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3)화 (3/135)

03.

지젤이 생각하기에, 다이한 후작과 자신의 관계는. 악연. 악연이었다. 그 외에는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그건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적어도 지젤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이한 후작은, 왕비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소박한 행복들을 망가트렸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지젤은 본인의 삶이 완벽하다고 느꼈기에 그건 더욱 뼈에 사무쳤다. 비록 유복한 집안은 아닌지라 사용인들과 함께 저택을 관리해야 했고, 지참금도 부족해서 사교계의 결혼 시장에는 발도 내밀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때의 그녀는 행복했었다.

넓기만 하지, 여기저기 낡아서 가끔 비도 새어 들어오는 저택에서의 삶 또한 만족스러웠다. 그곳에는 자신보다 한 살이 어린 다정한 여동생이 있었으며, 무뚝뚝하지만 누구보다 자매를 걱정하는 아버지가 계셨다. 어머니는 자매가 말을 떼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은 셋이서 단란한 가정을 이뤄냈었다.

그런 지젤에게는 가족들이 모르는 작지만, 소중한 비밀이 있었다. 여동생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듯했지만.

“언니는 왜 그렇게 겨울을 좋아해?”

여동생 이엘리야의 지적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지젤은 애써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였다. 눈치도 빠르지.

“글쎄, 내가 그랬던가? 이엘리야, 여기 양파 껍질 남아있어.”

그녀는 뻔뻔하게 동생의 의심 어린 눈초리를 회피했다. 사실, 1년에 한 번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 시기는 그녀가 가장 들뜨는 때였다. 이엘리야는 아닌 듯하면서도, 치장을 한 채로 주방의 뒷문으로 저택을 빠져나가는 언니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매일 새벽마다 화장하고 나가는 거, 아버지가 아시면 혼내실 텐데.”

그렇지만 착한 동생으로서 이엘리야는 언니의 작은 비밀은 같이 묻어두기로 했다.

“이런 동생을 두다니, 언니는 운도 좋아.”

이엘리야는 지젤의 뒷모습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

지젤은 영지 끝에 걸쳐진 작은 산을 오르며, 입 밖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저하지 않고-]

불안과 근심을 떠나가리. 그녀의 청아하고 맑은 소리가 새벽 공기를 울렸다. 지젤이 아침 산책을 핑계 삼아 산에 오르기 시작한 건 열 살이 되던 해 겨울부터였다. 키가 지금의 반토막이었던 그녀는 종종 험한 산을 오르다 가끔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몸에 상처가 생기고는 했다. 그 상처를 숨기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그만큼 어렸던 그녀가 이제는 성인이 되었으니, 이건 이제 10년째 되는 일과였다. 그녀는 저택에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그래도 귀족 집안의 체면을 지키라며, 지젤이 노래 부르는 걸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이 왕국에서 노래로 먹고사는 건, 집시들뿐이었으니까.

산의 중턱에 있는 작은 평지에 도착한 그녀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작은 소리로 노래를 이어 부르기 시작했다.

[밤하늘에 빛도 없고, 온 누리는 어둡고 고요한.]

그녀의 붉은 곱슬머리가 이제 막 떠오르는 햇빛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뭇잎에 맺힌 새벽이슬처럼 맑고도 깨끗한 음색이었다.

[시냇물은 종알대고, 미풍이 불어와-]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가 그렇게 크지 않음에도 그곳 전체를 충만히 채울 것처럼 또렷하게 울렸다.

[그 미풍이 내 마음을 달콤하게 하니.]

그다음 소절을 부르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던, 지젤은 코를 스치는 익숙한 향수 냄새에 눈을 번쩍 떴다. 가벼운 비누 향으로 시작해서, 포근한 사향으로 마무리되는. 지젤은 본인이 개처럼 킁킁거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게 누군지 눈치채자마자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미하엘!”

그녀가 너무나 사랑하는 청년이 반듯하게 서서 웃고 있었다. 미하엘은 본인의 품으로 폭 안기는 지젤을 부둥켜안으며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놀라게 해주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그가 지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며 물었다.

“기다렸는걸.”

이제 겨울이니까, 넌 겨울과 함께 오니까. 향수 냄새로 눈치챘다는 건, 좀 변태 같으니까. 지젤이 발그레 상기된 뺨을 숨기지 못하고, 솔직하게 고백하자 미하엘의 검은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조금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일이 그렇게 안 풀렸어.”

올해는 가을쯤 오려고 했는데. 미하엘의 말에 지젤은 냅다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어쨌든 왔으니, 그녀는 모든 괜찮았다. 미하엘은 황국과 왕국을 오가는 상인의 아들이었고, 그래서 겨울에만 이곳을 들를 수 있었다. 5년 전, 산에서 우연히 마주한 이후로 그들은 매일 겨울 아침마다 이곳에서 서로를 기다렸다. 둘이서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둘은 그렇게 서로를 기다리는 사이가 되었다.

“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 마저 들려줄까?”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관객인 미하엘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노래를 듣다가, 가끔 멍해진 얼굴로 이쪽을 보는 게 좋아서. 지젤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에게서 한 발 멀어지자, 미하엘이 곤란한 듯 한쪽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빨리 가봐야 해.”

정말, 잠깐 얼굴 보러 온 거라. 시간이 안 되는데 억지로 짜내서 만들어 온 미하엘이 안타깝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하는 말에 지젤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는 건 숨길 수가 없었다. 아니, 반년이 넘게 얼굴 못 보다가 오늘에서야 다시 만났는데.

“서운해?”

미하엘이 누가 봐도 기분이 상한 듯 고개를 돌린 채로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리고 있는 지젤에게 물었다.

“아니.”

전혀? 내가 왜? 지젤이 미하엘을 쳐다도 보지 않고 묻는 말에 그가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바쁘신데, 얼른 가버려.”

나도 하나도 안 아쉬워. 지젤의 말에 웃음을 삼켜낸 미하엘이 퍽 서운하다는 듯 울상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서운하네.”

“네가?”

섭섭한 건 이쪽인데? 지젤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는 그녀보다 훨씬 키가 큰 청년이. 아니, 키만 큰 게 아니었다.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는 걸 지젤은 그때야 깨달았다. 미하엘의 흑발이 유난히 짙고도 어둡게 보였다.

“나는 오늘만 기다렸는데.”

그녀를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기울이는 미하엘이 갑자기 낯설어서 지젤을 눈만 깜빡였다. 뭐랄까, 작년에만 해도 갓 성인이 된 풋풋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약간 어른 같달까. 아니, 나도 어른인데 약간-

“지젤.”

그가 다른 생각에 빠진 그녀를 차분하게 건져냈다.

“으, 응?”

목소리가 저렇게 낮았나.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을 그러쥐고 있는 손도 유난히 커 보였다. 아니, 손가락이 이렇게 굵었나? 비슷했던 것 같은데-

“할 말이 있어.”

“어떤 말?”

“정말 중요한 이야기야.”

미하엘이 이쪽에 집중 못 하고 있는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우리 둘 다, 더는 섭섭하지 않고. 서운하지 않게.”

않게?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던 지젤은 미하엘의 붉고도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는 걸 급하게 막았다.

“잠깐!”

그녀의 작고 하얀 손에 입이 턱 막힌 미하엘의은 검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만 봤다. 지젤은 그가 황당해하는 걸 알면서도,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지참금이 없어.”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가 할 말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미 마음이 통한 지 오래되었고, 작년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고 난 뒤에는 지젤은 온종일 울면서 다녀야 했으니까. 그렇지만, 창피하고 부끄러워도 그녀는 미하엘에게 이야기해줘야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도 지젤의 집안에 대해 들은 게 있겠지만. 그래도.

“지젤.”

미하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지참금 같은 푼돈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지 멀쩡한 내가, 너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할까.”

어쩜, 항상 이렇게 엉뚱하고도 배려심이 깊을까. 미하엘이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에 지젤은 귀가 녹아내린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 이야기했잖아. 산 위에서 둘이 별을 보며 살면 좋겠다고.”

다른 것들은 다 지워버리고, 잊어버리고. 말을 끝마친 미하엘은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한 채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가 무어라 더 말을 이으려는데, 더 이상 참지 못한 지젤이 그의 손을 떨치고는 그의 양 뺨을 부여잡았다. 미하엘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의 하얀 뺨이 작은 손에 의해 살짝 짓눌렸다.

미하엘의 검은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걸 보면서, 지젤은 그의 입술 위에 자기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겨울 공기보다 뜨거운 체온과 체온이 맞닿아 이상한 열기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차오르는 이 감정을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런 충동적인 감정에 이은 행동이었다. 지젤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그의 입술 위에 자기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푸하.”

쪽 소리도 안 날 정도로 과격하게 입술을 눌렀다가 뗀 지젤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여태 숨을 참아서인지, 아니면 입을 맞춰서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생전 이런 걸 해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이게 제대로 된 건지 아닌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숨 막히는 건가?

미하엘이 그런 지젤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기만을 반복했다. 지젤은 그의 그런 멍해진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뭐가, 잘못된 건가?

“너, 진짜.”

미하엘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어딘지 자존심이 상한 지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비웃은 거야? 비웃는 거야?”

그가 그런 그녀를 확 끌어당겨 안고는 그녀의 오른뺨과 왼뺨에 번갈아 쪽쪽 소리 나게 입 맞췄다.

“열흘만 기다려. 아니, 일주일만.”

널 두고 어떻게 다녀오지. 그가 이제는 자신보다 작아진 그녀를 으스러트릴 것처럼 끌어안고는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주일은 너무 힘들고 긴 시간이었다.

“아니야, 나흘 만에 다녀올게.”

얼굴이 터질 것같이 붉게 물든 지젤은 드물게 입을 다문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한 달이 되더라도. 일 년이 되더라도 이런 기분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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