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6)화 (6/135)

06.

“내 귀에는 지금 네가 하는 말들이, 그 평민만 없으면 결혼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니까.”

“왜,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죠?”

지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본인 좋을 대로, 그런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하겠다니. 그녀는 다이한의 초록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가 알아들은 걸 확인한 그가 그녀에게 긴 설명 없이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 평민을 위한다면, 살려야지?”

그는 그녀가 정말 그 평민을 사랑한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해가 안 가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후작님.”

그녀는 다이한이 하는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결혼하지 않으면, 미하엘을 해치기라도 하겠다고 지금. 지젤의 경악 어린 눈에 분노가 스치는 걸 보며, 작게 다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때문에 죽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을 마친 그가 지젤의 손등에서 발을 떼내었다. 그녀의 흰 손등에 붉게 피가 맺혀있었다. 볼록한 손등 뼈의 하얀 살갗이 벗겨진 걸 내려다본 다이한은 그대로 그녀를 지나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내가 선약이 있는 터라, 먼저 가지. 다음에는 약속을 잡고 만나면 좋겠는데.”

완전히 그곳을 벗어나기 전, 다이한이 태연하게 다음을 기약했다. 지젤은 그런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바닥만을 내려다봤다. 그는 잠깐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가 이내, 관두고 제 갈 길을 갔다.

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는 꽤 긴 시간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미하엘과 조용히 사라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기적인 판단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제 발로 결혼식에 걸어 들어가야 했다.

***

수도 옆에 크게 자리 잡은 후작가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지젤은 결혼식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남작은 퉁퉁 부은 눈의 지젤을 보고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 옆 여동생 표정은 확인도 하지 못했다. 지젤은 멈추지 않는 눈물이 흐르게 내버려 둔 채로 마차 밖을 내다봤다. 서글프게도 날씨가 화창했다.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 있다니.”

대단하다며 비아냥거리는 후작을 쳐다도 보지 않은 지젤은 코를 훌쩍였다. 정말 이기적이게도 그녀는 미하엘이 보고 싶었다. 그 다정하고도 사랑스러운 남자가 금세 그리워졌다. 이쪽에서 아프게 밀어내놓고는.

다이한은 그 이상은 말하지 않으며 지젤을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고집스럽게 일자로 굳은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의 연녹색 눈이 심드렁하게 그녀를 훑어보는 듯했지만, 그건 표정을 숨기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면 냉하다 못해 차가운 얼굴 사이로 기묘한 분노가 엿보였다. 그는 아까 그 평민 남자를 죽여버렸어야 옳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그는 막연하게 지젤의 눈에서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꿈틀거리는 손에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제발, 제발 후작님. 제발.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떠나서, 이 나라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제발.’

그 애원이 계속 그의 귓가를 맴돌았기에 그는 일단 그만두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눈앞에서 그 평민을 죽여, 체념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유복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지젤은 귀족이었다. 곧 풍족한 후작가의 삶에 적응할 게 뻔했다. 이제 스물한 살인 그녀가 치기 어린 사랑 놀이에 심취한 게 전부일 거라고, 그는 무지하게도 그리 믿었다.

그는 본인이 지젤에게 제일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도 이기적이었기에, 그렇게 꿰맞추는 게 전혀 어렵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다이한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지젤에게 많은 걸 원하지 않고, 바라지 않았다.

“사실, 상관은 없지.”

그가 이쪽은 보지도 않는 지젤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결혼은 필요한 일이었고, 지젤은 힘없는 가문의 딸로 옆에 두기 적절한 인물이었으니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한다 한들 상관없었다.

마차가 조용히 멈추고 나서야, 지젤은 후작저에 들어왔음을 인지했다. 황제에게 직접 작위를 받아, 이 작은 나라에서 왕과도 대등하다는 가문이 이 후작가였다. 지젤은 내리고 싶지 않았지만, 애초에 모든 건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다이한 후작이 먼저 일어섰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지젤은 이 사람에게 나는 ‘개’와 다를 바 없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갑자기 들어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하인이 마차 밑에 내려놓은 작은 계단에 발을 디디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걸을 수 있어요.”

“그대를 걱정하는 게 아니니, 잡아.”

그 높디높은 구두를 신고 내려올 수 있겠냐며 다이한은 비웃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결혼식용으로 제작되어 화려하기만 한 구두는 발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만큼 작아서 뒤꿈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구두 굽은 말 그대로 가파르기 짝이 없었다. 그 누구도 그녀의 그런 사소한 상처를 걱정하지 않았다.

“혼자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젤이 고집을 부리자, 참다못한 그가 그녀를 향해 이죽거렸다.

“마차에서 휘청이다 넘어져 다치면, 부인을 방치한 후작의 평판은 바닥에 처박히겠군.”

그런데도 지젤은 다이한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망신을 주고 싶다면, 조금 더 똑똑한 방법을 선택해.”

몸을 다치면서까지, 이쪽 평판에 흠을 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의 비아냥거림에 지젤은 다시 마차로 들어가 앉아서는 구두를 벗었다. 굉장히 신속하게 움직였기에, 다이한은 그걸 무표정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꽉 낀 구두를 벗어낸 그녀는 그걸 양손에 들고 그를 지나쳐 마차에서 내려왔다.

“이제 후작님의 평판은 무사하시네요.”

“후작 부인이 맨발로 걸어 다니는 정신 이상자라는 소문이 돌겠는데.”

다이한이 그녀에게 뻗었던 오른손을 내려다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지젤을 향해 이죽거렸다.

“저에게 좋은 평판을 기대하신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한 지젤은 본인이 정말 정신 이상자처럼 보일 걸 알면서도 맨발로 후작저로 걸어 들어갔다.

“기대 안 했지.”

다이한이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후작 부인으로서의 의무만 다하면 되니까. 후작은 그렇게 잠시 저택으로 향하는 지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하녀들이 그녀를 쫓아가는 걸 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걸 한마디도 못 하고 가만히 보기만 하던 나이 든 집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후작님 성격도 만만치가 않은데, 고집이 보통이 아닌 사람이 후작 부인이 되었으니.

“이제 여기가 지옥이 따로 없어지겠구나.”

어휴. 하늘을 뒤덮은 붉은 노을과 이 상황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

지젤은 자신을 치장해서 후작의 침실로 밀어 넣은 하녀들이 짜증스러웠다. 첫날밤에 대해 떠드는 하녀들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본인을 다독여주고 싶어질 정도였다. 침대에 앉은 지젤은 테이블 위의 손거울을 들어 손수건으로 화장을 문질러냈다. 누구 좋아하라고.

“노력이 대단하네.”

후작은 대체 언제 온 건지 소리도 없이 문가에 서 있었다. 지젤은 퉁퉁 부은 눈이 쓰릴 정도로 닦아내던 것을 멈추고 그를 빤히 마주 봤다. 다이한은 문을 닫고 침실 안으로 한 발 들어와서는 벽에 기대섰다. 다리를 살짝 꼰 채로 벽에 기대자, 원래도 긴 그의 다리가 더 길어 보였다.

그녀는 그걸 보며, 확실히 이쪽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를 몸으로 이기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검은 바지와 검은 셔츠를 입고 있는 탓에 그의 금발이 더 돋보였다. 단추를 두어 개 푼 셔츠 사이로 보이는 가슴 근육이 그에 대한 확신을 더해줬다. 쌍꺼풀이 짙은 연녹색 눈이 지젤을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짐승이 서로를 견제하듯, 지젤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다이한은 이쪽을 바라보기만 하는 지젤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그녀에게 권했다.

“신경 쓰지 말고 하지. 치장하시느라 바쁘신 것 같은데.”

“예.”

그 정도 비아냥거림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래서, 지젤은 최대한 꼼꼼하게 모든 화장을 다 지워냈다. 그리고 거울 속의 여기저기 빨갛게 부은 얼굴을 보며 흡족하게 거울을 내려놓았다. 바다에서 막 건져낸 심해어같이 생긴 이 얼굴을 후작이 볼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 다 된 건가?”

다이한이 그녀가 앉아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오며 묻자, 지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성큼 다가선 다이한에 의해 지젤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게 졌다. 그로 인해 지젤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다이한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후작 부인께서.”

그 호칭에 지젤이 아랫입술을 콱 깨물고, 양손을 주먹 쥐었다. 잘게 떨리는 그 하얀 주먹을 흘낏 살핀 다이한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준비가 다 되셨다고 하니.”

정말 싫다. 그녀는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지젤의 푸른 눈이 투명한 눈물로 가득 차 평소보다도 더 빛나 보였다. 거기까지 확인한 다이한은 침대에 무릎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입술이 겹치고 그의 밑에 깔리게 된 지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말랑한 입술끼리 맞닿고, 다이한이 그 틈새를 파고들려 했으나 지젤이 이를 악물고 있었기에 불가능했다.

끝까지, 귀찮게. 다이한은 망설이지 않고, 지젤의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지젤은 조금 버티는가 했지만, 턱이 아린 고통에 짧게 신음하며 입을 벌려야 했다.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다이한이 지젤의 입 안을 헤집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자존심이 상하니, 울고 싶지 않은데. 종일 울기만 했으니, 만만해 보일 게 뻔해서 그만 울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서럽고, 속상하고 제 손으로 떠나보낸 미하엘이 너무 보고 싶었다.

미하엘까지 떠올린 지젤이 다이한의 혀를 물어뜯어 버릴까 고민하는 찰나에 그가 먼저 입을 뗐다. 그가 그녀의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그만 울어.”

네 우는 소리에, 머리가 울려. 그의 목소리가 흥분에 젖어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

“하루 종일 울었으니, 그만할 때도 됐잖아.”

지젤은 그가 뭔가 대단히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그녀의 뜻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젤은 문득 눈물이 메마른다는 표현을 자주 썼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눈물이 메마를 수가 있나, 이렇게 속이 문드러지는 비참함에 갇혀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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