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73)화 (73/75)

#73. 중대사

퍼스는 또 부하들에게 물어왔다면서 추천 리스트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정갈하게 접힌 작은 종이에 몇 개의 가게 이름과 약도가 그려진 듯했다. 리아도 보려고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는 일부러 더 높이 들었다.

“미리 보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그는 종이를 보려 제게 달라붙은 리아의 어깨를 슬며시 밀어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하지만 리아는 왠지 그 손길이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말이라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부딪힐 때마다 퍼스가 어깨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때뿐. 그는 금세 손을 놓고 그녀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리아는 거리의 풍경 대신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은 밖이라 그런지 퍼스는 흰 장갑을 끼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더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이전에 잡아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저 손의 온기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전 축제에서처럼 그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먼저 손을 잡자고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가 원래 사람과의 접촉을 싫어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먼저 손을 뻗지 않는 이상 만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참을수록 서운함은 쌓여만 갔다.

“여기가 첫 번째 가게네요.”

계속 퍼스의 손만 바라보고 있느라, 리아는 자신들이 목적지에 도착한 줄도 몰랐다. 퍼스의 말에 앞을 바라보자, 온통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건물이 보였다.

“여긴 어딘가요?”

“안으로 들어가 보실래요?”

고개를 끄덕이자, 퍼스가 나무문을 열어주었다. 리아는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주변을 살폈다.

“화원인가요?”

“화원처럼 꾸민 레스토랑이라고 하더군요. 이 정도면 리아 양이 좋아할 거라고. 흠. 흠.”

그는 또 메모를 보고 있다가, 리아가 바라보자 빠르게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번엔 축제 때처럼 그냥 수도에서 유명한 가게가 아닌, 그녀가 좋아할 만한 가게를 일부러 추린 모양이었다.

“감사해요. 너무 예뻐요.”

점원에게 안내받은 자리로 가며, 리아는 계속 주변을 살폈다. 정말 예쁜 정원처럼 실내를 꾸며놓은 레스토랑이었다. 온실에서는 최대한 식물을 원래 자라는 환경과 가깝게 키우고, 후원에는 꽃 한 송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인공적인 정원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식당 안에는 온통 여성들이나 커플이 가득했다. 낯간지러운 분위기 때문인지 퍼스는 계속해서 주위를 살폈다.

“퍼스 님은 괜찮으세요?”

“예, 아주 풀이 많네요.”

너무도 그다운 대답이었다. 사실 그에게는 음식을 팔기만 한다면 어느 식당이든 똑같이 보일 터였다. 그에게 이 식당은 그저 ‘리아가 좋아할 식당’ 정도의 인식일 게 뻔했다. 점원이 건넨 메뉴판을 보는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아마 이 중 어떤 메뉴가 가장 가성비가 좋을지 고민하는 거겠지. 그는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니까.

“리아 양은 뭐로 하시겠어요?”

“저는 여기서 제일 유명하다는 메뉴 먹어보려고요.”

“그럼 여기 첫 번째에 있는 코스로 할까요? 그게 유명하다고 하던데.”

“네, 좋아요.”

리아는 점원을 불러 퍼스가 주문을 하는 동안, 메뉴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지만, 리아의 것보다야 두껍고 컸다. 저렇게 예쁜 손가락을 매일 장갑 안에 가두고 산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리아 양?”

멍한 표정의 그녀를 보며 퍼스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와인이 나온다고 해서 추천 와인으로 부탁했는데, 괜찮으시죠?”

“네, 괜찮아요.”

사실 리아는 성인이 되긴 했지만, 술을 마신 적은 별로 없었다. 퍼스도 별로 술을 즐길 것 같은 타입은 아니었다. 다만, 코스에 끼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마시려는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조금 멍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신 거 맞으신가요?”

퍼스는 계속 리아의 이상한 태도가 신경 쓰였던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분명 그녀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들어오고 나서부터 딴생각을 하는 듯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리아가 대답하려는 순간, 식전 빵이 나왔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팅되는 수프와 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냥 좀 배고파서요.”

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부터 손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스킨십에 집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그녀는 솔직하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습니까.”

이해한 척 대답했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쯤 태도로 눈치챌 수 있었다. 퍼스는 물을 마시는 척하며 그녀를 살폈다. 안절부절못하는 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도 같았다. 리아는 꽤 솔직한 편이었다. 그래서 굳이 손을 잡아 마음속을 훔쳐보지 않아도 생각을 읽기 쉬웠다.

하지만 오늘따라 왜 저렇게 한숨을 틈틈이 내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손을 맞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엿보는 건 반칙이라고 스스로 정했다. 인파가 많은 곳에서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대비책으로 장갑을 두고 오긴 했지만, 그 때문에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없어서 갑갑했다.

눈앞에서 리아가 계속해서 자신의 손을 매만지는 게 보였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같이 가느다란 손가락이었다. 그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 당긴 후, 입 맞추고 싶다는 걸 그녀는 꿈에도 모를 터였다.

“메뉴 나왔습니다.”

말없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둘 사이에, 전채 요리가 놓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데 즉효약이었다.

“와, 여기 요리가 되게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나오네요!”

사실 다른 곳에 정신을 파느라 코스 요리로 뭐가 나오는지 메뉴도 제대로 훑어보지 않았던 리아였다. 막상 마주하고 보니 생각보다 더 귀여운 전채 요리에 저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다. 솔직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퍼스도 슬쩍 미소 지었다.

“좋아하시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나올 음식도, 그녀를 데려갈 곳도 리아가 좋아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다행히 리아는 나오는 음식마다 기뻐하며 맛있게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까먹을 정도였다. 디저트도 워낙 좋아해서 퍼스가 제 것을 건네주었다.

“또 가고 싶어요. 특히 거기 디저트가 정말 맛있었어요!”

실내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음식 맛이 좋았다. 식당을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며, 퍼스는 안도했다. 식사 전 보였던 그녀의 태도는 그저 어색해 했던 것뿐인 듯했다.

“저도 꽤 맛있었습니다.”

사실 제대로 맛을 기억하지는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리아의 기색을 살피느라 바빴다. 저답지 않게 긴장이란 걸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제 저희 어디로 가나요?”

아까부터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퍼스는 리아의 질문에 여유로운 척 미소로 화답했다.

“따라와 보시면 압니다.”

그가 이상한 곳에 데려갈 리는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시내에서 벗어난 곳으로 향하자, 리아는 저도 모르게 불안해졌다.

“어디까지 가시는 거예요?”

“얼마 안 남았습니다.”

하지만 점점 주변이 이상해졌다. 일부러 심어 놓은 듯한 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이 이상 들어가면 누군가의 사유지일지도 몰랐다.

“퍼스 님, 여기 주인이 있는 곳인 것 같은데요?”

“네, 주인이 있는 곳 맞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맘대로 들어와도 되나요?”

“됩니다. 제집이니까요.”

“네?”

그 말이 진짜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저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왕궁에 사시는 거 아니셨어요?”

“맞습니다. 지금도 왕궁에 살고 있고요. 하지만 따로 살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궁 밖에 저택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백작 가 저택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큰 저택이었다. 퍼스 혼자 살기에는 충분히 넓고도 훨씬 남을 만큼. 저택 앞에는 넓은 공터도 있었다. 정원으로 꾸미면 좋을 듯했다.

“나와서 사시는 거군요.”

“저택 뒤쪽으로 해서 왕궁에 가까운 길이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출퇴근하게 되겠군요.”

“어떻게 허락받으셨어요?”

“음. 다 방법이 있죠.”

궁에서 일하는 자라면 귀족이라도 왕궁에서 숙식하는 게 기본이었다. 별도로 나와서 왕궁 밖에서 사는 데는 허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퍼스라면 어떻게든 그 허가를 받아낼 것 같기는 했다.

“안에 들어가 봐도 되나요?”

“그러려고 리아 양을 여기까지 모셔온걸요.”

아직은 사용인이 따로 없어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퍼스는 직접 문을 열고 리아가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비켜섰다. 아무도 없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 소리가 저택에 울렸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는데 인사하시는 건가요? 저택에?”

묘하게 조심스런 그녀의 태도를 보며, 퍼스가 낮게 웃었다. 리아는 퍼스를 한 번 노려봐주고 본격적으로 저택을 탐방했다. 로비를 비롯해 식당과 응접실 모두 새것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곳곳에 사람이 있었던 태가 났다.

“사람이 살던 저택인가요?”

“이전에 준 남작급 귀족이 저택이었는데, 도박 빚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저택이 경매에 넘어갔다더군요. 마침 싸게 나왔길래 사봤습니다.”

“가구는 사신 거예요?”

“네, 리아 양의 의견을 많이 참고해봤는데 어떠신가요?”

그제야 가구들 색이며 배치가 이해가 갔다. 그는 자신에게 의미를 알 수 없는 엉뚱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졌다. 리아가 좋아하는 색, 좋아하는 촉감의 커버, 장식품 등이 가득한 집이었다.

“이건….”

퍼스의 집이라기보다는 리아의 집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정도로 그녀의 취향 그대로였다. 감격스럽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한 마음이었다.

“별로인가요?”

“아니요!”

리아는 흘러넘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옆에 선 퍼스를 끌어안았다. 그는 깜짝 놀랐지만 조심스레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드는데… 왜 퍼스 님 집인데 제집처럼 꾸며놓으셨어요?”

“그야 리아 양이 마음에 들었으면 해서죠.”

선문답 같은 질문이었다. 일부러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왜 제 마음에 들었으면 했는데요?”

“리아 양이 자주 여기 와줬으면 하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다. 여기엔 리아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했다. 심지어 집주인인 퍼스까지도.

“그러고 싶지만… 전 왕궁에서 이제 막 정직원이 된 걸요. 이번은 퍼스 님 도움으로 외출할 수 있었지만 자주는 어려울 거예요.”

물론 그녀의 이름을 이용하면 못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특권을 자주 사용하는 건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퍼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퍼스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의 팔 힘에서 그녀를 놓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리아 또한 둘 사이에 틈이 남지 않을 정도로 꽉 그를 마주 안았다.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그 방법이 뭔데요?”

“정식으로 혼인하면 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