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7)화 (17/135)

17.

다이한 후작은 눈을 뜨면, 항상 서재에 먼저 들렀다. 그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마다 서재에서 서신들을 골라내는 일을 하고 아침을 먹고는 했다. 답장을 빠르게 해야 할 것과 아예 무시할 것들을 구분하는 일이었다. 그건, 정말 간단한 일과 중 하나였다.

어두운 새벽, 복도를 걷는 다이한의 가뜩이나 표정 없는 얼굴은 어딘지 딱딱해 보이기까지 했다.

“크흠.”

작게 헛기침을 한 집사는 후작이 서재에 들어서는 걸 보며, 평소처럼 그를 따라 들어가는 대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다이한이 그런 집사의 태도에 의문을 가지기도 전, 그는 서재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자리 잡은 지젤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오셨어요?”

다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침이라 그런지, 살짝 부어있는 지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평소보다 더 탁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다이한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은쟁반에 서신을 가득 들고 있던 하인은 집사의 손짓을 따라 그걸 빠르게 지젤의 앞에 내려놓고 나가며 서재 문을 닫았다.

“이 새벽부터?”

정말로 이 아침부터 서로 진을 빼자고? 집사가 왜 지젤에게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관심 가지지 않은 다이한은 지젤이 그와 싸우기 위해 온 것이라 확정 지었다. 그는 항상 앉던 1인용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조용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침부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지젤은 이쪽을 가늠하듯 보는 그의 초록 눈을 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가 다이한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찻잔에 차를 따라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제 일 때문에. 혹시 오해를 하셔, 기분이 상하셨을까 염려돼서요.”

“왜. 아주 그럴듯한 핑계던데.”

덤덤한 목소리지만, 마치 그녀를 칭찬하는 듯한 조롱 섞인 어투였다.

“후작님께서 왜 저를 미워하시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저건, 무슨 독이 들었을까. 이제는 방향을 바꾼 건가? 자살에서 타살로? 하얀 찻잔을 가득 메우는 갈색 물줄기를 보던 다이한은 지젤이 계속 언급하는, 저 미워한다는 말이 어딘지 몹시 거슬려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다시 시작할 수는 없을까요?”

지젤의 푸른 눈망울이 그를 똑바로 마주하자, 다이한은 그대로 굳어 들었다. 그는 자신이 들은 문장을 한참 곱씹다가, 문득 지젤이 방금 깨물었던 그녀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붉은 입술이 건조해서 하얗게 터 있었다. 그는 이유 없이 그걸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감촉이 썩 유쾌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러고 싶었다.

“저희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하면 안 될까요?”

그 말에 누군가 그의 뺨을 툭 치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정신이 든 다이한이 눈살을 찌푸리고 지젤의 입술에서 눈을 떼어냈다.

“어떤 걸.”

“그냥, 여느 부부들처럼. 이렇게 서재에서 매일 차를 나눠 마시고. 같이 식사를 하고, 산책도 하고. 평범하게, 그렇게요. 저는 후작님께서 왜 저를 미워하시는지 몰라요. 그래서 감히 말씀드리는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을까요?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전부예요.”

제가 기억을 못 하는 것처럼, 없었던 일로 하고. 지젤이 퍽 용기 내 말하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이런 말을 웃으며 해야 하는 스스로가 싫어졌다.

“그렇게 평온하게 지내면 안 될까요? 제 얼굴 보는 것조차 싫으세요?”

지젤이 슬며시 찻잔을 다이한의 앞으로 가져다 놓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후작이 부정하거나 비꼬면, 이대로 울면서 뛰쳐나갈 생각이었다. 그럼, 저택의 사용인들은 이쪽으로 마음을 조금 더 틀지 않을까.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다이한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지젤의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가 그녀의 흰 목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는 게 불현듯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다이한은 처연하게 입꼬리를 끌어 내리고 있는 지젤을 보며 대답 대신에, 찻잔을 집어 들었다. 방금까지 독이 있을 거라 확신했던 그는 아무 말 없이 씁쓸한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그게 다였다.

그는 지젤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로 여느 때처럼 서신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지젤이 배시시 웃으며 미리 골라뒀던 책을 펼쳤다. 그녀는 다이한과 어떤 대화도 할 생각이 없었기에, 침묵이 묵직하게 둘 사이에 자리했다.

***

“사람이 생각보다 허술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침실 창가에 선 지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무언의 허락이 있고 난 뒤부터 지젤은 몇 주째 새벽마다 후작과 함께 서재에서 차를 나눠 마셨다. 되도록 같이 식사까지 하는 걸 봐서는 정말 이쪽 말대로 해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산책까지는 하지 않지만.

그녀가 선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저택의 입구가 분주했다. 아침을 먹었으니, 이제 왕궁에 가겠지. 나도 여길 나가서 백작을 만나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게 외출을 할 길이 없었다. 백작가는 여기서 꽤 먼 곳에 있으니까. 지젤이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차는데, 누군가 작게 노크를 하더니 조심스레 침실에 들어섰다.

“마님, 잠시 괜찮으실까요?”

지젤은 허락도 없이 침실에 들어서는 미아를 보고는 옅게 미소 지었다. 이 정도는 넘어가야지. 미아가 저택의 주방 뒤쪽에서 도축 중인 돼지 피를 몰래 구해오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후작에게 당할 뻔했으니까. 그 뒤로도 미아는 지젤의 시중 들기를 자처해 지젤이 생리를 하지 않는 걸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야?”

“저, 주제넘고 외람된 말이지만-. 후작님 배웅을 하시면 어떠실까요? 그럼, 더 가까워지실 것 같아서요.”

“배웅?”

지젤은 딱딱하게 굳어 드는 입가의 근육을 애써 이완시키며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그 전 주인댁에서는, 항상 배웅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이제 곧 왕비님 탄생일 축하 연회도 있잖아요. 그때 좀 덜 어색하실까- 싶어서요.”

괜한 말을 했나 싶어진 미아가 잔뜩 눈치를 보면서, 지젤의 표정을 살폈다. 귀족도 아닌 하녀 주제에 혹여나 건방지게 보였을까 두려웠다. 지젤이 그런 미아를 보며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무시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네. 후작님께서 외출을 하시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고마워. 날 생각해주는 사람은 정말 너밖에 없네.”

배웅? 조심히 다녀오라고 배웅을 해야 한다고. 지젤은 어릴 적, 아버지가 저택을 나설 때마다 주인 쫓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갔던 것들을 떠올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누가 먼저 아버지 뺨에 입 맞출 건지 여동생과 다투던 걸 회상한 지젤은 주먹을 꽉 잡아 쥐었다.

“지금 가서, 배웅을 해드려야겠네.”

미아는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지젤을 보며 배시시 웃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아는 지젤이 자신을 가장 가까이 두고, 믿어주는 것에 대해 묘한 충족감을 느꼈다. 불쌍하고 어여쁜 후작 부인이 믿는 유일한 존재라는 뿌듯함과 우월감은 쉽게 그녀의 판단력을 좀먹었다.

그녀는 후작이 지젤의 다정한 면모를 알면, 금방 그녀에게 마음을 열 거라고 확신했다. 그럼, 지젤의 생활도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고 미아는 믿었다.

***

저택을 나서려던 다이한은 2층 계단을 내려오는 지젤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계단을 하나씩 내려올 때마다 살랑거리는 주황빛 드레스는 소매가 흰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보다 하얀 그녀의 피부가 더 눈길을 끌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다이한은 지젤이 이곳에 와서, 옷 한 벌 맞추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구두도 마찬가지였다. 하얀 발을 감싸고 있을 구두의 뒷굽이 살짝 닳아 있었다.

“배웅을 해드릴까 해서요.”

작은 발로 계단을 다 내려온 지젤이 다이한의 앞에 당도하고는 누구보다 밝게 웃으며 설명했다.

“당연한 것인데, 제가 놓쳤던 것 같네요.”

지젤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저택 밖으로 나서는 다이한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바로 옆에 서니 후작의 커다란 키가 실감되었다. 남색 정복을 입은 그는 굉장히 각지고, 딱딱해 보였다. 저게 사람이기는 할까? 아니,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겠지. 지젤은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자신의 분노를 애써 무시하며 마차 앞에 선 다이한을 올려다봤다.

“이따 저녁에나 돌아오시나요?”

다이한은 그 또한 대답이 없었고, 집사는 어색한 분위기를 물리치고자 조용히 마차의 문을 열었다. 후작이 마차에 오르기 직전, 지젤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끌었다. 그 손길에, 다이한이 그녀를 향해 고개 돌리기도 전에 지젤은 행동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살짝 낮춰진 채로 기운 그 하얀 뺨에 조용히 입 맞추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 감촉에 놀란 다이한이 어정쩡하게 몸을 기울인 채로 굳어 들었다. 그의 표정에 드물게 의아함이 가득 들어찼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지젤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했듯이, 후작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가 얼굴을 굳혔다.

어쩌지, 옷이 다 구겨졌네. 그녀가 잡아 쥔 대로 구겨진 후작의 오른 어깨를 보며 지젤이 미간을 찌푸렸다. 티끌 없는 진한 남색 원단이 주름져 더 눈에 돋보였다.

“어쩌죠?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옷이 구겨져서는. 집사님, 이걸-”

“아, 제가. 제가 정돈하겠습니다.”

덩달아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던 집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이한을 향해 다가섰다. 후작 부부 내외의 사이가 안 좋아서, 난리가 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저런 애정 넘치는 배웅이라니.

“후작님, 일단 벗어주시면 제가 금방 다려진 새 옷을 가져오겠습니다.”

“놔둬.”

다시 냉정을 되찾은 다이한이 허리를 곧게 펴고는 집사를 향해 제지하듯 손을 들었다. 어쩐지 무안해진 지젤이 후작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이런 실수 없도록 할게요.”

그는 말없이 지젤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한쪽 눈을 찡그리고는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집사가 잽싸게 문을 닫자, 마차는 빠르게 출발했다. 마차가 덜그럭 소리를 내며 떠났는데도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숨죽이고 지젤을 바라만 봤다.

지젤은 그런 분위기를 쭉 훑어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기울였다.

옷이 구겨진 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 옷차림새에 결벽이라도 있나? 저 정도는 툭툭 털면 될 것 같은데. 아니, 옷이 구겨져서 기분이 상했다 한들, 비위 좋게 입술을 비빈 이쪽보다 기분이 더러울까.

미아는 가뿐한 걸음으로 저택에 들어서는 자신의 마님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뭐랄까, 자신의 주인은 이상한 면에서 대담하신 분 같았다.

다이한이 탄 마차가 완전히 후작저를 벗어나고 저택에 들어선 지젤이 다시 2층으로 올라가려는 그때, 집사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후작님께서 방금 떠나셨는데. 왕궁의 마차가 왜-”

그 소리에 지젤은 뒤돌아서며 멈춰 섰다. 왕가의 인장이 박힌 마차가 후작저에 들어서고 있는 게 한눈에 보였다. 지젤이 그걸 가만히 보다가, 미아에게 조용히 눈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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