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서재에 앉은 다이한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카펫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갑자기, 저러는 것이. 그의 물음에 의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후작님. 크게 충격받으셨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눠보니, 본인이 누군지는 인지하고 계십니다. 지금 후작 부인께서는 열다섯 살 이후의 기억이 아예 없으신 것 같습니다.”
“기억이 없다고.”
“일단, 제가 간단하게 지금 상황을 설명해 드렸는데. 많이 놀라신 듯해서 드시는 진정제를 처방해드렸습니다. 후작님께서 천천히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6년 동안의 기억이 없다.”
굉장히 절묘하게, 그렇게 뚝 끊겼다고. 다이한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의원이 그런 그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종종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지젤 같은 경우에는 친정인 남작가도 불타서 가족을 잃었고, 자세한 사정은 모르기만 원하지 않던 결혼이어서 음독까지 했으니까. 우울증을 평소에도 앓고 있었고, 거기에 큰 충격을 연달아 받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다이한이 오른 주먹을 꽉 쥐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결혼이? 혹은, 남작의 죽음이? 아니면, 그 평민의 죽음이. 그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아득 물자, 의원이 잽싸게 말을 이었다.
“일단, 무조건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자극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하지 마시고. 처방해드리는 진정제를 꾸준히 드셔야 합니다.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니, 차차 지켜봐야 합니다.”
의원의 말에 다이한이 작게 한숨 쉬고는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그러면, 기억은.”
다시, 돌아오나. 다이한이 그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의원이 잠시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이다 말했다.
“금방 다시 기억하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당장 내일일 수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건, 장담드리기 어렵습니다.”
의원의 설명에 다이한이 턱을 매만지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젤이 그에게 웃어 보이는 걸, 처음 보는 것인지라. 그가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기억을 못 한다는 게.”
그게 거짓인지, 진짜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렇게 솔직하게 그의 뺨에 침을 뱉던 여자가, 가면을 쓴다 한들.
그렇게 생각한 그가 방금 지젤이 잡아 쥐었던 자기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다이한의 초록 눈이 가늘어졌다.
***
의원이 서재를 나서자마자, 쪼르르 따라붙은 집사와 하녀들은 그의 설명을 듣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 막 결혼한 후작 부인이 자살 시도에 이어 충격으로 기억까지 잃다니.
“좋은 음식이라든가, 따로 챙겨야 할 게 있을까요?”
윗사람을 능숙하게 모시려는 집사의 질문에 의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편하게 쉴 수 있게 해드리게.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오늘은 이만 가고, 약을 처방하러 또 올 테니. 모자를 고쳐 쓰며, 저택을 나서던 의원은 화려한 그곳을 흘끔 뒤돌아보고는 작게 몸서리쳤다.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자신의 마차에 오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피를 많이 보고 오른 자리라, 돌려받는 게지.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후작 부인만, 불쌍하게 되었군. 아무도 듣지 못하게 숨소리처럼 내뱉은 그는 그 찝찝한 곳을 빠르게 벗어났다.
의원이 떠나자 집사는 소란스러워진 하녀들을 단속했지만, 그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싸가지 없고 이기적이며 주제를 모르던 지젤의 행동에 대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어휴, 어린 마음에 집 떠나기 싫어서 그랬나 보다.”
“보통 귀족 가문들이랑 다르게, 가족들끼리 많이 돈독했던 모양이야. 그러니, 저렇게.”
아버지와 여동생이 한 번에 죽었으니.
“후작님이 아무리 훤칠해도, 애들은 부모 품이 더 좋을 수도 있지.”
“스물하나면 어른이지. 게다가 신분 상승 했잖아. 그럼 감사히 여겨야지.”
지젤에게 뺨을 맞은 하녀, 샤론의 뾰로통한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게,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가? 사실, 그렇지. 지젤은 어린애가 아니었으니까- 하녀, 하인들이 서로를 보며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들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마구간에서 말을 관리하는 청년이 고개를 내저었다.
“샤론, 마음을 곱게 먹어. 아무리 생각해도 불쌍하잖아. 그리고, 네가 말실수한 게 맞아.”
청년은 지젤이 잔뜩 부은 눈을 한 채로 맨발로 저택에 들어섰던 걸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후작님이 누구 달래주는 성격도 아니고, 모질게만 구시고. 위로해 줄 법도 한데.”
“그래, 귀족 아가씨가 저택 밖에서 뭘 해봤겠어? 갑자기 나가서 결혼하라니 서러울 수도 있지. 게다가, 이제 다시는 못 보잖아.”
“하긴. 아무리 후작 부인이라 해도. 나라님도 본인이 하기 싫으면 안 하는 법인데.”
“솔직히 그래, 우리 후작님께서도 다정하신 분은 아니잖아.”
“아까 진정제를 먹었으니, 지금은 일어나셨으려나? 뭐, 수프라도 가지고 가볼까?”
집사는 사용인들끼리 쑥덕거리는 걸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걱정했는데, 그래도 별일 없을 것 같았다. 나이 많은 집사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젤에게 머리채를 잡혔던 샤론만이 주먹을 쥐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결국에는 이것도 후작 부인이니까, 다들 이렇게 생각하고 넘기는 거였다. 결국에는 후작의 옆에 자리한 사람이니까. 샤론은 침대에 누워있을 지젤을 떠올리고는 그대로 주방 뒷문으로 나가버렸다. 후작님께 시집간 운 좋은 계집애면서. 그녀의 얼굴에 독기가 차올랐다.
***
지젤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하녀 2명을 보며, 양송이 수프가 가득 차 있던 그릇을 비워냈다. 먹기 싫은 걸 억지로 한 입, 한 입 먹어치운 그녀는 힘없이 그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지젤 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희를 편하게 부르세요.”
아직, 호칭이 이름이라. 중년의 하녀를 향해 티 안 나게 싱긋 웃은 지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난데없이 마님 소리를 들으려는 건 좀 욕심이기는 하지. 이쪽을 향하는 시선에 동정이 좀 섞이긴 했지만, 경계심이 엿보였다.
“나 때문에, 다들 정신이 없을 텐데. 고맙기도 해라.”
우선 이 저택에서 확실하게 자리 잡으려면, 기한 짧은 동정심이라도 이용해야 했다. 일단, 어리고 여린 후작 부인 좋겠지. 지젤은 빠르게 본인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죽은 왕비의, 그러니까 자신의 친모인 전 왕비의 외가와 만나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다이한의 의심에서 벗어나야 해.
“많이 놀라셨지요?”
지젤이 자기 전 먹을 진정제와 물을 챙겨주며 하녀가 물었다.
“아직도, 떨떠름하고 좀 어지럽네요. 게다가, 아버님과 여동생이.”
불현듯 슬픔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을 하다가 말고 입을 틀어막는 지젤을 보며 하녀들은 울상을 지었다.
불쌍한 아가씨.
그들이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측은하게 바라보는 표정이 확연히 보였다. 지젤이 푸른 눈을 촉촉하게 적신 채로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제 목소리까지 이렇게 낯설게 변해서는. 너무 실감이 안 나는데, 무서워서 제 눈으로 확인하러 가보지도 못하겠어요. 게다가, 제가 결혼을 했다니.”
“목소리, 그렇게 흉하지 않으세요. 정말로, 괜찮으세요.”
하녀가 애써 지젤을 위로하며, 그 등을 토닥였다.
“저, 후작님께서도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맞아요, 저택 밖으로 일을 보러 가실 때를 제외하고는. 지젤 님 옆에 꼭 붙어 계셨어요.”
개소리. 지젤은 그 말에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고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후작님께서도 많이 놀라셨을 텐데, 다정하시네요.”
다정? 낯선 단어에 두 하녀는 서로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후작은 까다롭고, 까칠하고, 매섭고, 날카로운. 하여튼 그런 단어들이 어울리는 사람이라. 다정은 좀.
“아, 아닌가요?”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듯 지젤이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하녀들이 퍼뜩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그, 든든하신 분이셔서. 지젤 님께 분명 힘이 돼주실 거예요.”
“그럼요, 기댈 수 있는 분이시랍니다. 무엇보다, 이 왕국의 후작님이시잖아요.”
그 말에 지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 지젤은 그 단어를 혼자 입 안에서 굴려 보고는 하녀들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허리까지 오는 지젤의 붉은 머리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노을에 주황빛으로 반짝였다. 그 강인한 사람이 무너지는 걸 보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뭐든 할 수 있었다. 이런 조잡한 연극도 기껍게 해낼 수 있었다.
***
징징거리는 왕비를 만나고 왕궁에서 돌아온 다이한은 본인의 침실로 들어서려다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이 지젤의 침실임을 눈치챈 집사는 하인들을 물렸다. 이상하게 후작은 지젤과 독대하는 걸 좋아했다.
다이한은 노크도 없이 그녀의 침실에 발을 들였다. 아내의 침실에 거침없이 들어선 그가 입고 있는 흰색 정복에 달린 금속 장식들이 유난히 큰 소리를 냈다. 침대 옆에 선 다이한의 그림자가 지젤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러자, 다이한은 조용히 한 발 물러섰다.
가까이 서면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물렸다. 다이한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푸르게 물든 지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무슨 속셈일까.”
그가 잠들어있는 지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서 얻는 게 뭘까. 그건, 지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다. 지젤의 하얀 피부와 붉은 머리카락이 대조되어 어둠 속에서도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침대 옆 협탁에 켜놓은 촛불만이 그 방 안의 유일한 빛이었다.
“으음.”
무언가 불편한지 몸을 뒤척이는 지젤을 보며, 다이한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는 본인이 지젤에게 원하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작게 생각나는 대로 속삭였다.
“이제는 목소리도 잃은 마당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