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5)화 (5/135)

05.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지젤은 계속해서 그런 말들을 반복했다.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그럼. 저는 어떻게, 왜? 눈물로 초점이 흐려진 딸이 중얼거리는 말에 남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왕비는 조금만 수틀려도 널 죽여 없애는 길을 택할 거야.”

네가 공주라고 확신하고 있으니까. 남작은 어찌할 줄 모르는 딸의 표정이 보기가 힘들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는, 저는 공주고 뭐고.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그냥, 우리 아버지 딸인데.”

아니라고요? 남작은 그런 딸을 말없이 끌어안아 줬다. 지젤이 그런 아버지를 마주 안으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나 그냥 아버지 딸 아니에요? 저 뭐, 그런 거 아닌데.”

“아.”

그가 작게 탄식하고는 지젤을 꽉 부둥켜안았다. 끝까지 지켜냈다는 오만함이 그를 방심하게 했던가. 이게, 겨우 시작임을 모르지 않는 그는 그저 얼이 빠진 자신의 큰딸을 조용히 품에 안았다.

“불쌍한 우리 딸, 미안해.”

힘없는 나를 용서하렴. 그게 지젤이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

“영애께서 막무가내로-”

“- 이러시면 안 됩-”

집무실 밖이 시끄러워지자, 다이한은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봤다. 동시에, 지젤이 그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그리고, 다이한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지젤은 그가 앉은 책상 바로 앞으로 뛰어가 무릎을 꿇었다.

“아니! 후작님, 죄송합니다. 지젤 님께서 멈추지를 않으셔서는- 일단, 저희가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귀족 아가씨가 냅다 무릎 꿇는 걸 보고 놀란 기사 한센은 다급하게 다이한에게 변명했다. 저택의 입구에서부터 힘으로 밀고 들어온 지젤을 보며 집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젤이 곧 후작 부인이 될 거라는 걸 아는 한센과 집사는 그녀를 힘으로 막아 세울 수가 없었다. 다이한이 그런 그들에게 조용히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봐.”

지젤은 집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다이한을 올려다봤다. 밑에서 보니, 그의 초록색 눈이 저번보다 더 짙어 보였다. 선이 굵다는 표현이 제법 잘 어울릴 정도로,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이었다.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네.”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으니. 다이한이 당황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무심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의 붉은 입술이 일직선으로 굳게 다물렸다. 지젤은 그가 잘생긴 그 얼굴만큼만이라도, 자비롭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왕국을 나가서 살겠습니다. 아예 이곳을 떠나서 조용히 살게요. 왕비님이나 왕자님 가시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다이한이 그런 지젤에게서 시선을 떼고 서류를 집어 들었다.

“내용이 영 진부해.”

“정말로, 오늘 당장 떠날게요. 조용히 사라질게요. 저는 정치며, 왕궁이며 관심이 없습니다.”

그 말에 다이한이 서류를 다시 내려놓고는 무릎 꿇고 있는 지젤을 살폈다. 그는 지젤이 입고 있는 옷이 그녀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유행이 지나, 연회장에서 보기 힘들 고전 양식의 드레스는 남루해 보였다.

생전 남의 차림새에 관심을 가진 적 없던 그는 허리까지 오는 지젤의 붉은 곱슬머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초록색 드레스를 입으면 더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 그의 시선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지젤이 그에게 애원했다.

“후작님,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정말로 저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습니다. 후작님께도 실이 되는 결혼입니다. 제 분에 넘치는 결혼이에요. 떠나게 해주세요. 정말 조용히 사라지겠습니다.”

지젤은 본인의 출생 비밀이 어떻든, 그게 후작과의 결혼으로 결론 난다는 게 너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니, 그 개연성을 떠나 그녀에게는 미하엘이 있었다. 다 두고 정말 죽은 듯이 살 자신이 있었다. 미하엘만 있으면, 어디든 괜찮았기에 그녀는 이렇게 비굴하게 구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본인의 출생과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남작께서 설명이 좀 부족했나.”

“저는, 저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이런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요. 제발-”

그녀의 말에 다이한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가 잠깐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하자, 지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그래.”

그의 흔쾌한 대답에 지젤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안도감이 가득 차오른 그녀의 푸른 눈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 원한다고 하니.”

“감사-”

그녀가 재빠르게 감사 인사를 하며, 울컥한 감정을 추스르려는데 다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네가 떠나면, 남작과 그 딸만 처리하면 되겠군.”

“네?”

그가 일어서자, 지젤은 고개가 젖혀지도록 시선을 들어 올려 그를 봐야 했다. 다이한은 그런 그녀의 앞에 다가서며 눈썹을 까딱였다.

“비밀을 알고도 살아 숨 쉬는 사람은 한 명이면, 족하지 않을까.”

내가, 그 이상의 위험 부담을 안고 가야 할 필요가 있나. 그의 중얼거림에 지젤이 숨을 멈췄다. 뭐?

“아니, 아니. 이엘리야는 아무것도 몰라요.”

지젤이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는 말에 다이한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금발이 흐트러지는 걸 보면서 지젤은 눈을 깜빡였다.

“그걸 어떻게 믿지.”

“정말로, 걔는 아무것도 몰라요. 후작님, 그럼 다 같이 떠날게요! 제가 다 데리고-”

“그건 더 위험하지, 정치에서 밀려났다지만 정통 있는 귀족인 남작을 데리고 왕국 밖에서 무슨 작당을 할 줄 알고.”

“그런- 후작님. 그런.”

지젤은 다이한이 답을 정해놓고 자신을 데리고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지젤이 고개를 숙이며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지젤.”

다이한이 그런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지젤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주룩 흐르는 걸 본 다이한은 눈을 깜박였다. 그는 그녀의 뺨을 적시고 있는 눈물이 그녀의 푸른 눈 색깔과 같다고 생각했다. 눈물은 분명 투명한데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왕비께서는 왕자님 가시는 길이 순탄하시길 바라고, 나는 굳이 피를 보기 싫으니 합의점을 찾은 것인데, 네가 비협조적이면 곤란하지.”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후작님. 제가 그냥 떠나면 되는 일인데- 애초에, 애초에 저는 알지도 못했습니다. 제대로 된 증인도 없어서, 제가 증명하고 싶어도. 저는 제가 공주라는 걸 증명하지 못해요!”

“가장 쉬운 방법은 당장에 널 죽여버리는 건데. 그리하지 않았으니, 감사히 여겨야지.”

“정말로, 저는 아무 뜻도 관심도 없습니다. 후작님, 믿어주세요.”

그가 그녀의 절박한 말들을 가볍게 흘려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후작님, 아버지께서도 그저 어린 제가 마차에서 죽어 가고 있으니 조용히 데리고 오셨을 뿐이에요. 그런, 감히 왕비님께 대적하고자 하는 불순한 마음은 품지 않았습니다.”

“글쎄.”

다이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면, 왕비는 더 불안해할 게 뻔했다. 기어코 찾아내 후환이 없도록 만들겠지. 사실, 왕비는 지금이라도 지젤을 죽여 없애고 싶어 했다. 이 일을 아는, 혹은 알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다 없애야 속 시원해할 터였다.

“제발, 제발 후작님. 제발.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떠나서, 이 나라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제발.”

미하엘과 조용히 떠나서 산에서 살겠다고 애원하는 지젤을 보며, 다이한은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똑똑하다고 들었는데, 실망스러워.”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걸 보니. 다이한의 말에 지젤이 절망감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다이한이 그녀를 불렀다.

“지젤.”

지젤은 그의 부름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럼, 그럼. 그냥, 죽거나 결혼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도 안 돼. 아니, 나 때문에 아버지와 이엘리야가. 우리 가족이 해를 입으면. 그러면 그녀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근데, 내 미하엘은. 미하엘은.

“지젤 아벨린.”

그가 음산하게 부르는 소리에도 그녀는 반응이 없었고, 다이한은 망설임 없이 발을 들어 올렸다. 그가 구둣발로 그녀의 하얀 손등을 꾹 짓밟았다. 그 통증에, 그제야 지젤이 고개를 들어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

지젤은 묵직한 구둣발에 밟혀 쓰라린 손등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다이한이 입을 열었다.

“뭐가 문제일까.”

살려주겠다고, 이렇게 방법도 제시하고. 심지어 후작 부인으로 만들어주겠다는데. 어쩌면, 허울뿐인 공주 자리를 되찾는 것보다 더 이득일 수도 있었다. 다이한이 그녀의 손등을 밟고 있는 발을 치우지 않고 묻는 말에 지젤이 입을 열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후작님과 결혼할 수 없어요.”

깊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그녀의 말에 다이한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몹시 낯설고, 웃긴다고 생각했다. 다이한은 기본적으로 감정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속삭이는 말들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건 어느 때든 변할 수 있고, 잡히지도 않고, 형체도 없으며 지극히 주관적이었다.

“사랑?”

지젤은 그의 무덤덤한 목소리 이면에 비웃음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지만, 꿋꿋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무지하게도 그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했다.

“네, 같이. 평생 같이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저는 그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건 다 관심도 욕심도 없어요. 제발, 믿어주세요. 죽은 듯이, 정말 없는 사람처럼 살게요.”

다이한은 그녀의 말들이 무모하다고 느꼈다. 오늘 끝날지, 내일 끝날지 모르는 그 사랑이라는 허울뿐인 말에 인생을 저당 잡히겠다고? 더 풍족한 길을 두고, 언제 서로에게 질릴지도 모르는데. 아까보다도 서늘한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평민이랑 같이 도망치겠다는 건, 그 평민도 이 일에 대해 안다는 건가.”

다이한의 물음 아닌 물음에 내포된 뜻을 단박에 알아챈 지젤이 화들짝 놀라서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요, 아니요. 몰라요. 그 사람은 몰라요, 정말로. 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된 뒤로 만난 적도 없습니다.”

혹시라도 미하엘이 해를 입을까 지젤은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사랑.”

지젤의 말은 듣지도 않은 그가 그 단어를 입 안에 굴려보고는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그 얼굴에 띄우고 있는 냉소를 확인한 지젤은 숨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나를 오해하게 만들지 마.”

다이한이 뜬금없이 하는 말에 지젤이 미간을 찡그렸다. 오해? 무슨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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