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8)화 (18/135)

18.

긴 흑발의 여자가 작게 하품을 하며 황궁 정원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승마복을 입은 채로 혼자서 평화롭게 휴식을 즐기고 있는 그녀에게로 기사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갑옷이 내는 투박한 소리에 엘레노어가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는데, 이렇게 들어온 이유는 보나 마나.

“엘레노어 님.”

“또?”

“이번엔 왕궁에 다녀온 시종입니다.”

기사가 깊게 한숨을 쉬자, 엘레노어라 불린 황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정원을 빠져나가 황태자궁으로 향하며 씨근덕거렸다.

“제인 경에게 크게 하사하겠다고 전해. 매일 시체 묻을 구덩이 파는 것도 지겨울 텐데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지.”

“황녀님, 걱정입니다. 저하께서 저러시는 걸 다른 귀족들이 알면-”

“황태자가 미쳐서 사람을 죽여대니. 끌어내리기에 적합한 명분이지.”

황태자의 침실에 도착한 그녀는 서슴없이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찢겨진 그림, 망가진 가구들, 깨진 창문의 유리 조각들 따위와 붉은 선혈들이 바닥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피 웅덩이에 무릎 꿇고 주저앉아 있는 자신의 남동생을 보고 짧게 혀를 찼다.

“저것도 동생이라고 한 핏줄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어.”

어둠에 가려진 남자는 엘레노어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피 묻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무력감과 원망이 그의 이성을 좀먹어치웠다.

“원래도 더러운 성격이 잔혹해지기까지 하니. 계속 그렇게 칼을 휘두르고 피를 봐서 네가 나아진다면, 계속 들여보내야지. 몇 명이나 더 죽여야 속이 시원하겠니? 미리 언질 좀 줄래?”

“엘레노어, 입 다물어.”

찢어버리기 전에. 과격한 말을 내뱉은 남자가 무얼 참아내듯 잇새로 내뱉는 말에 엘레노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미하엘? 이름도 조잡해라.”

그녀는 남동생이 이해가 안 갔다. 그러게, 진작에 그럴듯한 귀족과 결혼하고 그 시골 소녀는 애첩이라도 시켰어야지. 본인 스스로 쉬운 길을 두고, 빙빙 돌기만 하고. 매사에 그런 식으로 안일하다.

“이안. 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야. 황제께서 네가 제정신 차릴 때까지 여기 가둬두라 하셨단다.”

아들이 헛짓거리를 하다 못해, 전쟁 영웅인 다이한 후작의 결혼 무효를 주장하니 황제가 열이 받을 만했다. 가뜩이나 권력에 욕심 없는 척, 관심 없는 척해서 황궁에서 입지가 좁은 황태자가 황국 사람들에게도 호감이 높은 왕국의 전쟁 영웅과 척진다? 싸움이 안 되는 일이지.

그것도 터무니없는 치정 싸움? 황국은 지금의 왕비가 후작과 함께 왕국을 장악하고 있는 걸 매우 흡족해하고 있는데, 그의 편을 들어줄 리가.

“그 오만한 자존심에 되찾고 싶어? 유부녀를?”

엘레노어는 대답 없이 피로 얼룩진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자신의 남동생에게 애정을 담아 충고했다.

“누구를 원망하겠니. 힘이 없는 건 죄가 된단다. 네가 네 것을 지키지 못한 건, 네 잘못이야.”

여태, 황태자로서 편안하게 살아서 몰랐겠지만. 엘레노어의 말에 미하엘이라는 이름을 쓰던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남동생의 검은 눈을 가만히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수발들어 주는 이들 분풀이로 죽여낸다고 힘이 생기지 않아.”

엘레노어는 분노와 절망에 먹힌 자신의 남동생을 향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막연하게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이 촉진제가 되어, 이 멍청한 동생이 권력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는다면 그렇게 손해는 보는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

이를 악문 혈육이 어떤 기분으로 그녀의 손을 마주 잡는지 몰랐던 엘레노어는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다.

***

왕비의 부름으로 왕궁에 들어선 지젤은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린다고 느꼈다. 이렇게 갑자기 저택 밖으로 나올 수 있을 줄 몰랐는데. 왕비의 명으로 나왔으니, 이 외출은 퍽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복도를 쭉 걷다가, 문득 한 발 앞서 걷고 있는 기사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조지 경이라고 하셨죠?”

지젤은 아까 당황스러워하던 집사가 내뱉은 이름을 꺼내 들었다. 왕비의 친필 초대장을 들고 올 정도면, 최측근이라는 이야기인데. 사내는 지젤의 물음에, 살짝 고개를 돌려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 콜튼입니다. 콜튼 경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지젤은 넉살 좋게 웃어 보이는 이십 대 후반의 사내를 보며, 살풋 미소 지었다. 왕비가 후작 모르게 그녀를 왕궁에 부른 이유가 뭘까.

“왕비님께서 왜 저를 보고자 하시는지, 무척 궁금하네요. 친절하신 콜튼 경께서 귀띔이나 해주시면 좋을 텐데.”

“제가 뭐라고, 후작 부인께 감히 귀띔을 해드리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부탁을 드리면 경께 어려운 일이 될까요?”

조지는 생각보다 어른스럽고, 교양 있어 보이는 지젤을 슬쩍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어느새 도착한 응접실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친절하게 답했다.

“제가 무언가 언질을 드리는 것보다는, 직접 뵙는 것이 빠를 것 같습니다.”

조지가 허리를 숙이며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걸 본 지젤이 그런 그를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응접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응접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굳게 닫혔다. 화려하게 장식된 응접실의 중앙에 앉아있는 왕비를 본 지젤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를 뵙습니다.”

“내 언뜻 듣기로는, 기억을 잃었다지? 목소리도 그래. 듣기 거북할 정도로 기괴해졌구나.”

왕비의 질문에 지젤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왕비의 긴 검은 머리가 정갈하게 묶여 있어 우아해 보였다. 그녀의 검은 눈이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찻잔에 연녹색 차를 채우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지젤이 입을 열었다.

“제 남편이, 아니. 후작님이 벌써 마마께 제 병에 대해 말씀드렸나 봅니다.”

지젤이 다이한을 칭하는 호칭에 왕비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남편?”

“아, 호칭이 입에 붙어서 그만. 송구합니다.”

전혀 송구스럽지 않은 말투였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로는 보기 힘든 왕비는 그 미모가 가려질 정도로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녀는 눈앞의 계집이 거슬리다 못해, 속이 뒤집어졌다. 그냥 죽여버리면 끝날 일을, 기어코 결혼까지 해서는. 왕비에게 후작은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황국에서 인정받는 권력가임을 떠나서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었기에 왕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켜내기 힘들었다.

“헌데, 제가 제 남편을 남편이라 부르는 게 법도에 크게 어긋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싶네요.”

“네가 기억을 못 한다고?”

어딘지 음산하기까지 한 분노가 느껴지는 시선을 지젤은 담담히 받아냈다. 후작과 왕비가 무슨 연애를 하든 그녀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왕비가 조금이라도 괴롭다면.

“예, 그래서 후작님께서 많이 고생하셨지 뭡니까. 듣기로는 제가 걱정되어, 사흘 밤낮을 잠도 못 이루셨다고 들었습니다.”

“하.”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왕비를 분노케 할 수만 있다면, 지젤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있었다. 지젤은 분노로 가득한 왕비의 얼굴을 보며 해맑게 웃었다. 그걸 보며, 왕비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왕비의 화려한 보라색 드레스가 지젤의 눈에는 피처럼 붉게 보였다.

“네년이 살고자 거짓을 주절거리는 걸, 내 모를 줄 알고?”

왕비가 지젤의 코앞까지 다가와 이를 아득 물고, 비아냥거렸다.

“아비와 여동생이 죽는 걸 보니, 무섭던가? 그래서, 비루하게나마 연명해보려고 그딴 장난질을 쳐? 동정심을 구걸해, 후작에게 뭘 얻어내려고.”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지젤은 비소를 띠었다. 굳이, 왕비에게까지 기억을 잃었다는 둥, 절절매며 길 생각이 없었다.

“네가 웃어?”

“그렇게 분하실 이유가 있나.”

“뭐?”

지젤은 이 넓은 응접실에 왕비와 자신밖에 없다는 걸 재확인하고는 오른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애정 어린 사이였기에.

“기억을 잃은 제가 후작님께 예쁨받는 게 그렇게 질투 나시나요?”

“당장 내가 네 목을 베어내도 누가 슬퍼한다고 그리 시건방질까. 후작이 정말로 널 사랑해서 저택에 들인 줄 알아?”

왕비는 기가 막혔다. 저번에는 그저 무릎 꿇고 설설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어린 계집이. 지금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뻔하고도 기고만장했다.

“예, 압니다. 근데, 후작 부인이 대놓고 맞고 오면. 체면 생각해서라도 화를 내겠지요.”

그 자존심에. 지젤은 힘을 가늠하듯 오른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왕비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뭐?”

왕비가 아연하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지젤이 스스로 자신의 뺨을 내리쳤다.

“네년이, 뭐 하는 짓이야!”

왕비의 목소리만큼 날카로운 마찰음이 응접실에 계속 울려 퍼졌다. 왕비의 비명에 놀라 응접실에 뛰어든 시녀와 조지 경은 그대로 굳어 섰다. 왕비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고, 그 앞의 후작 부인이 계속해서 자해를 하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지 콜튼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뭐지, 저 미친년은?

지젤은 계속해서 매섭게 손을 움직였다. 당장에, 가족들을 죽인 왕비를 때리지도 못하는 게 한스러운 만큼 지젤은 자신의 뺨을 내리쳤다. 하얀 뺨이 금세 붉게 부풀어 오르고, 그 입술이 터져 피가 맺혔다.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는데.”

“제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요.”

어느 정도 되었다 싶었는지, 손을 멈춘 지젤이 탁한 숨을 내뱉으며 왕비를 똑바로 마주 봤다.

“왕비님께서는 제 어디가 그리 미워서, 이리 때리셨습니까?”

정치에 무심하기는 했지만, 지젤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왕비는 후작 없이 절대로 혼자 왕궁을 굴릴 수 없었다. 다이한 후작은 황제의 먼 조카딸이라는 왕비보다 황국에서 인정받았으며, 이 왕국의 사람이었다. 오롯하게 황가의 피만 흐르는 왕비보다 더 설득력 있는 권력가였다.

“네가 이런 짓을 하면서, 기억을 잃었다 말해?”

지젤의 미친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왕비가 아직도 얼이 빠져있는 조지 경을 향해 손짓했다.

“당장 이걸 죽여 치워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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