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8)화 (8/135)

08.

비아냥거림 없이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지젤은 그걸 가볍게 무시하고, 익숙한 가사를 혀에 굴린 채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나 홀로 남은 자리에, 맴도는 네 숨결이.]

그녀는 본인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수도원에 보내진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 같았다. 아버지와 여동생, 미하엘은 목숨을 보전하고 후작과 자신은 이런 시답지 않은 기 싸움을 계속하지 않아도 되니 완벽했다.

초점이 흐려진 채로 의미 없는 콧노래만 계속 흥얼거리는 지젤을 보며, 다이한은 그대로 나가려다가 몸을 굳혔다. 그는 이 노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그 음색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

듣고 싶지 않아. 다이한이 그녀에게 경고했지만, 지젤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뭘 믿고 이럴까 싶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뒤틀리고 삐뚤어진 심사를 풀어낼 방법이 없었기에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네 잔상이, 결국 다시 날 끌어내-.]

지젤은 단 한 소절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다이한은 듣지 않고도 그 가사를 알고 있었다.

“입 다물어.”

다이한은 산에서 그 노래를 부르던 지젤을 떠올리고는 몸을 움직였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이 자비 없이 과격하게 지젤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젤이 조금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그 푸른 눈에 다이한의 얼굴이 정직하게 담겼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가려진, 이상한 분노를 그녀는 볼 수 있었다.

다이한은 지젤이 산에서 부르던 이 노래를 알고 있었다. 그 어린 소년이 나무 뒤에 숨어 듣던 노래의 가사 뜻을, 그는 나중 돼서 전쟁터에서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은 이 노래를 듣고 싶지 않았다.

“닥치고 숨만 쉬어.”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겁을 먹었던 지젤의 눈이 싸늘해졌다.

“거슬리게, 한 번만 더 이따위 짓을 했다가는 가축처럼 마구간에 묶어놓을 테니.”

다이한이 그녀의 손목을 내려다보며 내뱉는 말에 지젤은 자기 입을 틀어막고 있는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잡힌 하관이 아리다 못해 뜯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이한은 그녀를 아프게 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기에 그 손에 더 힘을 줬다.

“네 말처럼, 애초에 사이좋은 후작 부부라는 평판은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내를 짐승처럼 다룬다 한들, 누가 날 말릴 수 있을까?”

노예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싶은가. 그의 협박 아닌 협박을 들으며, 지젤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네 아비는 목숨 부지하기 위해 벌벌 떠느라 바쁠 텐데.”

가족을 들먹이는 야비함에 지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이한은 그런 지젤을 거칠게 밀쳐내며 잇새로 경고를 내뱉었다.

“그러니, 네 주제를 알아.”

“주제.”

침대에 내동댕이쳐진 지젤이 그 말을 곱씹고는 다이한을 올려다봤다. 그 무표정하고 오만한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을 참아낸 그녀는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저 따위 건, 그저 혼자 노래 부르는 것도 후작님께 허락받아야 합니까?”

다이한은 분한 듯 이쪽을 노려보는 지젤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단순히 그녀가 조금 전의 그 노래를 부르는 게 듣기 싫었지만, 그걸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다. 어떤 노래든, 딱히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몰랐다.

“후작 부인이 천한 집시들처럼 노래를 부르겠다.”

귀족 같지도 않은 귀족 영애 티를 못 내 안달이 난 건가. 그의 말에 지젤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서럽고 화가 나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은 채로 조용히 분노를 쏟아냈다.

“이럴 거면, 인형을 가져다 놓으시지. 뭐 하러 귀찮게 이런 일을 하신 거죠?”

단 하루 만에 다이한은 그녀와의 말씨름이 피곤했고, 싫증이 났다. 매번 저렇게 억울하다는 듯 이유를 묻는 꼴을 보면 지겨웠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겁먹고, 벌벌 떠는 게 차라리 일이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리한 그는 단숨에 그녀에게 다가서 그 턱을 움켜쥐었다. 놀란 지젤이 도망칠 틈도 주지 않은 그는 그녀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 엄지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꺼칠한 손가락이 그녀의 입 안에 자리 잡은 붉은 살덩이를 아프게 짓눌렀다.

“그래. 나는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을 게 필요한데, 필요 이상으로 귀찮게 구는 이런 혀는 쓸모가 없지.”

덤덤하게 혀를 잘라내겠다는 겁박을 하자 지젤은 얼어붙었다. 말을 내뱉은 그는 진심인 듯, 지젤의 입 안의 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초록 눈이 덫에 걸린 사냥감의 처분을 고심하는 사냥꾼 같았다.

“뭐가 덜 귀찮으려나.”

그는 정말로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그녀의 혀를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싫어. 섬뜩해진 지젤이 몸을 파르르 떨자, 다이한은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는 그대로 그녀를 놓아줬다.

“주제를 알고, 행동해.”

다이한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갓 태어난 사슴처럼 바들바들 떠는 지젤을 빤히 보며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을 닦아냈다. 꼼꼼히 손가락을 닦아낸 그는 그 손수건을 그대로 바닥에 버린 채로 뒤돌아섰다.

지젤은 구겨진 채로 바닥에 버려진 흰 손수건을 보며 다이한이 한 말들을 곱씹었다. 똑같이 갚아 주고 싶었으나, 그녀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게 그녀를 끝없는 우울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

“정말 이해 안 간다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생각에 동의한 지젤은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잠든 척 눈을 뜨지 않았다. 지젤은 아침도, 점심도 먹지 않고 온종일 누워만 있었다. 그리고, 지젤은 본의 아니게 피로 얼룩진 카펫을 닦아내는 하녀의 투덜거림을 엿듣고 있었다.

“조용히 해. 듣겠어.”

“제 손목 긋는 정신 놓은 여자가 듣기는 뭘 들어? 아니, 이거 얼룩 어쩔 거야.”

“조용히 하라니까.”

“미아, 봐. 전혀 안 닦이잖아. 얼마나 비싼 건데.”

짜증이 다분히 묻어나는 말들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저택에서 지젤은 카펫의 얼룩보다도 못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후작님이 결혼해줬으면 감사하다고 넙죽 엎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나만 그렇게 생각해?”

“쉿!”

“귀족 같지도 않은 집안, 구제되다시피 한 결혼이면서. 자기가 뭐가 잘났다고 우리 후작님을 매번 모욕 줘?”

“샤론, 정말로 그만해. 나가서 얘기하자고.”

“자기가 들으면 뭐 어쩔 거람. 제정신이 아닌데.”

옆의 다른 하녀는 투덜거리는 하녀를 향해 조용히 하라면서도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결혼식 내내 울상인 데다가, 저택에 오자마자 이런 난동을 부리니. 후작을 존경하는 이 집안사람들이 그녀에게 호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도, 한참 모자란 집안의 여식이면서 매번 일을 귀찮게 만드니.

“모욕?”

내가 후작에게 모욕을 줬다고? 그 말은 곱씹은 지젤이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붕대 감긴 손목이 뻐근하니 아팠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젤은 잠시 고민했다. 내가 이런 소리를 듣고도 참고 있어야 하나.

시체처럼 누워있던 지젤이 침대에서 일어서자 무릎을 꿇고 얼룩을 닦아내던 하녀들이 눈을 끔뻑였다.

“아, 그게.”

“구제해줬다고? 감사히 여기라니.”

내가 어떤 수모를 겪고, 지금 무슨 이유로 여기 있는데.

“저는 그게, 단순히-”

사과보다 변명부터 하는 하녀의 태도에 지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녀는 하녀의 머리채를 양손으로 쥐어 잡고 당장에 뜯어내 버릴 것처럼 힘을 줬다. 옆에 있던 하녀들 또한 놀라서 혼비백산 흩어졌다. 모두 경악 어린 눈으로 지젤을 보는데, 지젤은 굳이 참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여기서 좋게 보일 이유도 없고, 사랑받고 싶지도 않았다.

“네가 뭘 안다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떠들어.”

“아! 용서, 용서해주세요! 놓아주세요! 미아, 도와줘!”

지젤의 하얀 손에 하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뒤엉켰다. 두피가 뜯겨 나갈 것 같은 고통을 참다못한 하녀가 지젤의 뺨을 할퀴었다.

“샤론!”

주인마님 몸에 상처를 내다니! 가장 가깝게 있던 하녀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불렀다가, 제 입 밖으로 나온 큰 소리에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그에 반해, 놀라지도 않은 지젤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쫙-!

뺨을 내려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하녀의 몸에 올라타서 그녀의 뺨을 때리는 지젤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다.

“지젤 님!”

복도를 지나다 그 광경을 목격한 집사가 놀라서 지젤을 불렀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미친년으로 소문나 요양원에 가면, 그리되면 일이 편해질지도 몰랐다. 그래, 그게 훨씬 모두에게 이로운 길이 될지도.

“지젤 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이 든 집사가 지젤을 억지로 떼어내는데, 지젤은 하녀의 머리채를 죽어도 놓지 않을 사람처럼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집사가 그런 그녀를 어르고 달래기 위해 한 번 더 소리쳤다.

“아직 손목이 회복되지 않으셨습니다! 지젤 님, 진정하세요!”

한 달 전, 지젤이 후작을 찾아와 무릎 꿇었던 것을 보았던 집사는 그녀가 이런 분풀이를 하는 이유를 안다는 듯이 지젤을 말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 응어리 맺힌 분노를 풀 길이 없었는데, 그는 마치 그걸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심정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러시면 안 됩니다!”

파르르 떨리는 하녀의 입술을 보며, 지젤은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했다. 너도 날 미워하니까, 나도 널 미워해야겠다고.

“정말, 가지가지 해.”

저택을 시끄럽게 만든 소동에 침실에 들어선 다이한은 정말 피로한 듯 중얼거렸다. 그는 광인처럼 하녀의 머리를 쥐어 잡고 이쪽을 보는 지젤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걸 보며, 지젤은 하녀를 놓아줬다. 지젤의 손에서 힘이 풀리자 하녀가 잽싸게 몸을 뒤로 물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지젤은 그런 하녀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왜?”

침실 문 앞에 선 채로 그녀에게 이유를 물은 다이한은 흰색 정복을 입은 채로 지젤을 내려다봤다. 가는 손목에는 피에 젖은 붕대가 감겨 있으며, 머리는 헝클어져 엉망이었고 얼굴은 생기는커녕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주제를 아시라 하셨잖습니까? 허면, 저는 이 저택의 안주인인데.”

지젤은 불과 어제, 그에게 들었던 말을 되돌려줬다.

“감히 후작 부인 앞에서 대놓고 모욕을 하기에 벌을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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