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저택의 뒷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서며, 지젤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어딘지 소란스러운 게, 벌써 아버지가 깨어나셨나? 그럼, 화장하고 산에 올라간 걸 들킨 거 아니야? 지젤이 괜히 찔려서 옷에 남은 미하엘의 향수를 털어내려 애쓰는데, 주방에서 튀어나온 하녀 한 명이 그런 지젤을 냅다 끌어당겼다.
“아가씨, 빨리요! 후작님께서 오셨어요!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
“후작?”
“다이한 다니엘 후작님이요!”
이번에 끝난 전쟁에서 공을 세워 작위를 받은 젊은 후작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황국으로부터 직접 작위를 받았고 현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작은 왕국의 왕을 넘어서는 권력가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데다가. 그가 아직 미혼인지라, 사교계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후작에 대해 떠들고는 했다. 근데, 왜? 지젤이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함을 표하는데도 하녀는 급해 보였다.
“어서, 옷 갈아입고 응접실로 가셔야 해요!”
드레스가 마땅한 게 있을지 모르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하녀를 보며 지젤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아니. 잠깐만 후작님이 왜? 그리고, 내가 왜?”
“아가씨를 보러 오셨다니까요. 빨리, 빨리 어서요!”
날 보러 왔다고? 지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날 보러올 이유가 뭐가 있어? 왜?
“마샤, 이거 놓고 말해!”
주방을 지나 저택의 입구까지 끌려온 지젤이 하녀를 거센 힘으로 밀치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후작이 왜 날 보러왔다는 거야?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야. 후작이 날 보러 왔다니? 알아듣게 설명해.”
지젤이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연신 깜빡이며 묻는 말에 하녀가 답답한 듯 입을 벌렸으나, 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엉뚱한 소리라는 말까지 들을 일인가.”
낡은 저택의 중앙 계단에서 삐걱 소리가 괴이하게 울렸다. 응접실이 있는 2층에서부터 천천히 나무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남자를 지젤은 본 적이 없었다. 맹세코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만큼 서늘한 눈을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혼기가 찬 그대에게 청혼하러 온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그의 금발이 낡아서 생기를 잃은 샹들리에의 초라한 빛에도 반짝였다. 그녀는 그의 초록 눈이 따스하기는커녕 차갑게만 보인다는 게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었고, 기이한 감상이었다.
“청혼이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느새 계단을 다 내려와 지젤의 코앞까지 당도한 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그녀의 얼굴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바닥에 가라앉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낮고도 무거운 목소리였다. 지젤과는 상반되는 음색이었다.
“전쟁 영웅께서, 고작 저 같은 이에게 청혼하다니요?”
그녀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 커다란 사내를 보며 기죽지 않으려 노력했다.
“청혼하러 온 이에게 하는 인사말치고는, 굉장히 무례하네.”
“무례를 범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저희는 일면식도 없는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 드린 말씀입니다.”
다이한은 눈에 힘을 주고 이쪽을 향해 따지고 드는 지젤이 의아한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감사히 여겨야지.”
“감사요?”
“그대 말처럼, 고작 이런 집안과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니.”
그의 건방진 말에 반박할 단어를 쉽사리 찾지 못한 그녀가 입을 벌린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꿈꾸고 있나? 사실, 아까 미하엘에게 청혼받은 것부터가 꿈이었나? 그렇게 보고 싶었나?
다이한은 그런 지젤에게서 눈을 떼고, 이쪽으로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는 그녀의 여동생 이엘리야를 쳐다봤다. 지젤과 비슷한 붉은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이엘리야는 그 기세에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이엘리야는 수도 내에 떠도는 후작에 대한 소문을 떠올리고는 급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매몰차고, 냉정한 전쟁 영웅.
그는 그녀의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를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젤이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자,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지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뭔가 알았다는 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래, 지젤.”
그리고는 이제 미련 없다는 듯이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안 돼. 지젤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후작님!”
아니야, 청혼의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고 그녀는 그걸 확실하게 거부해야 했다. 다이한이 천천히 몸을 돌려 절박해 보이는 그녀를 돌아봤다.
“후작님, 죄송하지만. 저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허니, 과분한 청혼을 물러주세요.”
아버지가 만약에 받아들이기라도 한다면. 받아들이겠지. 상인의 아들보다, 미하엘보다 더 돈이 많고, 계급도 높은 귀족 가문이니까. 지젤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는 걸 보면서도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지젤이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제발.
“남작님께서 지젤 양에게, 설명을 좀 해주셔야겠군요.”
다이한은 지젤이 아닌, 계단 위에 서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고는 그대로 저택을 나섰다.
“무슨 설명이요?”
지젤이 황망하게 그의 아버지를 올려다보자,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남작은 그녀를 향해 올라오라며 손짓했다. 지젤은 저도 모르게 후작을 밀치고, 그보다 먼저 이 저택을 빠져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
서재로 들어선 남작이 왼손으로 책상을 짚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젤은 아버지의 안색이 본인보다 좋지 못함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더 급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버지, 저. 저 다른 사람한테 청혼받았고 수락했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지젤이 급하게 말을 쏟아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당장 이번 주 안으로 저택으로 데리고 올 거예요. 후작님께서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저, 지참금도 필요 없어요!”
절박해진 지젤이 매달리다시피 아버지의 오른손을 잡아끌었다. 정말로,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지만 필요 없었다.
“지젤.”
남작이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이걸 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혀서 혀를 지그시 깨물었다.
“지젤, 지금부터 내 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야 한다.”
그녀는 그게 무슨 말이든 듣기 싫다고 거부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황국이 북쪽 땅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전쟁으로 다이한 후작이 황국에서 후작 작위를 받은 건 알지?”
“네, 그런데-”
그게, 제 결혼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려 했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더 빨랐다. 남작은 급하게 입을 여는 딸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로 인해, 황국이 밀어 넣은 현 왕비의 권력이 강해진 것도 알고?”
지젤은 갑자기 정치 교육을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25년 전, 왕국이 황국의 속국이 된 이후에 정치는 편 가르기가 되었다.
“전 왕비, 달리아 안나 님께서 마차 사고로 돌아가신 이야기는 기억하느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근데, 그게 제 결혼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왕국의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커지던 무렵, 전 왕비는 한 살배기 공주와 함께 마차 사고로 죽었고. 황국에서는 왕의 슬픔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황제의 조카딸을 왕비로 들일 것을 명했다.
황족 출신의 왕비는 왕과 대등한 권력을 지녔고, 내내 아이를 가지지 못하다가 3년 전 왕자를 출산했다. 그리고, 작년 말 병약한 왕이 침상에 드러누워 오늘내일하고 있으니. 실상 지금 왕비는 왕과 다름없었다.
“왕비와 후작이 알아 버렸단다.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그 마부를 찾아냈다고 하더구나. 지젤, 우리는-”
“어떤 마부 말씀이세요?”
그녀는 쇠약하다 느낀 적 없던 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는 걸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공주가 죽지 않았다는 걸, 왕비가 알고 있어.”
남작이 눈가를 양손으로 가리고, 한탄하듯 속삭이는 말에 지젤은 눈을 깜빡였다.
“공주가 안 죽었다고요?”
분명, 귀로 말을 듣고 있음에도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왕자는 겨우 세 살배기고, 왕은 당장 오늘 죽을지 모르는데. 공주가 장성해서 살아있다는 걸 알았으니.”
공주가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걸 알면, 왕국이 전체적으로 술렁일 터였다.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왕비가, 그 표독스러운 여자가 널 살려두려고 할 리가.”
“저요?”
“당장 친황국파의 반대파이자. 전 왕비의 친정인 달리아 백작도 가만두지 못해 이를 갈고 있는 여자가-”
지젤은 아버지의 말들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일까, 이게. 그러니까.
“공주요?”
“지젤, 후작은 지금 청혼하러 온 게 아니야.”
남작은 자신의 불쌍한 첫째 딸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저도 굳이 피를 보고 싶지는 않으니, 이쪽 편에 설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적어도, 왕비님께서 거슬리지 않게 느끼시게끔.’
‘기회라니.’
‘얌전한 후작 부인 정도면, 적당하겠죠.’
후작의 덤덤하고도 평온한 어조가 사슬처럼 남작의 목을 졸랐다. 그는 힘없는 귀족이었으므로 지젤을 지켜낼 수 없었고, 그건 달리아 백작가도 마찬가지였다. 다이한 후작은 콕 집어, 지젤이 공주임을 알고 있다고 했다.
‘아닙니다! 지젤은 정말 제 딸입니다. 정말로, 지젤은-’
‘왕비께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하십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후작의 단호한 말이 재차 남작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왕비가 이미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고 하니, 아니라고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후작의 제안을 거절하고 지젤이 왕족임을 인정받아 궁으로 들어간다 한들 왕비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마지막 기회를 제안하러 온 거지.”
지젤은 그대로 힘없이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부축하며, 숨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