편하게 지젤이라 불러주세요.”

“사람들이 관심 가지는 게, 거슬리시겠지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다음 주면 또 다른 사람을 물고 늘어질 테니까요. 저번 달은 저였답니다. 우리 남편이 수도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매춘부에게 저택을 사줬거든요. 모자란 놈.”

뭐라 답해야 하는 걸까. 지젤은 그녀의 웃음기 어린 말투와 그렇지 못한 내용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샴페인이 든 잔을 기울인 리안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 여기는 한쪽만 애달아 있는 것 같으니 좋으시겠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그 여자만 보면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 남편과 달리, 후작님은 딱딱하기 그지없는데. 왕비님 혼자 저 위에 앉아서 후작님을 계속 쳐다보잖아요.”

리안나의 말에 지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겁먹은 척하느라 아까부터 일부러 안 보고 있었는데, 그러네. 왕자를 품에 끌어안고 왕좌에 앉은 왕비가 다이한을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지젤은 그제야 저 둘 사이가 어느 정도는 왕비의 일방통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중에 다이한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후작님께서 이쪽으로 오시니 저는 가봐야겠네요.”

생각보다 과보호하시는 것 같네요. 리안나가 몸을 반쯤 돌리고는 잠시 고민하듯 지젤을 가만히 훑어보다가 말을 이었다.

“무슨 얘기 하려고 왔냐면. 왕궁에서 귀부인들이 매일 다과회를 열어요. 돌아가면서 왕자님 보모 역할도 하는데, 괜찮으면 다른 분들께 말씀드려서 초대할게요. 누군가 싫어한다 하신들 공작 부인인 저도 가는 곳을 명색의 후작 부인께서 빠지시면 그림이 이상하잖아요?”

“불러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지젤이 리안나에게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둘의 대화를 다 듣지 못한 다이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감사?”

“그럼, 두 분 평안한 저녁 되시길.”

리안나가 설명도 없이 빠르게 치고 빠지자, 다이한이 지젤을 내려다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지젤은 그런 다이한보다도 이쪽을 보고 있는 왕비의 시선을 살폈다.

“지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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