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7)화 (7/135)

07.

초점이 흐려진 지젤의 푸른 눈을 본 다이한이 권태 섞인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적당히 울라고. 우는 사람은 지치고, 듣는 사람은 지겨우니.”

뾰족한 말이 그녀의 마음을 할퀴어냈다. 새삼스럽게 이쪽의 슬픔은 그에게 짜증스러운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와닿았다. 지젤의 흰 뺨을 매만지던 다이한의 손이 그녀의 허리로 내려갔다. 근래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않아 양손에 잡힐 정도로 가늘어진 허리에 다이한은 잠깐 움찔거렸지만,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드레스 위로 그녀의 몸을 쓰다듬는 손길이 조급해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는 지젤의 얼굴을 살폈다. 무얼 가늠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매서운 눈매를 보면 그게 걱정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푸른 눈을 보며, 다이한이 별생각 없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여기 처음 온 날.”

지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다이한은 그대로 손을 멈췄다. 지젤이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무릎 꿇었던 날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뭐 하러.”

다이한이 매정하게 그녀의 말에 의문을 던졌다. 이미 지나고, 끝난 일을 또 왜.

“나에 대한 원망을 되새기려고?”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그러자, 지젤이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여기로 오지 말고 도망칠걸.”

당신에게 자비를 바랄 게 아니고. 그냥 도망칠걸. 지젤이 무어라 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으나, 그게 듣기 싫었던 다이한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미 다 끝난 일이야. 네가 선택한 거고.”

그녀를 탓한 다이한이 다시 지젤의 입술에 입술을 겹쳐왔다. 그의 뜨거운 숨결과 손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지젤을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자, 다이한이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거칠게 그녀를 밀어붙였다. 이대로는 침대 밑으로 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이한은 그녀를 거칠게 몰아세웠다.

지젤은 드레스가 벗겨지고, 자신의 숨이 헐떡여지는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괴감이 몰려왔다. 당장 다음 일을 생각하고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지젤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움직였다.

다이한은 방금과는 다르게 그를 덜 밀어내는 지젤이 의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네가 날 미워해도 상관없어. 애초에 우리는 그리 달콤한 관계는 되지 못했을 테니까.

그는 귀족 부인의 의무 외에는 그녀에게 원하는 게 없었다. 지금, 이건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그가 터질 것 같은 심장의 이면을 다독이기 위해 이유도 모르면서 변명했다. 그러다 문득, 피비린내가 난다는 생각에 그는 그녀의 입에서 입술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지긋지긋하게 맡아온 비릿한 내음에 다이한이 지젤을 확 밀쳐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오른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보고 기가 차서 실소했다. 드레스 소매 끝에 숨겨둔 유리 조각으로 찢어낸 하얀 살에서 선홍색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

그는 말 그대로 황당해서 침대에 늘어져 있는 지젤을 말없이 바라만 봤다. 피가 울컥 솟아올라 침대 위의 이불을 삽시간에 적셨다.

놀랍게도,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작위를 받은 후작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맑은 액체를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포라기보다는, 이해가 안 가서 그는 그녀의 손목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다이한은 지젤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명백한 비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보며 다이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거칠게 지젤의 오른 손목을 짓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 와서 자살로 끝내겠다?”

그건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라며 그가 그녀를 비난했다. 지젤은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죽고자 했으면, 더 깊게 베었겠지요.”

이 정도로는 죽지 않을걸요. 조금 더 깊게 베어야 죽을 텐데. 지젤이 다이한에게 일러주듯 말했다.

“그러면.”

당황스러움이 스치고 간 자리에 남은 건 오롯한 분노였다. 죽으려고 한 것도 아니면, 이렇게 피를 보는 이유가 뭐야. 지젤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그건 다이한의 분노를 더 키웠다.

“이런 자학적인 취향이라도 가지고 있었나?”

다이한이 그녀의 오른손을 부러 아프게 끌어 잡아당겼다. 그 힘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일으킨 지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린 손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쥔 다이한의 손 또한 붉게 물들었다. 그걸 보며 지젤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굴욕적이라.”

“굴욕.”

인상을 확 찌푸린 다이한이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지젤은 처음 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명확한 발음으로 재차 답했다.

“목숨 부지하기 위해 팔려 와, 이리 부대낀다는 게 가히 굴욕스러운지라.”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이한이 지젤의 손목을 내던지듯 놓아줬다. 지젤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카펫이 깔린 바닥에 고꾸라졌다.

“나와 닿는 게 싫다.”

그래서, 피를 보겠다고. 다이한은 방금까지 들끓었던 본인의 욕정이 더럽게 느껴졌다.

“해서, 나와 몸을 섞을 날마다 이렇게 하겠다고?”

“후작님께서는 신경 쓰지 마시고 마저 하세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 그렇지만 실제로 정신을 반쯤 놓은 지젤은 왼손에 있던 유리 조각을 툭 내려놓고는 후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가 공감 따위는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몰아세우고 끌고 와 인형처럼 본인 좋을 대로 사용하려 하는 것이지. 전쟁에서 공을 그렇게 세웠다니, 비위도 좋을 텐데. 왜 저럴까. 지젤은 다이한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고 오히려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그 평민 때문에.”

다이한이 지젤의 피가 마르기 시작한 자신의 오른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혀를 짓씹었다. 그깟 비루한 사내새끼와의 의리를 지키려고? 무슨 일이든, 이런 식으로 쉽게 가는 법이 없지. 아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문 다이한이 지젤을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그대와 달리 내가 이런 괴이한 취향은 없는 터라.”

그저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기분을 더럽게 만들기 위해 서슴없이 자학적인 행동을 하는. 이, 또렷하게 느껴지는 원망이 그를 화나게 했다.

“그래, 내 이제 남편 외의 남자에게 절개를 지키는 고상하신 부인은 건들지 않도록 하지.”

그래서, 그렇다고 한들. 지젤은 그의 아내이며, 이 왕국의 유일한 후작 부인이었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고, 그녀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기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너그러운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지젤은 광기로 짙어진 그의 초록빛 눈을 보며 힘없이 감사 인사를 했다. 다이한은 결국 그 이상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침실을 박차고 나왔다.

“아이고, 후작님!”

침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하녀들이 피 묻은 후작의 손을 보고 놀라서 그 안으로 들어섰다가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의원을 불러!”

“집사님! 이게 무슨 일이야!”

경악 어린 음성들에 저택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후작과 후작 부인의 첫날밤은 그렇게 미래를 예고하듯 범상치 않게 끝났다.

***

검은 머리카락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나이 든 의원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후작 부인을 보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천장을 멍하니 보며, 즐거운 듯 경쾌한 음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신혼 첫날부터 이러시면, 불화설이 퍼질 겁니다.”

“좋네요.”

지젤이 간단한 봉합을 끝내고 붕대를 감아내고 있는 노인의 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니. 그걸 보며, 의원은 입을 열었다가 조용히 다물었다. 그녀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그런 그에게 당부했다.

“소문을 많이 내주세요. 후작 부인이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의원은 어린 후작 부인에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하려다가 그만뒀다. 언뜻 보기에는 즐거운 듯 보이는 지젤이 당장에 울 것처럼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앞으로 몸을 해하는 건 자제하세요. 지금 이것도 꽤 짙은 흉터로 남으실 겁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텐데. 그가 자신의 손녀뻘 되는 지젤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저희 앞으로 자주 볼 텐데 벌써 잔소리가 이리 심하시니, 곤란하네요.”

어딘지 측은하게 보는 의원의 눈빛에 지젤은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그녀를 아주 조금이라도 동정하거나 공감하면 당장에 울음을 터트려 버릴 것 같았다. 더는 울고 싶지 않았기에, 지젤은 천장을 보며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첫날밤을 보내지 않았고, 한동안은 이쪽에 손대지 않을 것 같으니까. 잘된 일이지.

“흉터는 둘째 치고, 많이 아프셨을 테니 하는 말입니다. 이런 짓은 하지 마세요. 잘못하면 염증도 생길 수 있고-”

“말없이 할 일만 하는 게, 얼마 남지 않은 명줄 잇는 데 보탬이 되지 않을까.”

의원이 지젤에게 당부하는 말을 누군가 매섭게 끊어먹었다. 그에 놀란 의원은 뒤를 돌았다. 그는 바로 앞에 서서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다이한을 보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의원은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후작님.”

“무지한 게 아픈지도 모르고, 자해하겠다니 내버려 두게.”

다이한의 말에 의원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굳어 섰다. 물론, 지젤의 자학적인 행동의 원인이 후작 때문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고 보니 당황스러웠다. 저렇게까지 매정하게 이야기할 일인가. 의원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끔뻑거리자, 지젤이 입을 열었다.

“맞아요, 내버려 두세요. 이러다 죽으면 감사한 일이죠.”

후작님께서 또 부르시거든, 최대한 천천히 와주세요. 그녀의 말에 다이한이 고개를 까딱였다.

“네가 죽으면, 나는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는데. 그걸 잊은 것처럼 구는 이유가 뭘까.”

정말 멍청해서? 지젤은 다이한의 협박을 들으며 입을 다물었다. 다이한이 그런 그녀를 보며 한 번 더 고개를 까딱였다.

“과다 출혈로 죽고자 하는 그 장대한 계획 들어나 볼까?”

어디 더 말해보라는 후작의 태도에 의원은 아까보다 더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뛰어나가는 의원을 보며 지젤은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걸 보며, 다이한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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