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외출
왕자 궁의 후원은 여전했다. 꽃 한 송이 없이 푸르른 잎들로만 가득했다. 그 재미없는 풍경마저 리아에게는 싱그럽게 다가왔다. 왕실의 기후는 항상 똑같았지만, 식물들은 여름이 오고 있다는 걸 아는지 더욱 탱글탱글하고 건강해졌다.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좋으신가요?”
따로 약속하지 않았지만, 퍼스와 리아는 왕궁에 돌아오자 다시 후원에서 식사를 함께했다. 식당의 메뉴도 별다를 것 없었다. 그런데도 리아는 기뻐서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
“후후훗. 정직원이라구요-!”
헤실헤실 웃는 그 표정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퍼스는 식사하는 것도 잊고 웃기만 하는 리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자꾸 그러니까 빵 대신 머리카락이 입에 들어가잖습니까.”
“하지만 좋은걸요.”
그녀의 눈이 가느다랗게 접히는 모습을 보자, 퍼스도 어쩔 수 없었다. 무릎에 올려두었던 식사를 한쪽으로 치우고, 리아의 손에 들려 있는 빵도 빼앗았다.
“꺄악.”
방심한 사이, 리아는 퍼스의 허벅지 위에 앉아있었다. 그제야 퍼스 또한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뭐예요, 사람들이 봐요….”
하지만 리아의 말에도 불구하고, 퍼스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둘러 더 꽉 껴안기만 했다.
“볼 테면 보라죠. 아까부터 좋아하는 얼굴이 얼마나 귀여우셨는지 아십니까? 이 정도로 참아낸 것도 감사하셔야죠.”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는 그였다. 누가 이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리아도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뻗어 퍼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서로에게 머리를 묻자, 코끝으로 체향이 밀려들었다. 익숙한 향기일 텐데, 심장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지 빠르게 뛰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멋있네요. 리아 양의 정식 복장.”
“그, 금장이 조금 는 것뿐인데요.”
그 조금 는 금장 때문에 아침 내내 기분이 둥실둥실 떠다녔던 주제에. 리아는 솔직하지 못했다. 퍼스도 그걸 눈치채고 한 칭찬이었지만, 모른 척해주었다.
“수사 부서에서 아비게일 영애가 사주했다는 걸 밝혀냈다고 합니다.”
그들의 능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퍼스가 던져 준 증거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왕궁을 나간 담당자의 흔적을 모두 읽어서 그와 관련된 증거는 싹싹 긁어 수사 부서에 넘겼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어떻게 알아냈냐고 묻는 그들에게 퍼스는 뻔뻔하게 웃으며 대답했을 뿐이었다. ‘제가 범인이라고 생각해서 움직였더니,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랬군요.”
“순순히 본인이 사주한 부분을 인정했지만 원인은 알폰스 왕자님 때문이었다고 했다더군요.”
그녀는 수사 부서에 불려가 처연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 알폰스 왕자님이 자꾸 저를 두고 다른 분을 만나러 다니시는 게 마음이 아팠습니다. 심지어 다른 백작 가 영애라니. 제가 아니라 그녀가 약혼녀가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공식적인 동기로 받아들여졌다. 그 말을 들은 알폰스는 책상을 내리치며 분노했다.
- 먼저 찬 게 누군데!
“하지만 역시 처벌은 가볍게 끝났다고 합니다.”
“괜찮아요. 전 이렇게 복직되었고, 사막의 기적도 다시 살릴 수 있으니까요.”
리아는 진심으로 그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 사건이 없었으면 자신은 정식 직원이 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그 영애가 사막의 기적을 뒤집어 놓지 않았어도 리아 양은 정식 직원이 됐을 겁니다.”
퍼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살며시 웃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저도 모르는데.”
“제 감입니다.”
“푸흡.”
“비웃지 마세요. 다들 감이란 걸 되게 우습게 보는데, 알고 보면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있는 정보를 토대로 낸 직관적인 결론이 바로 감이란 겁니다.”
그럴듯한 말로 위로하는데 그게 더 우스웠다. 리아는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리아는 용서했다고 해도, 퍼스는 그녀를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다. 아는 이를 시켜 사교계에 소문을 흘렸다. 자극적인 소문을 좋아하는 사교계니 금방 퍼질 터였다. 아마 한동안은 수치스러워서 외부에 얼굴을 들이밀지 못할 터였다. 평판을 중요시하는 그녀에게는 벌금형이나 다른 처벌보다 타격이 큰 벌이었다.
“전임 담당자도 대가로 받은 돈은 압수당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쪽도 재취업이 어렵도록 퍼스가 아주 약간의 손만 써뒀다. 사정이 어렵다고 해도, 잘못된 행동을 한 건 마찬가지였다. 리아는 퍼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고, 심지어 그와 연인 사이가 되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상태였다. 다른 사람이 제게 보인 악의는 여전히 두려웠다. 또 누가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까 생각하기만 해도 밤에 잠을 설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품만 있으면, 뭐든 이겨낼 수 있을 듯했다.
“전 지금이 좋아요. 다른 사람이 어찌 되든 상관없이 저만 지금 행복하면 돼요. 아주 아주 이기적이죠?”
“뭐 어떤가요. 저도 리아 양만 행복하면 돼요.”
“퍼스 님, 가만 보면 의외로 엄청 느끼한 말을 잘하시네요.”
“일부러 하는 게 아니라 다 있는 그대로 진심을 말하는 겁니다.”
퍼스는 리아의 가슴을 뛰게 하는 데는 선수였다. 예전에 사랑하는 마음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하던 사람은 도대체 어디로 갔지? 조금 분한 마음에 리아는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다.
“리아 양.”
“…….”
“리아 양?”
침묵이 길게 이어지자, 퍼스는 이게 고의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순순히 당해줄 그가 아니었다. 그는 리아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리아.”
애칭을 부른 것도 아니었고,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리아는 순식간에 귀부터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한 경험을 했다. 그가 호칭을 떼고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라고 불러도 될까요, 앞으로.”
리아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 제안할 게 있습니다.”
그가 말을 꺼내자마자 리아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계속 그가 이름을 부른다면 아마 어떤 말을 해도 수락할 것 같았다. 퍼스는 품속에서 부끄러움에 떨고 있는 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신이 이름을 부르면 리아가 뭐든지 승낙할 거란 걸 알고 있는 미소였다. 확신범이었다.
“예전처럼 서로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는 거 계속하면 어떨까요?”
“또 알폰스 왕자님이 시키기라도 했나요?”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퍼스는 알폰스의 명령으로 그녀에 대해 여러 가지 것들을 질문했다. 그 때문에 그녀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었던 거기도 했다.
“아뇨, 이번엔 제가 알고 싶어서요.”
“하지만 이미 많이 알려드렸는데요?”
그는 식성부터 취미까지 아주 다양한 것들을 조사해갔다. 덕분에 리아는 자신도 몰랐던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때는 대충 질문지를 작성한 거여서요. 깊이 파고들지도 않고, 리아 양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얕은 질문만 물어봤던 거였습니다.”
“그런 거였어요?”
“네, 알폰스 왕자님께선 진심도 아니셨으니까요. 굳이 영애의 치부까지 드러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역시 처음부터 리아는 그를 잘못 보지 않았다. 알폰스의 명령을 수행하면서도, 그는 그녀의 정보를 최대한 지켜주려고 노력했다.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뭘 물어보실 건데요?”
“좀 더 깊고 자세한 취향을 묻고 싶습니다만.”
그는 괜히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깊고 자세한 취향? 어떤 걸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괜스레 리아의 귀가 빨개졌다.
“어, 어떤…?”
퍼스는 괜히 대답을 끌며 천천히 리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예를 들어… 어떤 색을 좋아하시나요?”
“그건 이미 대답했던 거잖아요.”
깊고 자세한 걸 묻는다더니 결국 간단한 질문이었다.
“기분에 따라 좋아하는 색이 바뀌기도 한대요. 흰색? 노란색? 파란색? 지금은 어떤 색이 좋으신가요?”
“음… 노란색?”
“그렇군요.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디에 참고한다는 거지? 의문이 들었지만, 능글능글 웃고 있는 걸로 보아, 그는 말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럼….”
그는 계속해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을 했다. 하나같이 깊이 있는 질문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리아는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퍼스의 질문은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됐다.
***
“외출이요?”
“네, 주말에 궁 밖으로 외출 나가시는 건 어떠신가요?”
정식으로 연인이 되고 나서, 처음 하는 외출이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데이트라는 것이었다. 왕궁 내에서는 둘이서 식사를 하거나 산책을 하는 것 정도가 다였다. 솔직히 혹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궁 밖으로 나가는 건 허가가 필요한데요.”
“그거라면 신청서만 작성해서 제출해주십시오. 허가가 나도록 제가 다 손써뒀습니다.”
상큼하게 웃고 있지만, 역시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리아와 둘이서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직권남용쯤은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했다. 한마디 해주려던 리아는 그냥 참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외출 허가가 난 게 정말인지, 케빈은 서류를 보지도 않고 책상에 두고 가라고 했다. 기숙사 관리인 마리 또한 싱글거리며 이미 알고 있었다고 심지어 하루를 밖에서 묵어도 좋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느 선까지 말해놓은 것일까. 퍼스의 철두철미함에 리아를 혀를 내둘렀다.
축제 때도 만났던 문 앞에서 퍼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에도 봤지만, 근무복 차림이 아닌 사복 차림의 그는 볼수록 더 색달랐다.
“리아 양, 웬 짐입니까?”
“마리가 밖에서 하루 묵고 와도 된다고 해서요. 퍼스 님이 일부러 허락받으신 것 아니었나요?”
그 말에 갑자기 퍼스의 얼굴이 빨개졌다. 드문 일이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마, 마리가 과했군요. 저는 외출 허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녀의 배려가 과했다. 물론 배려는 감사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둘은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외박은 생각조차 안 했기에 그의 짐은 간소했다.
“뭐 어때요? 여관비는 제가 대겠습니다. 저 어제 급료일이었어요!”
리아는 해맑게 웃으며 자랑스럽게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번 달까지는 수습 급료라 많지는 않았지만, 숙식을 왕궁에서 제공해주다 보니 다른 곳에 쓰지 않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생각지 못한 점은 퍼스가 당황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급료야 왕자의 제1 보좌관씩이나 하고 있는 그가 월등히 많이 받았다. 따로 쓰는 곳도 없어서 모아둔 돈도 많았다. 그녀가 백작 가에서 물려받을 재산에 비하면 적겠지만. 퍼스는 여관에서 외박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뻔한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숙박 여부는 모르는 척하고 먼저 왕궁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럼 가실까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