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2)화 (2/135)

02.

복도 저 끝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금발의 남자가 짧게 혀를 찼다. 그 짜증스러움이 와닿는 태도에 미하엘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저 빌어먹을 새끼가 누군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네 신부?”

지젤이 네 것이라고. 미하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이한 후작을 마주했다. 다이한과 미하엘의 키가 엇비슷했기에, 미하엘은 일부러 고개를 들어 그를 내려다봤다.

이쪽을 보고도, 전혀 기죽지 않는 그 살의에 찬 검은 눈을 본 다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지젤보다 어린 평민이라고만 들었는데, 생각보다 당차 보였다. 어찌 되었든, 다이한의 눈에는 생선을 빼앗겨, 이쪽을 경계하는 검은 고양이쯤으로 보였다. 그만큼 가소로웠다.

“내가 청첩장을 보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다이한이 내뱉은 농담조의 말에, 지젤이 몸을 부르르 떨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속에 숨겨진 짜증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안 돼, 내 미하엘. 지젤은 준수하기로 유명한 젊은 후작을 올려다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결혼식에 어울리도록 깔끔하게 정돈된 금발 머리가 그의 인상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에메랄드빛 초록색 눈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미하엘을 훑고 있었다. 안 돼, 절대로. 그녀는 그가 자신의 미하엘에게 손대게 둘 수 없었다.

“지젤.”

다이한이 나직하게 그런 지젤을 부르며 고개를 까딱였다. 지젤이 퍼뜩 고개를 들어, 그런 다이한을 마주 봤다. 이목구비가 진한 그의 눈매가 더 짙어 보였다. 마지막 경고였다. 사실, 다이한의 성격 같아서는 그냥 피를 보거나 끌어내서 해결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어찌할 줄 모르는 지젤이, 어딘지 애처로웠기 때문에.

“미하엘, 이제 어서 가.”

빨리. 그녀가 불안에 몸서리치며, 미하엘을 밀어내자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토해냈다.

“널 두고, 내가 왜.”

아까 말했던 것처럼, 피를 보기에, 딱 좋지 않아? 미하엘이 지젤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그녀의 앞에서 순한 양처럼 가면을 쓰고 있던 것들에 대해 후회했다. 그의 원래 성격을 보여줬더라면, 감히 일을 이렇게 만들 생각도 못 하지 않았을까.

“피를 보겠다고.”

다이한이 미하엘의 말에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이 멍청한 게 굳이, 자비를 베푸는 줄도 모르고 여기서 죽겠다면. 그 알량한 약속 눈치를 보며 참을 필요는 없었다. 방금까지 대강 내보내려던 그는 단숨에 마음을 바꿔먹었다.

“아니야, 제발.”

그만해. 지젤이 미하엘의 양어깨를 잡아 밀어내려는데, 다이한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는 지젤이 그 이상 미하엘에 닿는 걸 허락해줄 생각이 없었다. 다이한은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 본인 쪽으로 끌어당겼다. 배려심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우악스러운 힘에 지젤이 휘청거렸다.

“네가 정녕 죽고 싶지 않고서는.”

지젤에게 다소 폭력적으로 구는 다이한의 거침없는 행태에 미하엘의 검은 눈이 희번덕였다. 기껏해야, 황국의 개노릇 하며, 이 작은 나라 팔아먹는 짓이나 하는 비열한 새끼가. 미하엘이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고, 다이한의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급하게 뛰어왔기에, 날붙이를 챙길 생각조차 못 한 그는 다이한의 검으로 그의 목을 꿰뚫어줄 생각이었다. 다이한이 전쟁에서 얼마나 굴러먹은 인간이든, 미하엘은 개의치 않았다. 태생부터 죽을 고비를 수백 번 넘긴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상대에게서 피를 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지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검을 들고 있는 전쟁 영웅과 검은커녕 돌멩이조차 쥐고 있지 못한 상인의 아들을 보고 속으로 절규했다. 안 돼, 안 돼. 그녀는 미하엘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이 하찮은 것 때문에, 결혼식이 미뤄지는걸. 내가 어디까지 인내해야 하지?”

다이한의 말에, 미하엘이 비소를 띠고는 몸을 움찔 떨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지젤은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니야, 미하엘 안 돼.”

그녀는 겁을 잔뜩 먹은 채로, 미하엘을 만류했다. 네가 후작에게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볼 자신이 없어. 그런 말들을 필사적으로 내뱉는 지젤을 보며, 미하엘이 이를 아득 물었다. 그녀의 눈물이 미하엘의 목까지 차올라 숨통을 틀어막았다. 그와 달리, 다이한은 그런 지젤의 슬픔에 별 감흥이 없었다.

다이한은 그 이상은 기다려주지 않고, 지젤의 어깨를 잡아끈 채로 등을 돌렸다. 지젤은 다이한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며 미하엘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이 순간, 다이한이 약속대로 검을 빼 들어 미하엘에게 해를 입히지 않은 것 자체가 감사스러웠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지젤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미하엘은 순식간에 자신을 떠나가는 신랑, 신부의 뒷모습을 보고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인내심의 한계치를 넘어선 그는 그대로 그 둘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다정하게 굴고 싶었고, 보이지 않으려 했는데. 지젤, 네가 자초한 것이니.

“저하, 저랑.”

그 순간, 고개를 푹 숙인 중년의 남자가 미하엘의 뒤에서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저랑 이야기하시죠.”

어딘지 힘없는 목소리로 지젤 쪽은 쳐다보지 못하는 남자를 본 미하엘의 입꼬리가 어그러졌다. 그가 명백한 경멸을 담고, 남작을 내려다봤다.

“딸 팔아먹은 아비가, 내게 할 말이 있나?”

“제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하, 그러니 여기서는 제발.”

미하엘은 지젤의 아버지인 아벨린 남작을 잠깐 내려다보다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가 누군지 알아본다는 게,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허나, 그걸 알면서도 지젤을 저 후작에게 보낸다는 것이 그의 분노에 불을 지펴냈다.

내가 방심했지. 이 작은 나라의, 가난한 영지에 꼭꼭 숨겨져 있어서. 그 본인조차도, 우연으로 찾아낸 반짝이는 사람이니. 괜찮을 거라고. 그러나, 지금 이건. 아무도 탐내지 않을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한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했다. 후회와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제법 멀어진 지젤을 쫓아가는 미하엘을 보며 남작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지젤을, 저 불쌍한 아이를 살려주셔야 합니다.”

그 말에 미하엘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는 점점 멀어지는 지젤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 작게 탁한 숨을 내뱉었다. 그가 턱 근육이 움찔거릴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쫓아가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본보기로 저 새끼를 죽이고 지젤에게 겁을 줘서 데려오는 건데.

“제가 부탁드릴 분이, 저한테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십쇼. 저 아이도, 정말 저하를-”

미하엘의 냉철한 이성은 지젤이 저렇게 자신을 밀어낼 이유가 없으니, 그걸 알아야 한다고 그를 멈춰 세웠다. 그래서, 그는 지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

식장 입구에 다다르자, 다리에 힘이 빠진 지젤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이한이 그런 그녀를 억지로 잡아채 일으켜 세우려 했는데, 지젤이 그의 손을 매섭게 내쳤다. 미하엘에게 미안한 만큼, 다이한에 대한 분노가 커졌다.

“너무, 미안해서.”

미안해. 내가, 내가. 그녀는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문지르며 숨을 토해냈다. 헛구역질이 일어서 식장에 들어설 수 없었다. 이대로 미하엘을 쫓아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는 결혼식 시작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식장에서 신부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 따위도 궁금하지 않았다.

다이한이 그런 지젤을 보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평온하게 중얼거렸다.

“결혼식 날, 신부가 그리 울면 내가 오해를 살 것 같은데.”

내가 울렸다고. 그녀는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검은 구두를 보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작은 한숨이 스쳐 지나가더니 후작이 그녀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탁.

지젤이 빠르게 그의 손을 쳐내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제가 알아서 들어갈 수 있으니, 손대지 마세요.”

울먹이는 목소리가 품은 날카로운 말에 다이한은 고개를 까딱였다. 정말, 잠깐 기다리던 그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그가 보기에 지젤은 혼자서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지젤에게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고집부리지 말고, 잡아.”

흰 장갑을 끼고 있는 그 손에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을 애써 지워내며 지젤을 고개를 저었다. 그가 지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부은 눈두덩이에, 이리저리 번진 화장이 도저히 새 신부로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이리 엉망이니.”

쯧. 혀를 찬 다이한이 지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겨우 그녀보다 세 살 많으면서, 매사에 저렇게 침착했다. 그녀는 그것마저도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젤은 그가 자기 몸에 스스럼없이 손대도록 두지 않았다.

“내가.”

지젤이 그를 강하게 밀쳐내자, 그의 잘 정돈된 금발이 흐트러졌다. 잘생기기로 유명한 젊은 후작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지젤이 그런 다이한을 보며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기어서라도 들어갈 테니,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다이한은 그녀가 내친 자기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까딱였다. 이쪽도 귀찮은 일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 귀찮은 일이, 식장에 입장하기 싫어서 징징거리는 새 신부 얼굴 닦아주는 일이라면 더욱.

“부인께서 그러시다니.”

편하신 대로 하라며. 후작은 자신의 뒤에 있던 하녀들에게 손짓하고는 식장으로 먼저 들어섰다. 하녀들이 그런 후작의 눈치를 보며 잽싸게 지젤의 얼굴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얼굴이 퉁퉁 부으셨어요.”

“일단, 눈 화장은 다 닦아내야겠는데.”

그들 중 아무도 그녀에게 왜 이렇게 우셨느냐고 묻지 않았다. 후작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지젤이 원하지 않는 결혼식이라는 걸. 지젤은 그런 하녀들을 밀치고 그대로 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얼굴이 엉망이신데!”

누군가의 외침에 지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악물었다. 이미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결혼식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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