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9)화 (9/135)

09.

지젤을 빤히 내려다보던 다이한은 그럼, 이건 나름 타당하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사에게 물었다.

“후작 부인을 편안하게 모시라 했는데, 그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죄송합니다, 후작님.”

생각보다 강한 지젤의 힘에 진땀을 뺀 집사가 한숨 돌리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다이한은 독기 어린 얼굴을 하는 지젤을 보며 짧게 한마디 던졌다.

“이 정도면, 투견을 데려온 건가 싶은데.”

길거리 떠도는 품종 없는 개. 그의 말에 지젤은 다시 하녀의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투견? 지젤이 손에 힘을 꽉 주고 다이한을 올려다봤다. 하녀의 입에서 애달픈 비명이 흘러나왔지만, 다이한은 그걸 물끄러미 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지젤의 뺨에 붉은 핏방울이 맺혀있는 것도 봤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크게 관심 없다는 듯 그대로 뒤돌았다.

나를 개 취급해? 누구 때문에 억지로 끌려왔는데. 그녀가 투견이라면, 여기는 도살장이었다. 그리고, 그 도살장의 주인은 저 무덤덤한 얼굴의 후작이었다. 열받은 지젤은 일부러 다이한 들으라는 듯 물으며, 하녀의 뺨을 다시 내리쳤다.

“다시 말해봐. 내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그녀의 삐뚤어진 마음은 이성을 좀먹고 후작을 아프게, 아니. 그건 불가능하니까, 그저 거슬리게라도 하고 싶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지젤 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왜? 아까 했던 그 말, 그대로 해보라니까.”

“제발! 그만. 그만해주세요. 죄송해요!”

다이한은 이 소란의 시작을 짐작할 수 있는 그 대화를 듣고도, 뒤돌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는 게, 자해하는 것보다 훨씬 덜 귀찮았다. 집사는 그런 다이한을 보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가뜩이나, 저택 내에서 지젤을 보는 시선이 곱지 못한데 이렇게 되면. 이미 많이 맞은 하녀의 뺨이 퉁퉁 부어오르는데도 지젤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집사는 주위 하녀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지젤을 노려보는 걸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젤은 샤론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고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본인 손이 부을 정도로 사람을 때려놓고 태연하게 침대로 들어가 눕는 그녀를 보며,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지젤을 향한 저택 내 사용인들의 적개심은 하루도 안 돼서 몸집을 부풀렸다.

“아니, 자기가 뭐라고 사람을 저 지경이 되도록 때려?”

“솔직히, 샤론이 뭐 틀린 말 했나.”

분수에 넘치는 시집을 왔으면서 감사를 모르는 후작 부인은 순식간에, 표독스럽고 악독하며 건방진 계집이라 불렸다.

***

다이한은 결혼 이후 바쁜지, 영지 내를 점검하러 다니느라 지젤과 얼굴 보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둘은 여느 귀족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침실을 따로 쓰고, 후작은 주로 집무실이나 서재에 있었기에 더욱 지젤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하녀가 가져다준 점심을 눈앞에 둔 지젤은 잃어버린 시간 감각을 되찾으려 애썼다. 내내 잠만 잤더니, 오늘이 며칠인지도 분간이 어려웠다. 그녀는 가는 손가락을 접어 보이며 날짜를 헤아렸다.

“겨우 열흘 지났네.”

그 사실에 지젤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힘없이 은스푼을 들어 수프를 떠먹으며 말했다. 먹기는 먹어야 하는데, 정말 안 넘어갔다.

“답답해서 그런데, 커튼 좀 걷어줘요.”

침실은 충분히 밝았지만, 그래도 속이 답답했다. 그녀의 말에 하녀가 놀라서 퍼뜩 고개를 들어 지젤을 바라보고는 눈만 끔뻑였다. 그걸 본 지젤은 조용히 스푼을 내려놓았다. 왜? 내가 어려운 걸 이야기했나?

“그, 오늘 햇빛이 너무 강하여. 저택 내 커튼을 걷지 말라고 집사님께서-”

지젤은 더듬더듬 이상한 말을 하는 하녀가 저번에 얻어맞은 하녀 옆에 있던 아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입을 다물었다. 단둘이 있는데 험한 꼴 더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태도가 이상했다. 커튼을 걷지 말라고?

“커튼 걷어줘요.”

“죄, 죄송해요. 지젤 님, 답답하신 거라면 이따가 저택 뒤 정원 산책이라도 하심이. 그, 일단 식사는 하시고 생각하시면 어떠실까요?”

“미아.”

단박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지젤에 놀란 미아가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였다. 그때, 뺨을 맞던 하녀가 불렀던 이름을 기억한 지젤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과한 걸 부탁한 게 아니잖아. 커튼 걷어줘요.”

“그- 그, 지젤 님. 제가.”

미아는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지젤을 마주 보며 곤란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후작 부인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언니가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 많은 노인에게 팔려 가듯 결혼했기에, 그녀는 지젤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고 생각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지젤이 무언가를 대가로 치르고 결혼했다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놀라지 마세요. 지젤 님, 제가 이야기했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실은 이틀 전부터 정문에-”

지젤은 느릿느릿 이어지는 미아의 말을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참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창가에 다가섰다.

“그러고 보니, 엊그제부터 창문을 다 가려놓고 있던데.”

이쪽에 숨겨야 하는 뭔가 있었던 모양인데? 침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우울감에 빠져 다른 일에 관심이 없었기에 몰랐는데.

“지젤 님!”

미아가 놀라서 지젤을 부름과 동시에 지젤이 짙은 와인색 커튼을 확 걷어냈다. 그리고, 저 멀리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로 보이는 정문 앞에 서 있는 마차를 확인한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버지?”

아벨린 남작가의 마차와 함께 정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확인한 지젤이 미아를 향해 물었다.

“왜 알리지 않고? 왜 들어오시지 못하고?”

지젤의 질문에 미아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시선을 회피했다. 그 태도에 지젤이 기가 찬다는 듯 웃음을 토해냈다.

“천 쪼가리 하나로 가려놓고, 나를 바보 취급하는구나.”

“그게, 그게 아니옵고. 후작님께서 남작님을 저택에 들이지 말라 하셔서. 그러니, 어차피 만나실 수가 없을 터라 마음이라도 덜 불편하시게 하자고 집사님께서-”

개소리. 지젤은 거기까지만 듣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그대로 저택의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지젤 님!”

만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녀가 이미 한계치를 넘어선 분노에 자기 몸을 내어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녀를 미아가 연신 부르며 쫓았다.

“지젤 님! 조심하세요! 그러다 넘어지시면 다치세요!”

그 소리에 2층 서재에 앉아있던 다이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복도로 나왔다. 그는 곧바로 계단을 구르다시피 내려가고 있는 지젤을 발견했다.

또 왜?

그가 금발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지젤의 뒤를 쫓았다. 계단을 두 개씩 뛰어 내려가던 지젤의 목덜미를 뒤따라 내려온 다이한이 단숨에 낚아챘다. 지젤이 그 손을 매섭게 쳐냈다.

“왜요?”

다이한은 지젤의 반사신경에 꽤 놀랍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건 이쪽에서 묻고 싶은 말이었다. 우당탕 시끄럽게 어딜 뛰어가는 건지.

“너야말로, 왜?”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아니면, 방금 이쪽처럼 비꼬는 걸까. 지젤이 이를 아득 물고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 모시고 들어오려고요. 딸 얼굴 보러 온 저희 아버지가 왜 저택 앞에서 벌서고 계셔야 하는 거죠?”

그녀의 날카로운 물음에 다이한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지젤은 그걸 잠깐 마주 올려 보다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의 초록 눈에서 감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가끔 화를 낼 때를 빼고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움직이는 조각상처럼, 감정이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잘나신 후작님께서는 장인을 저렇게 문 앞에 세워두시나 봅니다?”

그녀의 신랄한 비아냥거림에 다이한은 동요하지 않았다.

“친아버지도 아닌데, 유난스럽게 구네.”

그의 단조로운 음성에 지젤은 숨을 멈췄다. 그가 그런 그녀를 보며 도리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너는 이제 남작가의 사람이 아닌데, 피도 섞이지 않은 남작의 얼굴을 보겠다는 이유는?”

지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결혼하게 된다고 정치적인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니, 한동안 남작가에는 가지도 못할 테고 가족을 볼 때마다 왕비와 후작의 눈치를 봐야 할 거라고. 그러나, 저렇게 저택 앞에 세워두고 사람을 망신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예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제 부모님은 아벨린 남작님 한 분이십니다. 안으로 모시게 해주세요.”

이틀? 아까 미아가 했던 말을 떠올린 그녀는 아버지가 딸 얼굴을 보기 위해 저렇게 버티고 섰다는 걸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부친을 떠올린 그녀의 얼굴이 슬픔으로 젖어 드는 걸 보며 다이한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넌 앞으로 남작가의 사람은 만나지 못해.”

피가 섞인 것도 아니고, 여태 출생의 비밀을 숨겨놓고 있던 남작을 뭐 저리 보고 싶어 할까. 친부모와도 깊은 유대감이 없던 그는 지젤이 너무나 감정적이고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녀는 남작을 원망해야 옳았다. 어찌 되었든, 남작과 그의 딸인 여동생에게 해가 될까 두려운 마음에 등 떠밀려 제 발로 후작가로 걸어 들어오게 되었으니.

“왜죠? 제가 왜 가족들을 보지 못한다는 거죠?”

“넌 이제 지젤 아벨린이 아닌, 지젤 다니엘이니까.”

그녀는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은 그의 성에 소름이 끼쳤다. 평생을 쫓아다니겠지. 이름 뒤에 붙어서, 소유를 주장하고 가족을 못 보게 하겠다고? 지젤은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작가의 사람을 옆에 두고, 그저 얼굴이나 보고 안부나 물을게요. 이 저택 응접실에서, 5분만. 아니, 다 필요 없으니. 제가 저택 정문으로 가서 돌아가시라고 한마디만 할 수 있게 해주세요.”

“후작 부인을 다시 침실로 모시지 않고 뭐 하나.”

그는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묵살하고는 어느새 옆에 자리 잡고 서 있는 집사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예, 후작님.”

“나한테, 손대지 마요.”

집사는 경계심 많은 길고양이처럼 날을 세우는 지젤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저런 날카로운 태도는 단기간에 저택 모두를 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는데, 집사는 슬슬 후작 부인이 짜증스러워졌다. 다이한이 그녀의 친정을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고, 그녀에 대해 이렇다 할 관심도, 애정도 보이지 않는 마당에 그녀에게 계속 친절하게 굴기는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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