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하얀 꽃들로 장식된 복도에 지젤의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외롭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저택 한 채 값이라는 진주가 달린 흰색 드레스를 입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얀 비단 장갑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지젤은 그게 차디찬 수갑과 같다고 느껴졌다. 곱슬곱슬한 붉은 긴 머리 사이사이, 붉은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다. 공허한 공간에 홀로 있음에도 그 누구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눈물로 흐려진 지젤의 푸른 눈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마저도 아름다웠다. 중간쯤 걷던 지젤은 복도 끝에 서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이런 행동 앞으로는 조심해. 나는 이제, 후작 부인이 될 몸인데. 괜한 풍문에 휩쓸리고 싶지 않으니.”
신부가 식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혼자이기에 다행이지. 지젤이 무심하게 그에게 경고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미하엘은 고개를 기울여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지젤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지젤은 부러 그를 바라보지 않고, 빳빳하게 고개를 든 채로 앞으로 걸었다. 그가 그런 그녀의 걸음을 멈추기 위해 입을 열었다.
“새 신부가 되는 걸 축하해.”
그 고저 없는 비아냥거림에 지젤은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이미 그를 지나쳤기에, 당장이라도 흐느낄 것 같은 이 표정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뚝 멈춰 선 지젤이 금세 숨을 가다듬고, 평온을 가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러나, 목소리의 끝이 갈라지는 건 숨길 수 없었다. 미하엘이 그녀에게로 발걸음을 옮기자, 지젤의 것보다 둔탁한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넌 오늘 이대로 식장에 들어서서 후작가의 어여쁜 새 신부가 되고.”
지젤을 뒤돌아보지 않아도, 미하엘이 바로 그녀의 뒤에 붙어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그래, 욕을 해. 지젤은 비난을 감수할 생각이 충분히 있었다. 욕먹는 것 따위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더한 모난 말들을 했었으니, 이 정도 모욕은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아니, 모욕이 아니고 정당한 분노였다.
그래서 지젤은 차분하게 숨을 멈춘 채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일은 비운의 과부로 남을 텐데.”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비난이었다. 아니, 그건 협박이었다.
“미하엘.”
“네가 저 후작을 살리고 싶어서, 식장에 들어서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경솔하게 굴지 마. 그렇게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이제 와 식장 안에 서 있는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을 죽인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녀는 후작이 죽은 송장이라 해도 오늘 결혼해야 했다.
“그런 협박으로는, 날 겁먹게 할 수 없어.”
그녀의 말에 미하엘이 그의 흑발이 흩날릴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가 너무 잘 어울려서, 이대로 물리기에는 아깝기도 하네.”
그럼, 네 뜻대로 들어가도록 해. 미하엘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정말로, 그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 속내가 행동과 정반대된다는 걸 지젤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한 대쯤 맞을 각오를 하고 입을 열었다.
“미하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 우린 아무것도 없는 애들일 뿐이야.”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꼴을 볼 수는 없어. 그녀가 한숨을 토해내며 뒷말은 삼켜냈다.
“그렇게 말하면, 네 속이 좀 편해지는 것 같으니. 좋아, 계속해.”
그는 이제 상처받지 않았다. 지젤이 하는 의미 없이 뾰족하고 날카롭기만 한 말들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켜줬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젤.”
우리가 함께한 모든 날이 그러했듯이. 미하엘이 쓰게 웃어 보이며 그녀의 허리 끝에 살랑거리는 붉은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모든 건, 네 선택으로 이루어지니.”
그의 뜨거운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매만지듯 타고 올라와 단숨에 어깨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걸음을 옮겨.”
그의 경고에 지젤은 태연하게 코웃음을 쳤다.
“과부? 상관없어.”
차라리 감사한 일이지. 지젤은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래, 미하엘이 후작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일개 평민의 아들이, 후작을 죽여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홧김에 하는 말들이 분명했다.
“그럼, 나는 후작을 잔인하게 살해한 죄로 교수형을 당할 텐데.”
미하엘의 덤덤한 말이 지젤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네가 죽겠다고? 그 한 문장에 그녀는 올가미에 걸려 움직일 수 없는 짐승이 된 기분이 들었다. 지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미하엘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
“내 목이 광장에 걸려도 상관없어?”
“뭐라고?”
지젤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너무나 사랑하는 그의 검은 눈이 웃음기를 담고 휘어지는 걸 보며 지젤은 아연하게 그를 불렀다.
“미하엘.”
미하엘이 그녀에게 한 발 더 다가서자, 지젤은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굳은 눈매가, 파르르 떨리는 입가가 그의 분노와 원망을 보여주는 듯했다.
“내 시체를 지르 밟아가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라면.”
미하엘이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속삭였다.
“그대로 걸어 들어가.”
네가 할 수 있다면, 그래. 미하엘은 그녀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너.”
지젤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녀들이 애써서 예쁘게 바른 눈 화장이 그녀의 푸른 눈에서 뚝 뚝 떨어진 눈물로 흘러내려 버렸다.
“봐, 지젤.”
그가 그녀의 눈가를 엄지로 스치듯 닦아주며 속삭였다. 그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넌 거짓말을 너무 못해.”
내 사랑스러운 바보야. 미하엘은 지젤의 뺨이 눈물로 얼룩진 걸 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이렇게, 아파할 거면서.
“아니야.”
재빠르게 부정한 지젤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기 위해, 눈을 계속 깜빡거려야 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그러지 않으면 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 같이 가야지.”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폭 감쌌다. 그가 그녀의 작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애절하게, 애처롭게 빌었다. 손바닥에 닿은 미하엘의 숨결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둘이서, 약속했던 별을 보러 가야지.”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지젤은 흐느낌을 터트렸다. 가고 싶어. 정말로, 온 마음 다해서. 이 손을 놓지 않고 싶어. 그렇지만 그럴 수 없음을 지젤은 너무 잘 알았기에, 그녀는 그의 손을 밀어내지도 못한 채로 눈을 감았다.
“나는 네가 그럴 가치가 없어.”
“지젤.”
그가 그녀를 그렇게 불러도, 지젤은 갈 수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여동생. 그리고 그의 목숨을 두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왜, 널 못 따라가는지 알아?”
아주, 몹시 나쁜 년으로 기억되더라도. 그러더라도, 너는. 꼭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기를. 지젤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기에 그건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무서워서.”
너를 잃을까 봐. 지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미하엘의 얼굴을 보며 떨리는 입술을 열고, 굳은 혀를 억지로 움직였다.
“내가 정말로, 너랑 같이 산에 가서 살 수 있을 거라 믿은 거야? 이 모든 걸 두고?”
지젤이 턱 끝에 매달린 눈물을 훔치듯 닦아내며, 자신이 걸치고 있는 것들을 손짓했다.
“태생부터 이렇게 살지 않은 너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제 모습이 아주 추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이 떨어지고, 역겨울 정도로 추악해 보여서. 미하엘이 이곳을 떠나기를 바랐다.
“나는 그렇게 못 살아.”
“사랑한다고 했잖아.”
함께하겠다고. 그는 오늘 지젤을 잃을 생각이 없었기에, 울지 않으려 했는데. 방금 그 말은 좀 아팠다. 미하엘의 검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걸 보며, 지젤은 한숨을 토해냈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해.”
지젤은 눈을 가다듬고 심호흡했다. 진실에 거짓말을 섞는 건 쉬웠다.
“너를 사랑하지만, 이런 걸 포기하고 갈 정도는 아니야.”
“지젤.”
미하엘이 그녀의 뺨을 부여잡는 걸, 지젤은 빠르게 밀어냈다. 그리고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 너랑 같이 산에서 노래나 부르며 살아갈.”
지젤을 몸을 휙 돌렸다. 앞이 보이지는 않아서, 미하엘이 어떤 표정인지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 여자는 많을 테니까.”
그렇게 말을 끝낸 그녀는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흐느낌이 새어 나와 모든 걸 망칠 것 같았다. 사실은 너를 너무 따라가고 싶다고 빌고 싶었다. 너랑 같이 죽어도 좋으니, 그렇게 하고 싶다고. 근데, 그런 이기적인 선택으로 미하엘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게, 네 진심이야?”
미하엘의 물음에 지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참아냈다. 당장 먹은 것도 없는데 다 토해낼 것 같았다. 그가 방금보다 차분해진 태도로, 재차 날카롭게 그녀에게 물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우리만 생각해도. 그게 네 진심이냐고.”
“그래.”
미하엘은 그 거짓말을 믿지 않고, 가늠하듯 그녀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이게, 진심일 리가 없으니. 그래, 단순하게 그를 밀어내기 위해 하는 거짓이라 할지언정.
“다른 여자?”
그녀의 말을 곱씹을수록, 점점 그의 눈매는 매서워졌다. 그는 자신은 감히 상상으로도 하지 못할 말을 내뱉고 있는 지젤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지젤은 미하엘이 그저 일편단심에 지고지순한 줄 알고 있기에. 그는 그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 숨을 가다듬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분노를 추스르는 데는 큰 노력과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지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미하엘을 앞에 두고 있으니,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입고 있는 이 웨딩드레스가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그 숨 막히는 침묵을 깬 건. 이 문제의 중심에 있는 또 다른 주요 인물이었다.
“결혼식을 시작해야 하는데. 내 신부께서, 초대받지 못한 손님과 뭘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