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에필로그
두 사람은 퍼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약혼부터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 일단은 백작의 허락부터 받기로 했다.
“안 돼.”
“혼인이라니, 리아에겐 아직 너무 이릅니다.”
반대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한 것은 백작이 아니었다. 어떻게 두 사람이 약혼에 대해 얘기하러 올 걸 알았는지 리아의 두 오라비인 찰리와 루퍼스가 저택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강제로 응접실에 쳐들어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퍼스는 예의 그 영업 미소를 띤 채였다. 옆에 앉아있던 리아는 제 오라비들의 행태에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오라버니들은 그만 나가보시는 게 어떠세요?”
“왜? 난 충분히 있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데.”
“싫다.”
찰리야 늘 그렇듯 제 의견을 들어주지 않으니 그러려니 싶었다. 하지만 평소엔 제 편을 들어주었던 루퍼스까지 단호한 태도였다. 머리가 지끈거려 리아는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괜찮으신가요?”
“아, 잠깐 두통이 와서요.”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자, 바로 퍼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찰리와 루퍼스 또한 궁 내 퍼스에 대한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런 태도가 낯설었다. 게다가 찰리는 더더욱 치를 떨었다. 그에게 퍼스의 이미지는 건방지고, 재수 없는 애송이였다. 교제만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 사이라고 바득바득 우길 때는 언제고. 얼마 되지도 않아 혼인이라니! 당연히 인정할 수 없었다.
“둘 다 나가 있어라.”
결국 백작으로부터 축객령이 내려왔다. 버티던 둘은 사용인들에 의해 끌려나가야만 했다. 리아는 두 오라비가 창피해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서도 퍼스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응접실이 조용해지자, 백작은 퍼스와 리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표정은 찰리와 루퍼스처럼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그래, 저택엔 왜 왔는지 말해보게.”
“리아 양과 혼인하고 싶습니다.”
퍼스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그 단호하면서도 명확한 대답에 리아가 오히려 쑥스러워했다.
“리아 너도 같은 생각인 게 맞고?”
“…네.”
고작 대답 한 번 하는 건데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리아는 차마 백작과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용기를 주듯, 퍼스가 살며시 손을 감싸주었다.
“그렇게 혼인하기 싫어하더니.”
백작의 말에 리아는 머쓱해졌다. 혼인하라는 백작의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수습 기간 동안 한 달에 한 명씩 총 세 번 소개를 받으라는 거래까지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소개 상대이자, 자신에게 다른 이들을 소개해줬던 퍼스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묘했다.
“다 인연이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로군.”
백작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긍정적인 신호에 리아와 퍼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승낙해주시는 겁니까?”
“물론일세. 내 소원이 바로 리아가 혼인하는 거였으니까.”
백작의 승낙은 역시나 간단히 떨어졌다. 두 사람 다 그가 반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약혼을 하기 전에 먼저 승낙을 받아두기로 했을 뿐이었다.
“다만 리아가 페넬로페가 아니게 되는 건 반댈세.”
뜻밖의 말이었다. 사이키델리아에서는 혼인을 하면 둘 중 한쪽의 성을 쓰는 게 관습이었다. 보통은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라가곤 했다. 반대의 상황은 보통 남편이 데릴사위로 들어오는 경우였다.
“그럼 제가 페넬로페의 성을 써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퍼스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데릴사위로 페넬로페 저택에 들어오는 데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다만, 그가 페넬로페의 성을 받는 것은 의미가 달랐다. 그가 정식으로 백작 가의 일원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더 구체적으로는 후계권이 찰리, 루퍼스, 리아에 이어 퍼스에게도 주어진다는 얘기였다.
“그렇네. 왜, 베르시에를 버리기는 어려운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의 집안에 관한 건 왕궁 내에선 비밀도 아니었다. 베르시에 자작 가문이 팔아넘기듯 어린 그를 왕궁으로 보냈다는 사실은 왕궁 내의 모두가 알았다. 백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퍼스와 같이 유능한 인재가 베르시에라는 이름 때문에 일부 귀족들에게 무시당하는 게 안타까웠다.
“퍼스 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리아도 퍼스가 가족들과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평생을 살아온 ‘베르시에’를 버리는 건 달랐다. 퍼스는 자신을 걱정하는 리아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전혀 상관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퍼스에게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에게 베르시에라는 이름은 그저 태어날 때부터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부가적인 표식일 뿐이었다. 그 이름으로 받은 것도 없었다. 애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리아를 안심시키고, 확실하게 백작에게 말했다.
“혼인은 일 년 후에 할 예정입니다. 그전에는 약혼 먼저 해두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늦지?”
“아버님!”
백작은 오히려 리아가 빨리 혼인했으면 하는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래도 조금은 서운해할 줄 알았는데. 리아는 원망스러운 마음에 백작을 노려보았다.
“보나 마나 리아 네가 늦춰달라고 했겠지? 일 년 후에 하나, 지금 하나 무슨 차이가 있다고. 다른 영애들을 봐라.”
매번 하던 잔소리가 시작되려 했다. 백작 부인이 나간 이후로 백작은 더욱 잔소리가 심해졌다. 리아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허락하셨으면 그만 나가볼게요. 잔소리는 사절이에요.”
말을 마치자마자, 리아는 퍼스의 손을 잡고 끌었다.
“그럼 또 찾아뵙겠습니다.”
끌려나가면서도 퍼스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뭐가 급한지 나가버리는 리아의 뒷모습을 보며, 백작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시원할 줄 알았더니, 섭섭하군.”
왠지 벌써 눈물도 나려 하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위가 될 자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주책을 떨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
응접실에서 리아와 퍼스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찰리와 루퍼스가 달려들었다.
“설마 허락하셨어?”
“당연하죠. 두 분이야말로 평소에는 그렇게 혼인하라고 잔소리하셨으면서 왜 이제 와 반대세요?”
리아는 마치 감싸듯 퍼스를 제 뒤에 세웠다. 그녀가 보호해주려는 듯하자, 퍼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뒤에 서 있었다. 그 작태가 또 두 사람의 심기를 거슬렀다.
“퍼스 님은 그 뒤에서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뭐 어떤가요. 이 저택에서는 저보다 리아 양이 더 세신걸요.”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여유로운 표정이 더 아니꼬웠다. 찰리는 팔짱을 끼며 노골적으로 퍼스에게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아무튼 나는 이 혼인, 인정 못 한다.”
“오라버니!”
단호한 찰리의 태도에 리아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했다.
“아,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 아버님께서 혼인할 때 제게 데릴사위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뭐라고요?”
퍼스는 일부러 두 사람의 성질을 더 건드리기로 작정한 듯, 응접실에서 나눈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찰리와 루퍼스의 눈에 불이 켜졌다.
“아버님! 이게 무슨 말입니까?”
찰리는 퍼스나 리아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응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루퍼스 또한 너무 놀랐는지 할 말을 잃었다.
“이 틈을 타고 도망치죠.”
“네?”
“형님들의 허락은 나중에 받아도 충분하니까요.”
애초에 퍼스는 그들의 반대를 예상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을 것도 알았다. 그는 확신범이었으니까. 리아와 퍼스는 찰리와 루퍼스가 놀란 틈을 타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리아가 매일 올랐던 산으로 향했다. 계곡까지 쉼 없이 산을 오른 그들은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리아 양,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뭐든지요.”
그가 뭘 부탁할지도 모르는데 리아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 대답이 마치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퍼스는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꽃이 많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 저희 주변에 꽃이 피게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리아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닿는 곳에서부터 천천히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색색의 꽃이 하나씩 저마다 피어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앉은 바위를 꽃이 둥그렇게 감싸고 돌았다. 위에서 보면 그들이 꽃으로 만든 원 안에 갇힌 듯한 모습이었다.
스스로 피워낸 꽃을 바라보며 리아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거의 완벽하게 자신의 능력을 조절할 수 있었다. 한 번 붙은 자신감 덕분이었다. 그때도 퍼스의 말에 의해 능력을 제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감정에 이름을 붙일 줄 몰랐을 뿐.
“사실 전 한 번도 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리아 양이 피워낸 꽃을 처음 본 순간 생각했죠. 정말 아름답다고.”
퍼스는 사랑스럽다는 듯 천천히 리아가 피워낸 꽃을 쓰다듬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감정이 시작된 게.”
리아가 능력을 쓰며 감정의 시작을 떠올렸듯, 퍼스도 이 마음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생각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시작된 시점은 다를지 몰라도 결국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리아 양에게… 사실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차마 리아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녀가 피워낸 꽃에 시선을 고정했다. 항상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자신이 없는 태도를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사실은 리아 양에게 좋아한다고 감정을 고백하기 전부터 말했어야 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퍼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손을 살며시 놓았다. 리아는 아무런 말 없이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양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한 짝씩 벗었다.
“사실 전… 사이코메트리 능력자입니다. 맨손으로 닿은 사물이나 사람에게서 기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마음속 생각도 읽을 수 있고요.”
먼저 말하지 못한 건 알폰스의 명령 때문에 아무에게나 능력에 대해 밝히지 못한 이유였다. 이제야 그에게서 허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 기분 나쁘게!
베르시에 저택에서 겪었던 가족들의 거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알폰스 또한 그에게는 절대로 맨손으로 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퍼스는 그게 그들이 나빠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존재가 꺼림칙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도무지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비겁하게 혼인이 확정된 다음에야 솔직해질 수 있었다. 몇 번이고 그녀의 마음을 시험해서 확신을 얻은 후에야.
“퍼스 님.”
리아의 목소리에선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뒷말을 기다렸다. 그때, 손에 온기가 와닿았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맨손을 통해 그녀의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웃고 있는 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머릿속으로 스며드는 감정과 똑같이 따스한 표정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확신은 없었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싶었어요.”
“어떻게…?”
그는 멍하니 입을 열고 있었다. 분명 중간에 맨손을 꺼내 그녀의 기억을 엿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정보는 전혀 없었다.
“깨달은 건 아주 최근이에요. 왜 맨손으로 손을 잡아주지 않으실까 고민하다가 ‘아, 어쩌면….’ 하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왜 저를 받아주셨습니까?”
솔직한 물음이었다. 보통 자신의 능력을 알면 기분 나빠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이코메트리 능력자이지 않을까 추측하면서도 거리낌 없이 손을 잡았다. 안기기도 했고.
“좋아하니까요.”
리아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당연하게 대답했다. 그 단순한 대답에 퍼스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안심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이것도 늦었지만 이런 저와 평생 저와 함께해주시겠습니까?”
퍼스는 리아의 손을 살며시 끌어당겨, 손등에 키스했다. 비겁하게도 꽉 잡힌 손으로부터 리아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대답이 전해졌다. 그걸 리아도 알고 퍼스도 알았지만, 리아는 굳이 소리 내어 대답했다.
“네!”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