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니, 이 비싼 고기를 줘도 안 드시니. 주방에서 이걸 다져서 볶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요.”
지젤의 팔다리를 하나씩 쥐고 있던 하녀 중 하나가 투덜거렸다. 지젤은 말 그대로 억지로 벌려진 입에 들어온 다져진 고기볶음을 혀로 밀어냈다. 그리고 온 힘 다해 발버둥 쳐봤지만, 마음먹고 달려든 하녀 다섯 명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좀! 가만히 드세요. 할 일도 많은데,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 저희 입장도 생각을 해주세요.”
후작의 말을 전해 들은 집사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 지젤에게 뺨을 맞았던, 샤론은 침실 근처도 얼씬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나머지 하녀들이라고 지젤에게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았던 터라 그들은 지젤을 과격하게 다뤘다. 자진해서 들어선 몇몇 하녀들은 그녀가 하녀에게 무자비하게 손찌검한 것과 젊은 후작을 차지한 것에 대한 질투심에 분노를 쏟아냈다.
“아무리 그래도 마님께- 그만해!”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미아가 지젤의 입에 억지로 식기를 밀어 넣는 하녀를 말렸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아, 너. 노인네한테 시집갔다가 죽은 네 언니 생각나서 그렇지? 이건 경우가 달라.”
“아우, 내버려 둬. 지젤 님, 이번에도 뱉어내시면 곤란해요. 주방장이 더는 새 음식을 내어드릴 수 없다고 했다고요.”
“지젤 님도 바닥에 떨어진 걸, 다시 먹기는 싫으시잖아요?”
지젤은 하녀들조차 자신을 이렇게 하대하다시피 하는 이 하극상이 기가 막혔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팔다리가 꽉 눌려서 헛구역질이 일 정도로 집어넣는 다져진 음식을 씹지도 못하고 입에 물고 있었다.
“빨리 삼켜내세요!”
하녀 중 하나가 언성을 높이며 지젤의 코를 틀어막자, 지젤은 억지로 입 안에 담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지젤은 그 구역질 나는 상황 속에서 후작가가 정통 귀족 집안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자작의 사생아 출신이라고 했던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작위를 받고 새로 꾸린 저택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물론, 그 이유에는 나도 포함이 되겠지만.
“그만! 그만해, 너희 도를 넘고 있어. 집사님께 말씀드릴 거야.”
미아가 더 이상 못 봐주겠다며 그대로 침실 밖으로 뛰쳐나가자, 다른 하녀 중 하나가 그 뒤에 대고 큰소리쳤다.
“미아, 너 정신 차려! 음식이 남으면, 후작님께서 우리를 벌주신다고 했잖아!”
“지가 벌 다 받으려나 봐. 쟤도 웃기는 애야.”
“착한 척 엄청나게 한다니까? 자, 지젤 님. 마지막 한 숟갈이에요.”
지젤은 억지로 음식을 삼켜내는 그 곤욕을 치르면서도, 제 손으로 밥을 먹을 생각이 없었다. 그가 그녀를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몰수록, 그녀는 더 수그리고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그게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
“저택 안에, 다른 사람도 함께 있는 것 같은데 어찌할까요?”
초라하다 못해 녹이 슬어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 철문 앞에 선 마차는 배경과 상반되게 고급스럽고 값비싸 보였다. 마차 안에서 창문을 통해 아벨린 남작가의 입구를 올려다본 다이한은 다리를 꼬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저택의 입구를 지키고 선 철문은 오래되고 역사가 깊어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낡아 제 역할조차도 해내지 못하는 의미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
“예, 남자가 한 명 같이 있습니다. 차림새를 보니 평민인 것 같은데. 일단 창문과 출입구는 다 막았습니다.”
“미하엘.”
반사적으로 떠오른 이름을 입에 담은 다이한을 보며 기사가 눈을 끔뻑였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예?”
평민.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다이한은 자신의 충직한 기사 한센을 보며 물었다.
“흑발이던가?”
“예, 맞습니다. 안에서, 지젤 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언성이 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일단, 나갈 때까지 기다릴까요?”
일이 쉽게 풀리네. 굳이 찾아 나설 필요 없게, 이렇게 한곳에 모여 있다니. 다이한은 확실히 들어가서 확인할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안에 들어서면 피를 보게 될 텐데,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남작가가 완전히 전소되고 나면, 왕비는 더 이상 지젤을 건드릴 명분이 없었다. 지젤 본인의 말처럼, 그녀는 이제 증인도 없어 증명이 어려운, 공주일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게다가, 이제는 후작 부인이기까지 했다.
다이한이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있자, 한센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보탰다. 그는 답지 않게 자신의 후작이 주저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무덤덤한 표정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조지 경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왕비께서 확인차 보내신 것 같은데.”
그의 재촉 아닌 재촉에 다이한은 고개를 기울이고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정리해.”
다이한은 왕비가 지젤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합리적인 일을 행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예, 후작님.”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이는 한센을 보던 다이한은 그대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붉은색 마차가 그 조용하고도 외진 곳을 떠나자, 저택은 곧 방금 떠나간 그 마차의 색처럼 붉게 물들었다. 한센의 손짓에 움직인 수족들이 조용하고도 빠르게 움직였다. 목조로 된 고택은 삽시간에 불길에 먹혀들었다. 저택 안에서 미약하게나마 비명이 들렸지만, 그 주위를 지키고 서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응답해주지 않았다.
화염에 휩싸여 순식간에 불타오르는 그 저택을 다이한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지젤과 그들이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
“불쌍한 지젤 님.”
미아가 코를 훌쩍이며 지젤의 입가를 닦아내자, 침대에 힘없이 누운 지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미아는 지젤의 여동생인 이엘리야와 동갑이나 될까 싶을 만큼 어렸다.
“몇 살?”
난데없이 나이를 묻는 말에 미아가 잠깐 눈만 깜빡이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저, 저 이제 스무 살이요.”
“내 동생이랑 동갑이네.”
그 덤덤한 말에 울컥, 미아가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하녀들의 손톱자국이 남은 지젤의 팔을 쓰다듬었다.
“후작님께, 후작님께 말씀을 드리면, 다들 가만두지 않으실 거예요. 아무리 두 분 사이가 안 좋다 해도, 이건 잘못되었어요.”
미아가 집사를 불러와서 상황이 정리되고, 이제 지젤의 식사 시중은 미아가 혼자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제는 억지로 먹어야겠네. 미아가 벌 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지젤은 작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내버려 둬. 나는 이게 차라리 편해.”
“그래도, 그래도요! 다들 너무해요.”
지젤은 자신 대신 화를 내는 미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갈색 머리와 흑갈색 눈동자가 평범해 보였다. 스무 살보다 어린것 같은데. 하얀 볼 위로 올라온 주근깨 탓인지, 미아가 말하는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다.
“언니가 있어?”
아까 하녀들이 했던 말들을 흘려듣지 않은 지젤의 질문에 미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괜찮아.”
나도 하기 싫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녀의 말에 미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젤에게 물이라도 한 잔 드시겠냐 묻기 위해 침대 옆에서 일어섰다.
“지젤 님!”
나이 지긋한 집사가 침실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그의 흰머리만큼이나 허옇게 질린 얼굴을 보면서, 지젤은 힘없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이번엔, 왜?
“지젤 님. 그게. 그, 그러니까.”
집사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을 감았다 뜨기만을 반복했다. 어딘지 모자라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에 지젤이 먼저 메마른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저녁, 제 손으로 먹을 거예요.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아벨린 남작가가-”
힘없이 바닥을 내려다보던 지젤이 번쩍 눈을 매섭게 뜨고 집사를 쳐다봤다.
“남작가가 왜.”
방금까지와 다르게 힘 있는 목소리에 미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지젤은 그쪽에 눈길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집사의 앞까지 단숨에 걸어가 그의 양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내 친정이 왜?”
“저택이 불에 타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지젤 님, 일단 차분하-”
지젤은 집사의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았지만, 뒷말은 듣지 못했다. 귀를 찢어내는 이명 소리에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불에 탔다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는 건. 그건, 그럼 아버지는? 이엘리야는? 내 동생, 이엘리야는?
“거짓말.”
지젤은 당황한 집사가 뭐라 뭐라 말을 하고 있다는 건 눈으로 보아 알았지만, 말이 들리지 않아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들리지 않는 건지, 듣고 싶지 않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를 움켜쥐고 뒷걸음질 치며, 계속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약속했는데. 아니야.”
“후작님!”
집사가 저택으로 돌아온 다이한을 부르는 말에 지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침실 문 앞에 선 다이한이 검은 정복을 입은 채로 넋이 나간 지젤을 내려다봤다. 지젤은 다이한이 입고 있는 복장이 장례식에서 입는 옷이라는 걸 알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거짓말.”
왜 옷을 그런 걸. 말도 안 돼. 지젤은 본인이 진정 미쳐서 망상증에 걸려서, 환각을 본다고 생각했다. 현실감을 잃어, 발이 땅에 닿고 있음에도 닿지 않은 것 같았다.
“불에 탔다고?”
그걸 믿으라고? 그 말을 끝마친 지젤이 다이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눈치 빠른 집사가 잽싸게 그런 그녀를 잡아 말렸다.
“지젤 님!”
“갑자기 그냥 불에 탔을 리가 없잖아.”
지젤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다이한을 보며 말하자, 다이한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금발이 허공에서 살랑였다. 그가 지젤을 붙잡고 있는 집사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놔.”
집사가 물러서라 손짓하는 후작을 보고는 그대로 지젤을 내려놓고 뒤로 빠졌다. 지젤은 숨을 가다듬으려 애쓰다가, 이내 집어치웠다. 지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조각상을 다이한을 향해 집어 던졌다.
“꺄아!”
놀란 하녀가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다이한은 평온해 보였다.
다이한은 지젤이 온 힘 다해 던졌지만, 무게 때문에 그의 근처도 오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난 대리석 조각상을 보며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지젤은 그런 다이한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개소리인지, 설명해.”
“원인 모를 화재로 남작가가 불타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비보를 전하러 왔는데.”
이미 알게 된 것 같으니. 다이한이 차분하게 금발을 뒤로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참 슬픈 일이야. 내 아내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는 전혀 슬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젤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일순 침착해졌다.
죽었다고? 남작가가 불타서, 내 아버지와 여동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