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후작이 순순히 속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얼마나 터무니없겠어. 근데, 이쪽은 이렇게 바보 같은 일이라도 시작한 이상 천연덕스럽게 해내야 하니.
“예상은 하고 있었어요. 제가 여태 민폐만 끼쳤으니까요.”
누워서, 약만 축내었으니. 충분히 납득한다는 듯 눈시울을 붉힌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지젤을 내려다보는 다이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움받는 건, 네가 아니라. 다이한은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내가 널 미워하냐고?”
후작의 물음에 지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켜냈다.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반복하는 꼴이라니.
“거슬리지 않으시도록, 조용히 있겠습니다.”
무언가 포기한 듯한 지젤의 말에 다이한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검은 바지를 입고 있는 그의 긴 다리가 꼬아지는 걸 보며 지젤은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다이한이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젤을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지젤은 새삼스럽게 다이한의 신체 비율은 정말 봐줄 만하다는 생각을 하며 기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증명할 방법이 없는데, 믿지 못하신다니 죽은 듯 있는 수밖에요.”
다이한은 테이블에 올려진 지젤의 작은 손을 보며, 반대쪽으로 한 번 더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기억하지 못한다면.”
가죽 장갑을 끼고 있어, 체온보다 차가운 그의 손가락이 지젤의 손등을 가볍게 쓸었다. 그게 소름이 끼쳐서 그녀는 몸을 움찔 떨었다. 뭐야.
“인상 깊었던 우리 첫날밤도 전혀 아는 바가 없겠군.”
“첫날밤이요?”
“나는 그날이, 내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밤이 될 것 같은데.”
다이한이 옅게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지젤은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지금.
놀라서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는 지젤의 손을 다이한이 낚아채 잡아당겼다. 지젤의 몸이 휙 하고 다이한 쪽으로 당겨지며 의자가 드르륵 끌렸다. 그녀의 손을 우악스럽게 움켜쥔 다이한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가 얼마나 열렬했는지 다 기억하거늘.”
그 찰나가 잊히지 않아. 그가 이어서 한 말을 들으며, 지젤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얼굴의 근육에 잔뜩 힘을 줬다. 실상을 알고 있는 지젤은 그가 지금 비꼬고 있다는 걸 인지했지만, 그걸 티 낼 수가 없었다.
그가 꽤나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기에,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정말로 신혼부부의 열정적인 첫날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지젤의 얼굴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분노로 인해 저절로 붉어졌다. 지금, 해보자는 거지?
“후작님, 일단 놓아주세요. 잡힌 곳이 아파요.”
단호하게 말한 지젤이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다이한은 도리어 더 그녀를 잡아당겼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지젤은 앉아있던 의자에서 버티지 못하고 일어서야 했다.
“기억을 정말 못한다면, 재차 새겨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래도, 한 번뿐인 첫날밤인데.
“평생 모른다면, 너무 아쉬우니.”
다시는 잊지 못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다이한의 손이 손목으로 올라왔다. 굵은 손가락이 힘을 줘 그녀의 흰 손목을 감쌌다. 그의 손에, 지젤의 손목에 남아 있는 붉은 흉터가 가려졌다. 커다란 손에 자비 없이 잡힌 지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얼마나 세게 잡고 있는지, 피가 안 통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지금 이것들이 어쭙잖은 거짓말이 아니라면.”
협박. 다이한의 그녀를 직시하는 초록 눈을 마주한 지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매서운 눈이 그녀의 숨통을 확 조여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면 그야말로 어쭙잖아진다.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아픈 걸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다이한은 그런 지젤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줬다.
“그럼, 저녁에 내가 가도록 하지.”
내 침실에 오겠다고? 전형적인 상류층 귀족 가문답게 부부가 따로 침실을 쓰는 중이던 지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제 좀 내가 아는 얼굴과 비슷해지는 것 같은데.”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다이한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조금 혼란스러워 헤맸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믿을 필요가 없었다.
***
“쓰레기 같은 놈.”
그것도 환자를 상대로 당장 오늘 밤 그 짓을 하겠다고? 어떤 것이든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지젤은 후작의 아이는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한 번에 아이가 들어서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조금의 가능성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넘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일인지라.
“그건, 아이에게 못 할 짓이니까.”
그녀는 후작의 아이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다이한과 닮은 아이를 사랑해줄 마음이 생길 리가 만무했다. 그렇지만 당장 피임약을 구할 방법이. 지젤이 엄지손톱을 잘근거리며, 소파에 걸터앉아서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멍청이, 아프다고 더 드러누웠어야 하는 건데. 빨리 밖에 나갈 생각에-.
-똑똑.
조용한 노크 소리가 침실에 울리자, 지젤은 초조함을 능숙하게 감춰냈다.
“마님.”
미아가 뽀송뽀송한 이불을 한가득 끌어안고 들어서며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집사님께서 침대를 정돈하라 하셔서 왔는데. 지금 괜찮으실까요?”
“응.”
지젤의 허락에 그대로 침대로 걸어가려던 미아는 어딘지 처연해 보이는 지젤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저렇게 슬퍼 보이시는 걸까?
“마님, 혹시 어디가 편찮으세요?”
미아는 보기보다 많이 연약한 지젤이 걱정되었다. 그녀는 몸이 약한 지젤이 또 저녁 식사를 거를까 입을 열었다.
“그, 지금 저택 뒤에서 돼지를 잡고 있어요, 이따 저녁에 통으로 구울 생각인 것 같던데. 속이 안 좋으시면 다른 걸 준비하라고 미리 일러둘까요?”
“미아.”
지젤이 걱정스럽게 이쪽을 보는 미아를 보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괜찮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 대답에 미아는 이불을 소파 한편에 내려놓고 지젤의 앞에 살며시 무릎을 꿇었다.
“지젤 님, 주제넘은 말이지만 저한테는, 적어도 저한테는 아픈 걸 숨기지 마세요.”
미아는 뭐든 괜찮다고만 했던 자신의 친언니가 겹쳐서, 지젤을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겨우 한낱 하녀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미아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 크고 삭막한 저택에서, 이제 가족도 없는 지젤이 얼마나 무서울지. 그녀는 감히 이 여린 후작 부인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몸이 너무 안 좋은데. 그렇다고 후작님 말씀을 거절할 수도 없으니까-. 가뜩이나 미움받고 있는 내 주제에 어떻게 후작님을 거절해.”
지젤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푸른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자, 미아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불쌍한 마님.
“어디가 아프세요? 집사님께 말씀을 드려서, 의원을 부를게요. 후작님께서는 마님을 미워하지 않으세요. 그저, 원래도 묵묵한 분이신지라-”
“아니야, 나한테 아픈 걸 증명하라 하시던걸. 유산도 받은 게 없는 여자가 약값만 축내고 앉았으니, 얼마나 보기 싫으시겠어.”
“세상에, 어떻게 그런 말을.”
돈이 그렇게 남아도시는 후작님이 그런 말을 하다니. 미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리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귀족들은 다 그런 식으로 계산을 하는 건가. 아픈 본인이 제일 속상할 텐데. 아니, 가족들이 다 화재로 죽었으니 아파도 이상할 게 없는 분에게-. 지젤은 그런 미아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미아, 그냥 신경 쓰지 마. 네가 내 여동생 같아서, 내가 이렇게 쓸데없는 푸념들을 하고 마는구나.”
미아는 자신의 뺨을 부드럽고도 다정하게 쓸어 내는 지젤의 하얗고 가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지젤이 씁쓸한 표정으로 그 손을 떼어 내는 동시에 미아가 입을 열었다.
“마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지젤은 미아가 덥석 잡은 자신의 손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기울였다.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일단 오늘만이라도 홀로 쉬실 수 있게 도와드려도 될까요?”
그 말에 지젤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생각보다 순진하고 영리한 미아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
여느 때처럼 서류 더미를 집무실 책상에 쌓아두고 만년필을 움직이던 다이한은 집사의 말에 단답으로 짧게 대답했다.
“그래.”
“후작님, 그게 사실. 합방이라는 것이 마님의 몸 상태와 여러 것들을 살펴서 날짜를 받아 이루는 것인지라-.”
다이한은 그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집사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던 집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젤이 일부러 다이한을 피하는 게 아니라고 대신 변명을 하듯이. 그는 후작 부부 내외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원했다.
“월경이라는 것이 원래는 주기가 뚜렷하지만, 마님께서는 요 근래 워낙 몸이 안 좋으셨잖습니까. 하녀장에게 확인을 해보니 침대가 다 젖을 정도로-”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했는데.”
“앞으로 일주일은 합방이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계속-”
“보다시피, 내 양쪽 귀. 다 잘 뚫려있지 않나?”
알아들었다고. 다이한은 지젤을 대신해서 과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집사의 말을 무던하게 끊어내고는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감겨있던 검은 만년필이 툭- 하는 투박한 소리를 내며 책상 위를 굴렀다. 그걸 눈으로 쫓던 다이한이 헛웃음을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영민한 건지, 멍청한 건지.”
주어 없는 다이한의 말에 집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어떤 설명도 후작의 오해를 풀기 어려울 듯했다. 어쩌다 보니, 하필 그렇게 되었지만. 집사는 지젤에 대한 다이한의 불신이 생각보다 거대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원하는 바가 뭐인지만 알면 되는 건가.”
거짓말인 건 확인을 했으니까. 다이한은 어쩐지 좀 후련한 표정으로 다시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