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5)화 (15/135)

15.

뭐 하러, 나는 널 보러 오는 걸까. 그가 본인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감정을 정의할 수가 없었다. 그를 미워하는 꼴을 보자면, 이해할 수가 없어 속이 답답하고. 똑같이 그녀에게 갚아 주기 위한 뾰족한 말들이 절로 튀어 나갔다. 그걸 떠나서도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원래도 누군가의 기분이나, 감정 따위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네 행동이 이해가 안 가.”

다이한은 자신의 그런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그녀를 살렸고, 감사의 인사를 받아야 마땅했다. 지금 상황을 보면 피가 섞인 가족도 아니고, 그녀의 발목만 잡고 늘어지는 군식구들이었다. 게다가, 아무것도 아닌 그녀를 후작 부인으로 만들어줬으니까. 지극히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왕비에게 죽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그의 눈매가 싸늘해지는데, 지젤이 몸을 뒤척이다가 잠에서 깼다.

“후작님.”

지젤이 잠결에 그를 발견한 것처럼 눈을 비비며, 그를 부르자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한밤중에도 투명하리만큼 영롱한 푸른 눈이 살짝 찌푸려지자, 다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던 대로, 화를 내야지. 소리를 지르고, 원망하고.

“걱정돼서 오신 건가요?”

아무리 잠결이라지만, 예전의 낭랑한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는 탁한 음색이었다. 무언가를 긁어내기라도 하듯 끝이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근데, 그게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지젤이 입꼬리를 당겨 올려 웃으며, 그에게 묻자 다이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걱정?”

생소한 단어였다. 여태, 아무도 그에게 그런 말을 들먹인 적이 없었다.

“저택 분들께 들었어요. 여태, 제가 누워있는 동안 걱정되셔서 옆에 계셨다고.”

그는 그녀의 말에 입술만 달싹이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다물었다.

“후작님?”

지젤이 그런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걸 보면서, 다이한은 그대로 뒤돌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누가 보면, 도망이라도 치는 모양새였다. 근데, 익숙하지가 않아서는. 아니, 이상했다. 지젤이 그를 보고, 미소 지으며 다정하게 말을 거는 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의 어느 부분을 쿡 찔러내는 것 같았다. 그는 이게 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거였다. 그녀의 탁한 목소리가 그의 어딘가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차피, 기억을 찾으면.”

저게 거짓이 아니더라도, 기억이 돌아오면. 다이한은 아무도 없는 복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아득 물었다.

***

“왕비님께서 후작 부인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자신의 집무실 중앙에 선 사내를 보면서, 다이한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왕비의 수족인 조지 경이 슬쩍 그런 후작의 얼굴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후작님께서는 바쁘실 테니, 입궁하실 필요가 없다 하셨습니다.”

그 말에도 다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마음속이 복잡했다. 지젤이 그렇게 정신을 차린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저택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는 그게 수상하다고 느꼈다.

기본적으로 다이한은 그녀의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지젤이 정말 기억을 잃었다 한들 금세 되찾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사내를 바라보던, 다이한의 고개가 옆으로 틀어졌다. 2층 집무실 창문으로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정원에 앉아서, 하녀들과 조잘거리며 떠드는 지젤은 그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후작님.”

조지가 그를 재촉하듯 불렀다. 다이한은 그런 사내는 안중에 두지 않은 것처럼 지젤만을 내려다봤다. 정말로, 기억을 못 하는 걸까. 남작가에 가자는 소리도 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자고. 심지어 복도에서 이쪽을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를 하려 한다.

“후작님, 왕비님께서 직접 쓰신 초대장입니다.”

“내 아내가 몸이 좋지 못해서.”

다이한이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지젤을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입궁하지 못할 것 같으니, 죄송하다고 전하게.”

그는 차라리 지젤이 다시 기억을 찾았으면 싶어졌다.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연이어 떠오르는 감정들에 갈피도 잡지 못하고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심란할 수가 없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왕비님께서는 후작 부인이 꼭 입궁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내의 건방진 말에도, 다이한은 친절하게 말을 섞어줬다.

“그런데.”

짧게 말을 내뱉은 그는 정원에 앉아있는 지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렇게 무리를 해도 되는 건가? 오전부터 앉아있던 것 같은데.

“예?”

“왕비가 그러길 원하는데, 나보고 어찌하라고.”

사내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후작 부인이 저렇게 멀쩡히 다니는데, 몸이 아프다며 입궁을 거절하다니. 물론, 의원이 저택에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는 왕비의 뜻을 재차 전했다.

“왕비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사내가 경고하듯 엄중한 말투로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다이한이 시선을 돌렸다.

“말했다시피, 후작 부인께서는 심약하셔서 입궁하지 못할 것 같은데.”

“다이한 님.”

“굳이, 날 두고 입궁하라고. 그 속내가 훤히 보이는데 혼자 보내는 바보짓을 해라?”

다이한이 황당하다는 듯 눈썹을 까딱이며,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사내가 화들짝 놀라서 주절거렸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비님께서는, 친분이 두터운 후작님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셨기에. 대신 후작 부인께서 입궁할 수 있도록 초청하신 겁니다. 왜곡하지 마시옵소서.”

“그래, 나도 답하지 않았는가.”

심드렁한 말투로 중얼거린 다이한이 가벼운 손짓으로 책상 위의 초대장을 바닥으로 밀어냈다. 다이한은 왕비가 얼마나 질투심 많고 표독스러운 여자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속 보이는 장난에 놀아나 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내 아내는 남작가의 비극 이후로 몸이 좋지 못해 입궁하지 못한다고.”

그러고는 썩 꺼지라는 듯 손짓한 다이한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젤이 찻잔을 들고 미소 짓는 걸 보며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

“지젤 님, 보셨어요? 아까 왕궁 마차가 저택에 들어섰던데요.”

지젤은 생각보다 말이 많고 시끄러운 하녀들 때문에 슬슬 피로해졌다. 자신의 말동무를 해준다는 핑계로 일을 소홀히 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렇다고 기강을 잡기에는, 입지가 약하니까 참아야 했다. 지젤은 1층 창문을 닦고 있는 미아를 흘끔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누가 오든, 오다가 죽었든. 그러든가, 말든가. 금테가 둘러진 흰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지젤이 고개를 기울였다.

“왕궁에서 이번엔 무슨 용건일까요?”

“또 왕비님이 편지를 보내신 건 아닐까요? 근데, 이제는 후작님도 결혼하셨는데.”

한 하녀의 말에 모두들 동시에 지젤의 눈치를 살폈다. 지젤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미소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구나, 후작하고 왕비가. 귀족들이 배우자 외에 애인을 두는 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후작이 스물여섯이 되었고 왕비가 삼십 대니, 나이 차이가 좀 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사교계에서 흠도 아니었다.

이제야 유난히 지젤에게 과한 폭언을 내뱉던 왕비의 태도가 납득이 갔다. 지젤은 왕비에게 자비 없이 쥐어 잡혔던 머리카락을 가볍게 손으로 쓸어내렸다.

‘모자라고, 수준 낮은 계집이! 주제를 모르고, 결혼을 어찌해달라고? 누구를 약 올리려고-!’

귀를 찢어내는 듯한 왕비의 목소리를 상기시킨 지젤은 방금 그 말을 못 들은 척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가장 나이 많은 하녀가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얘가 쓸데없는 소리 하는 거니까, 지젤 님께서는 귀담아듣지 마세요. 윗분들 하시는 일이야 저희가 뭘 아나요.”

그 말에 지젤은 싱긋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랑 왕비가 뭐 하는 사이든 상관없었다. 그런 지젤의 옆에서 차를 따라주는 하녀들은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저택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사실 이 결혼은 지젤이 원하지 않던 것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참으로 이기적인 배려지. 정말, 지젤이 기억을 잃었더라면 감쪽같이 속고 있었을 터였다.

“원래도, 후작님 좋다고 서신을 보내는 영애들이 많았어요.”

“그럼요, 그런데도 큰 관심이 없으셨는데 갑자기 지젤 님을 데려오셔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너무 시끄러운데. 조용히 하라고 하고 싶지만. 냉정하게 사용인과 주인으로 선을 긋기에는, 아직 이쪽의 위엄이 안 서는지라. 찻잔을 들어 떨떠름한 홍차를 입에 머금은 그녀는 속으로 하품을 삼키려 애썼다. 그녀는 이 저택의 모든 것들에 정 붙이고 싶지 않았다.

“후작님께서 이쪽으로 오시는데?”

하녀 중에 한 명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다이한을 보고는 모두에게 눈짓했다. 지젤의 옆에 붙어 있던 네 명이 서로 눈치만 보는데, 다이한이 그들을 내쫓듯 손짓했다. 그 손짓에 그들은 무리 지어 있던 비둘기들이 놀라서 날아가듯 파다닥 흩어졌다.

“후작님.”

지젤이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다이한이 그런 그녀의 맞은편에 말없이 앉았다. 그에 지젤은 일어서려던 것을 멈추고 다시 의자에 자리 잡았다. 이쪽을 보는 매서운 초록 눈이 대단히 신중해 보였다. 아니, 마치 그녀의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듯 오만하게 고개를 까딱이는 게 건방지게 느껴졌다.

“하고자 하는 게 뭘까.”

“네?”

그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에, 지젤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다이한은 그런 그녀를 무표정하게 보며 금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색이 짙은 커다란 눈만 깜빡이는 걸 보자니, 속이 답답해졌다.

“증명해.”

지젤은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이 금발 머리를 쓸어 넘기는 걸 조용히 바라만 봤다. 증명을 참 좋아하네. 그놈의 증명.

“무엇을요?”

“네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증명하라고.”

“난데없이 아픈 걸 증명하라 하시니, 당황스럽네요.”

그의 말에 지젤은 입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다이한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대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대를 믿지 못하니.”

다이한은 그녀의 조잡한 연극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이전처럼 고집스럽게 굴면 힘으로 꺾어버리면 되는데, 지금의 이런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는 몹시 거슬렸다. 지젤은 후작의 침묵을 잠시 즐기듯 입을 다물었다가, 숨을 내쉬며 그를 올려다봤다.

“혹시 제가 후작님께 미움받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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