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혼인 말인가요?
리아는 제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 들은 이 말은… 청혼인 건가? 그녀는 놀라서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눈만 깜빡였다. 퍼스를 끌어안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퍼스가 조심스레 몸을 떨어뜨렸다.
“리아 양?”
하지만 리아는 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퍼스는 마치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한지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그 태도에 리아는 더 머리가 하얘졌다.
“지금 무슨 말 하신 거예요?”
혹시 제가 잘못 들었나. 환청인 건가? 그녀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퍼스는 그제야 리아가 놀랐다는 걸 알았다.
“이 집에 계속 올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그 방법이란 게…?”
“네, 혼인하는 건데요.”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했느냐는 태도였다. 되물어도 그에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평소에는 그런 퍼스의 얼굴을 좋아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원망스러웠다.
“왜 그렇게 태연해요? 저한테 그런 호, 혼인 같은 말을 꺼내놓으시곤?”
“전 리아 양이 왜 그렇게 놀라시는지가 더 궁금한데요.”
“안 놀라게 생겼나요? 저희는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호, 혼인은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녀가 혼인보다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 그도 알 터였다. 다 알면서도 혼인이라는 말을 꺼내니 더욱 놀랐다. 혼란이 다 가라앉기도 전에 퍼스가 쑤욱 치고 들어왔다.
“거절인가요?”
“그, 그건 아니고….”
“그럼 승낙인가요?”
“아니, 새, 생각을 좀 할 시간을 주세요! 청혼을 이런 식으로 하시나요?”
결국 참지 못하고 리아가 벌컥 화를 냈다. 생각해보니, 나름 난생처음 받는 청혼인데 이렇게 은근슬쩍 흘리듯이 당하다니! 씩씩거리는 그녀의 표정을 본 퍼스가 슬며시 웃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조차 귀여웠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가져다 댔다.
“뭐 하시는 거예요?”
방심하는 사이 그의 입술은 이마에서 눈, 눈에서 코, 코에서 볼로 계속해서 옮겨갔다.
“그만하시라구요….”
어느새 리아의 목소리가 약해져 있었다. 비겁한 방법이지만 효과가 없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쑥스러우면서도 좋은 기분을 숨길 수 없어서 더욱더 괴로웠다.
“저는 계속 다른 사람 방해받지 않고 리아 양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리아 양은 안 그러신가요?”
당연히 그녀도 그러고 싶었다. 애정표현이 익숙지 않아서 쑥스러운 것뿐이지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하게 그럼 혼인하지 뭐! 하고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계속 일도 하고 싶고….”
“일은 당연히 계속하실 겁니다. 왕궁 뒤쪽이 이 집이니까 출퇴근도 어렵지 않으실 테고요.”
“아버님 의견도 여쭈어야 하고요…!”
“백작님이시라면 쌍수 들고 환영하지 않으실까요?”
“퍼스 님 가족분들 의견도 들어봐야죠!”
“괜찮습니다. 전 가족들과 연 끊었습니다.”
퍼스는 차근차근 하나하나 리아가 거절하는 이유들을 쳐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리아가 결국 입술을 깨물었다.
“이유가 없다고 해서 혼인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에요!”
“저야말로 왜 그렇게 혼인을 싫어하시는지 궁금한데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요! 그저 아직 조금 이르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퍼스 님과 제가 연인이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감정이 얕은 건 아닙니다. 전 진심으로 리아 양을 사랑하니까요.”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이 사람은! 하지만 얼굴을 솔직하게 빨개졌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는 것뿐이었다. 리아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지자, 퍼스는 장난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의 의견을 무시하고 억지로 혼인을 추진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어필했을 뿐.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천히 생각하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혹시 천천히 생각해보고 혼인하고 싶지 않으면요…?”
그제야 퍼스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갑작스레 선택지를 줘놓고 거절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저와 혼인하는 게 싫으신가요?”
“싫은 건 아니에요! 다만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그녀의 마음을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퍼스가 싫어서 혼인하기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매달렸다.
“그럼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시는 걸로.”
“…네, 최대한.”
그게 리아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대답이었다. 퍼스는 그 말만으로도 웃을 수 있었다. 그에겐 리아가 긍정적인 대답을 가지고 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
“혼인?!”
“쉿. 메이,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요.”
결국 리아는 혼자 고민하지 못하고 메이에게 상담했다. 항상 모든 것을 예상한 듯한 태도를 보이던 메이조차 이번 상담 내용에는 놀랐다. 혼인이라니. 역시 메이가 생각하기에도 이른 시점인 게 분명했다.
“역시 너무 이르죠?”
“아니, 나는 그 사람이 혼인이라는 발언을 할 줄 아는 사람인데 더 놀랐어.”
리아의 연인이 되고 나서, 인간적인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메이 안에서 상관인 퍼스의 평가는 나빴다. 그녀는 순수하게 퍼스에게 감정이란 게 있었구나 하고 놀라는 식의 반응을 종종 보였다.
“너무하잖아요. 퍼스 님도 혼인 정도는 생각하신다고요.”
“역시 그분다워. 저택까지 준비하고. 철저하군. 도망갈 구석이 없어.”
“없나요?”
“애초에 왜 도망가려고 하는 거야? 그 정도면 혼인 상대로 나쁘지 않은 거 아냐? 더 좋은 상대를 원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혼인 자체를 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직 연인이 된 지도, 정직원이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메이는 리아의 말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녀 자신도 잘 모르겠는 마음까지 잘 들여다 봐 주는 메이였다. 저도 모르게 기대게 되었다.
“그럼 간단한 것부터 시작하자.”
리아는 얌전히 메이가 자신의 양 볼을 잡도록 내버려 두었다. 서로 눈을 마주 보면, 거짓말을 하기 힘들었다.
“퍼스 님을 좋아해?”
“네.”
망설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호쾌한 대답에 메이는 한 번 씩 웃어 보였다.
“그럼 지금 당장 말고 나중이라면 그와 혼인하고 싶어?”
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메이는 그녀가 고개를 내릴 수 없도록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거짓말 금지. 생각나는 대로 그대로 말해. 고민하지도 말고.”
“…하고 싶어요.”
“그럼 지금 당장은 안 되는 이유는 뭐지?”
“잘 모르겠지만, 아직 제가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그럼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보면 어때?”
“하지만 퍼스 님이 거절인지 아닌지 대답을 들고 오라고 하셨는데요….”
“완전 거절은 아니잖아. 다만 조금 미뤘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라는 거야.”
리아의 마음에 꼭 맞는 적절한 대답이었다. 사례 대신 리아는 메이를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항상. 전 아직 메이 양이 없으면 안 돼요.”
“듣기 좋은데. 하지만 그것도 혼인하지 못하는 이유로 말하면 안 돼. 내 근무가 힘들어질 테니까.”
퍼스의 마음에 대답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가 리아의 최선이었다. 내일 그를 만나면 메이에게 했던 것처럼 솔직하게 제 마음을 모두 전하기로 했다. 혼인은 누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문제지.
***
매일 하는 출근이었지만, 리아는 여느 때보다 더 긴장했다. 퍼스는 당장 그날 왕궁으로 리아를 데려다주고 난 후부터 저택에 살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출근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식당 앞에서 리아를 기다리는 건 못하겠지 싶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하지만 그는 리아가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태연하게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녀에게 살짝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주위에선 여전히 그의 미소를 볼 때마다 술렁이는 반응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퍼스 님.”
리아는 정면으로 퍼스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녀의 기분을 모르는 것도 아니어서, 퍼스는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그녀의 곁을 따를 뿐이었다. 그는 억지로 말을 꺼내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리아는 떨려서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했다. 눈이 핑핑 돌 때쯤 그녀는 간신히 입을 뗐다.
“좋아요.”
“예?”
너무 앞뒤 잘라먹은 말에 리아도 퍼스도 놀라고 말았다. 정작 그 말을 한 당사자조차도 놀라서 제 말을 수습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게 대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혹시, 혼인해도 좋다는 말이신가요?”
“네, 네. 저도 퍼스 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리아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퍼스는 믿기지 않는 듯, 정색했다. 그러다 멈춰 서서는 그대로 리아를 끌어안았다.
“감사합니다.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요. 정말 잘하겠습니다.”
“제 말 아직 안 끝났어요!”
필사적으로 리아가 말을 이으려 했으나, 퍼스는 듣질 않았다. 그저 그녀를 끌어안고 기뻐하기만 했다. 그래서 리아는 퍼스의 팔을 조금 세게 내리쳤다.
“지금 당장 말고요!”
“네?”
커다랗게 소리치자 퍼스가 그제야 몸을 뗐다. 그의 표정은 다시 굳어 있었다.
“지금은 말고요. 조금 시간을 두고 혼인했으면 좋겠어요.”
“얼마나요?”
마치 사탕을 받았다 뺏긴 아이처럼 퍼스는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보이지 않는 귀까지 처져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표정도 할 줄 알던가? 누가 봤으면 기겁했을 광경이었지만, 리아는 제 남자여서인지 그가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그게… 오 년…?”
사실 기간에 대해서는 리아도 정확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5라는 숫자가 나오자마자 못 들을 거라도 들은 듯 퍼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럼… 삼 년?”
여전히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럴수록 리아의 표정도 울상이 되어갔다.
“이 년…?”
“…….”
“일, 일 년?”
리아로서는 굉장히 많이 단축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 대답마저도 퍼스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표정이 다 거짓이었다는 듯, 깔끔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지금 당장 하고 싶었지만 리아 양이 원하신다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진지한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인 듯했다. 퍼스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리아를 바라봤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리아와 손가락을 얽었다.
“그 대신 제 저택에는 자주 놀러 와 주시는 겁니다?”
“네,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볼게요.”
“그리고 약혼해주십시오.”
퍼스는 잡은 손가락 중 리아의 네 번째 손가락에 힘을 줬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에게 표식을 남기고 싶었다. 다행히 리아는 그것까지는 미뤄달라고 하지 않았다.
“기쁘게 받아들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