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2)화 (12/135)

12.

“위로의 말?”

지젤은 귀에 이명이 들리다 못해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

가증스럽게, 지금.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지젤이 다이한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미아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지젤 님!”

그녀가 그의 목을 조르는데도 다이한은 넘어지기는커녕 미동도 없이 서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약속했잖아.”

가녀린 손이 그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다이한은 작게 헛기침하기는 했지만,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약속했잖아! 네가 네 입으로! 내가 혼인만 하면, 건드리지 않겠다고!”

“순진하게, 왕비가 남작을 정말 살려줄 거라 믿었다고?”

“뭐?”

그의 목을 움켜쥔 그녀의 손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며 다이한은 가볍게 그녀를 밀어냈다. 지젤이 힘없이 뒤로 밀렸다. 다이한은 그녀의 푸른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어린 왕자님 가시는 길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데. 살려줄 리가 있나.”

“아, 내가 순진하게 속았다?”

지젤이 어이가 없어서 소리 내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도 안 가는데. 아니, 그럼 내가 뭐 하러.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지체 없이 다이한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빼내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당연하게도 그가 더 빨랐다. 그는 그녀에게 검을 내어주지 않았다.

지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주먹으로 그의 뺨을 후려치려 했으나, 그마저도 다이한은 가볍게 막아냈다. 그가 지젤의 양 손목을 꽉 움켜쥐자 그녀가 그를 발로 걷어찼다.

“후작님!”

집사와 하인들이 지젤을 떼어내려 하자, 다이한의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손대지 말고, 나가.”

그 한마디에 모두 주춤거리더니, 침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다이한은 바둥거리는 지젤을 침대 위로 짓눌러 눕혔다. 지젤이 그런 그의 뺨에 침을 뱉었다.

“이 개 같은 새끼.”

“내가 황국의 개인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새삼.”

그런 욕은 아프지도 않아. 다이한은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뺨에 묻은 그녀의 침을 닦아내며 눈썹을 까딱였다.

“남작가에서 사용인을 제외한 시신이 세 구가 나왔는데.”

지젤이 입 안의 살을 짓씹는 걸 보며, 그는 곧게 뻗어있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면서도 멈추지는 않았다.

“하나는 차림새가 누가 봐도 남작이고, 나머지는 그 어린 딸. 그리고, 신원 미상의 흑발 남자.”

“아-”

지젤은 지금 다이한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미하엘.

방금까지 분노만 가득했던 그 얼굴에 슬픔이 차오르는 걸 보면서 다이한은 낮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미련 버려.”

다 끝났으니까. 다이한이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에 입을 맞추기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가, 닿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지젤이 초점이 흐려진 눈을 한 채로 숨을 헐떡이는 걸 보면서, 다이한은 지젤의 손목을 놓아주고 아예 몸을 뒤로 물렸다. 그는 이 광경이 저번과 또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매일 반복될지도. 그 생각에 그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이럴 거면 왜? 왜, 그런 약속을 한 건데? 결혼은 대체 왜 한 거야?”

애초에, 다 죽이면 끝나는 일을. 그녀는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조잡한 이유라도 듣고 싶었다. 왕비와 후작이 친황국파로 같은 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왕비가 처음부터 이렇게 끝을 낼 생각이었다면, 그걸 저 파렴치한 놈은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텐데.

“다 죽여버렸으면, 처음부터 그랬더라면 차라리.”

어차피 다 죽을 이야기였다면, 상처 주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에 그런 사람으로 남지 않았을 텐데. 지젤은 본인의 이기심이 소름이 끼쳤지만, 후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끝은 미하엘과 함께했을 텐데.”

그 말에 다이한이 그대로 숨을 멈췄다. 누구랑 끝을 같이하겠다고? 그가 주먹을 꽉 쥐고는 그녀에게 앞으로 있을 일을 상기시켜줬다.

“안타깝게도, 너는 죽어도 후작 부인으로 죽을 텐데.”

그의 말에 지젤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 기이한 집착의 발단조차 궁금하지 않았다. 명백한 그녀의 비웃음에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단숨에 지젤의 양어깨를 잡아 쥐어흔들었다.

“결과적으로, 널 살려줬으니. 감사하다 해야지.”

하기 싫었던 결혼이었다 한들. 지젤이 지금 살아 숨 쉬는 건, 그 불타 버린 저택이 아닌 여기 이 후작가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네가 날 살렸다고?”

나만 미친 게 아니고, 그 잘나신 후작님께서도 정신을 놓으신 건가? 지젤은 웃으면서, 우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당장에 눈앞에 있는 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과 그냥 이대로 죽고 싶은 마음이 충돌되어서 그의 말은 귀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럼, 왕비가 순순히 알겠노라 넘어갈 줄 알았나? 네가 지금 숨이 붙어 있는 이유가 후작가의 사람이기 때문임을 몰라?”

다이한은 그 총명하고 똑똑한 지젤이 왜 이렇게 무지한 사람처럼 구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런 그의 초록색 눈을 똑바로 마주한 지젤은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날 살렸다?”

살려줬다고, 살게 해줬다고. 이게? 지젤이 실성한 사람처럼 입까지 틀어막고 웃었다. 그에 다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지젤은 지금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보였고, 그렇다면 그는 이 이상으로 무언가 설명하기 위해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대로 그녀에게서 뒤돌아 침실을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다이한이 문손잡이를 잡아 돌려 침실을 나서기 직전 지젤은 어제부터 치마폭에 꼭 숨겨두었던 푸른빛이 도는 작은 약병을 입에 물었다. 이럴 거면, 아프게 손목을 그어낼 필요가 없었는데. 한 모금 정도 되는 약을 단숨에 삼킨 그녀가 그의 얼굴 옆으로 유리병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작은 유리병이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흩어짐과 동시에 지젤은 침대 위로 널브러지듯 쓰러졌다.

“네 뜻대로는 안 되겠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처음부터, 저 교묘한 인간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다이한이 바닥에서 빛을 내는 유리 조각을 보고 휙 고개를 돌렸다. 그가 고함을 지르다시피 소리를 질렀다.

“지젤!”

지젤은 그걸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바스러져, 그녀는 본인을 편하게 하고자 모든 걸 놓아버렸다. 그녀는 그 순간이나마, 드디어 안식을 얻었다고 믿었다.

***

정말 안타깝게도 그 안식이라는 건, 굉장히 찰나였다. 기절한다는 건, 정말 눈 한번 감았다 뜨니 끝나있었다. 민망할 정도로 순식간이네. 적어도 기절한 당사자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은 아니었다.

눈을 뜬 지젤은 화려한 침실을 확인하고는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옆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이쪽을 말없이 내려다보는 다이한을 보고는 다시 외면하듯 눈을 감았다.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다시 이대로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으며, 하나뿐인 동생 이엘리야가 그리웠다. 죽었다고? 미하엘의 다정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근데, 그 모든 게. 다 자신 때문에 불에 타버렸다니. 그 이유마저도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왕의 혈육이기 때문에, 모두가 덧없이 죽고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게 길거리 희극 같았다.

“죽지 못해 아쉬운가 보지?”

그녀의 속내를 꿰뚫은 그가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분노로 가라앉은 초록 눈이 이쪽을 보지도 않는 지젤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다행스럽게도, 바로 의원을 불러 독을 중화시켰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로 죽을 뻔했다. 다이한은 지젤이 생각보다 순진하다는 사실이 짜증스러웠다.

남작은 지젤이 왕족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살려둘 리가. 그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친부모도 아닌데 이렇게 괴로워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여동생에게 정이 붙었던가. 아니면, 역시 그 평민이 원인인가.

“장례식은 조용히 마무리했으나, 신원 미상의 시체는.”

그의 말에 지젤이 눈을 뜨고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걸 본 다이한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글쎄, 산 어디에 묻었다던가. 버렸다던가.”

이! 지젤은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욕을 하기 위해 소리를 질렀으나.

“하.”

지젤은 기껏해야 숨소리만 거칠게 튀어나오는 자기 입을 움켜잡았다. 고개 숙인 지젤이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푸른 눈을 들어 다이한을 올려다보자, 다이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가 지젤의 턱을 들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젤은 목에 힘을 줘 말을 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목에 힘을 줘도 흘러나오는 건 탁한 숨이 전부였다. 목소리가 안 나와. 말이, 목소리가. 그걸 확실하게 깨달은 지젤의 몸이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떨렸다. 놀란 다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음과 동시에 그녀가 그의 손을 매섭게 내쳤다.

“지젤.”

지젤은 계속해서 말을 해보려고 애를 썼다. 목에 핏대가 서도록 힘을 주는데도 흘러나오는 건 바람 소리가 전부였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챈 다이한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의원을 불러!”

다이한은 자기 목을 움켜쥐고 몸부림을 치는 지젤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기다려, 별거 아닐 테니까. 지젤, 가만히!”

별거 아니라고? 말이, 목소리가 안 나오는데. 별게 아니라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소리를 지르려 애쓰던 그녀는 그대로 까무러치듯 기절했다. 그 모든 게, 맨정신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지젤은 본인이 다시 눈뜨지 못하기를 빌었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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