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3)화 (13/135)

13.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귓가로 드문드문 들리는 목소리가 누워있는 그녀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지젤은 눈을 뜰 수 있음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아까, 기절했다가 이제 깨어난 건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장례식은. 장례식도 못 가고-

“그- 워낙 독한 독을 다량 섭취한 데다가, 독을 중화시키려고 억지로 집어넣은 약에 성대가 많이 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척 듣기에도 난감해 보이는 나이 든 의원의 목소리에 지젤은 조용히 직감했다. 이제 노래는 부를 수가 없겠구나. 그녀는 덤덤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정도 고통은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다음 말을 재촉하는 후작의 고요한 음성이 들리자, 지젤은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목소리마저도 듣고 싶지 않아.

“말을 못 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근데, 그것도 일어나보셔야 알 수 있지만. 그, 목소리가 예전하고는 많이 달라져 있으실 수도 있습니다.”

“의원이라는 작자가, 고작 한다는 게 어쭙잖은 짐작들뿐이다.”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 짓는 소리에 의원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변명했다.

“후작님. 그게, 후작 부인께서 일어나셔야 진찰을 하는 것인데. 여태 일어나시질 못하고 계시니 저로서는-”

“되었으니 나가.”

그런 말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후작의 차가운 축객령에 의원이 짐을 챙겨 일어서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에 울려 퍼졌다. 잠시, 주저하던 의원이 숨을 들이마시며 조심스럽게 후작에게 조언했다.

“후작님, 부인께서 쓰러지신 지 벌써 3일째인데. 끼니를 챙기셔야 합니다. 안색이-”

“내, 나중에 다시 부를 테니.”

후작이 말을 다 잇지 않았지만, 그 뜻을 아는 의원은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짤막하고 냉담한 말투에는 짜증스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지젤은 후작과 의원의 대화를 들으며, 본인이 이렇게 누운 지 꽤 되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장례식은 이미 끝났다 했고, 거기에 3일을 더하면. 그러면, 이제 죽지도 못했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지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지젤은 아버지의 단호한 어투를 떠올리며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언니랑 나는 눈이 되게 닮았다? 근데, 내가 더 예쁜 거 알아?’

거울을 보며, 장난스레 재잘거리던 이엘리야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지젤.’

미하엘이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어 보이던 게, 눈을 감았는데도 아른거려서.

그녀는 억울해졌다.

억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피도 섞이지 않은 저를 데려다 키운 아버지의 비참한 끝이.

제대로 피워내지도 못하고 져버린 꽃 같은 동생의 죽음과 마지막에 상처만 주고, 결국 저 때문에 덧없이 사그라져버린 미하엘이. 그 모든 걸 잃은 그녀는 원통했다.

그녀의 안을 가득 메우던 무력감과 슬픔이 녹아버리고, 뚜렷한 분노가 그 자리를 메꿨다. 이 아픔의 절반만이라도. 아니, 두 배. 세 배만큼 갚지 않고서는 속이 문드러져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안일하게 죽음으로 편해지고자 했던, 본인이 부끄러워졌다.

과분하게 죽을 생각을 했다니.

그녀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똑똑하게 굴어.

지젤이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되뇌었다. 그녀는 가진 것이 없었고, 손에 쥔 것이 없었기에.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 깊게 고심하고, 결론 내렸다. 신중하게 결정 내린, 그녀는 본인을 죽여버리기로 마음먹었다.

***

다이한은 미동도 없이 누워만 있는 지젤을 보며,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미련하게.”

멍청하게. 조용히, 순순히 따르면 될 것을. 악을 지르며, 그를 그렇게 미워하고 원망한다. 결국, 목소리까지 잃었으니. 그가 느끼기에는 말 그대로 미련했다. 힘에 순응하는 것이 뭐가 그리 싫을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서. 이름마저도 없는 공주는, 사실 쓸모도 없었다. 다이한은 그런데도, 이렇게 그녀의 옆을 지키고 서 있는 본인이 못 견디게 싫어졌다.

“아.”

지젤이 숨을 토해내듯 입을 벌리자, 탁한 목소리가 그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뜬 지젤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 푸른 눈동자가 정확하게 그의 시선과 겹쳤다. 다이한은 그녀가 이번엔 어떻게 죽으려 들까 싶어져 눈썹을 까딱였다.

“어, 여기가-”

본인의 목소리에 다소 놀란 듯 입을 틀어막은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며 눈을 깜빡였다. 어딘지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커다란 눈을 보며 다이한의 입꼬리가 어그러졌다.

“이제 평생, 그 목소리로 살아야 할 테니. 익숙해지도록 해.”

그가 신랄하게 비아냥거리며, 그녀를 매섭게 쳐다봤다.

“네가 자초한 거니까.”

누가 독을 먹인 것도 아니고.

“네가 네 손으로 들이부었으니.”

다이한이 책임감을 느끼고 그리 살라며 말도 안 되는 말로 그녀에게 화를 냈다. 그의 심기를 헤집어놓은 만큼 그녀도 아프기를 바랐기에. 그런데도 지젤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꼴 보기 싫어하더니, 이제는 말도 섞기가 싫어?”

“네?”

그의 공격적인 어조에 그녀가 놀란 듯 되묻는 말에, 다이한의 보기 좋은 미간이 주름졌다. 그가 입을 열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지젤의 붉은 입술이 먼저 열렸다.

“누구세요?”

“뭐?”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죠?”

그녀의 목소리는 확실히 이전보다 낮았고, 끝이 이리저리 갈라진 듯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어, 목소리가.”

지젤이 방금 본인 음성에 놀란 듯 또 토끼 눈을 뜨고 눈을 끔뻑이자, 다이한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일까.”

어디냐고? 그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으며, 건조해 찢어진 본인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제가 뒷산에 갔던 건 기억을 하는데. 아, 그러니까. 혹시 도와주신 건가요? 근데, 제 목소리가 왜.”

“뭐?”

“그, 여기가 어디고. 누구신지 여쭤도 될까요? 제가 기억이 안 나서-”

그녀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주절거렸다. 다이한의 표정이 점점 더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을 꾸미려고?”

그가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고 혀를 차고는, 고개를 저었다. 피곤한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하는 말에 지젤이 정말 곤란한 듯 침대에서 내려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일단 저희 아벨린 남작가에 연락을 좀-”

바닥에 맨발을 디딘 그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다이한이 반사적으로 일어서서 그런 그녀를 받아 들었다. 자연스레 그녀가 그의 품에 폭 안겨들었다. 다이한은 곧이어서 지젤이 본인을 밀쳐낼 거라고 예상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지젤은 그의 오른 팔뚝을 부여잡고 어지러운지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다이한은 그것도 찰나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고개를 든 지젤은 손을 떼기는커녕 눈까지 휘어 보이며 그에게 웃어 보였다.

“감사해요, 어지러워서는.”

그녀의 붉은 입꼬리가 호선을 그으며 올라가고, 뺨에 푹 파인 보조개가 한눈에 담겼다. 푸른 눈이 그를 보며 호의적인 웃음을 담아내는 것에 다이한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그녀가 그를 향해 웃어주는 걸 처음 봤기에.

“아, 제가 실례를 범했네요.”

지젤은 그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는지 다이한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빠르게 떼어내고 뒤로 물러섰다. 다이한이 그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봤다. 마치 짐승이 먹잇감을 살피는 듯한 태도였다.

“진정, 미친 건가.”

그가 덤덤한 어투로 중얼거리는 말에도 지젤은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마치,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죄송하지만, 혹시 누구신지-”

“누군지 모르겠다?”

그녀의 말을 끊어낸 다이한이 그게 거짓인지, 아닌지 알아내려는 듯 그녀의 얼굴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훑었다. 그 눈길에 놀란 지젤이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마주 보기만 하자 다이한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가 의심을 거두지 않은 눈길로, 끝까지 그녀를 살폈으나 얼굴만 보고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쓸데없는 장난 집어치워. 의원을 불러올 테니까.”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귀찮게 만들지 말고. 다이한이 지젤의 어깨를 힘으로 눌러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그가 돌아서는 순간 지젤이 그의 오른손을 잡아 쥐었다.

“그, 아벨린 남작가에 사람을 한 번만 보내주시면.”

다이한은 그대로 멈춰 서서, 그녀가 잡은 자기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저희 아버지가 오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무슨 상황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거든요.”

지젤이 정말 난처한 듯 중얼거리는 말들이 다이한의 귓가를 스치기만 했다. 그의 손등에 감겨있는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부드럽고 따듯한 손바닥의 감촉에. 다이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말 약한 힘이었는데, 그는 그걸 떨쳐낼 수가 없었다. 다이한의 경직된 몸과 놀란 듯 살짝 크게 뜬 초록색 눈을 본 지젤이 화들짝 놀라며 그의 손을 놓아줬다.

“아, 죄송해요. 마음이 급해서.”

그녀의 사과에 다이한은 입을 벌렸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다물었다. 잠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그는 이내 빠르게 침실 밖으로 나와 의원을 찾았다.

침실 문이 닫히자, 방금까지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지젤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믿으려나.”

스스로 생각해도, 팔뚝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터무니없고 얄팍한 연기였으나. 이 저택에서, 지젤 아벨린은 경계해야 하는 인물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는 지젤 다니엘이 되어야 했다. 아예, 멍청하게. 모자란 듯 스며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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