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환궁
오늘따라 날씨가 좋았다. 궁 내는 항상 날씨가 온화했지만 유달리 리아에게 그렇게 느껴졌다. 거울에 비춰본 제 모습이 퍽 만족스러워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황금빛 제복!”
정확히는 황금색으로 된 무늬가 제법 많아진 제복이 맞았다. 리아는 수습에서 벗어나 정식 근무자가 되었고, 이에 맞는 복식이 주어졌다. 목 부근에만 있던 장식은 치맛단 아래와 쇄골 부근에 추가되어 있었다. 퍼스의 화려한 복식이 떠올랐다. 그는 왕궁 내 근무자들이 입을 수 있는 복식 중 화려한 장식으로 된 복장을 입는 자에 속했다. 그보다 더 높은 자들은 대개 높은 귀족이었으므로, 왕궁 근무복을 입지 않았다.
“언젠가 이 흰 부분까지 장식을 꽉 채우고 말 테야.”
그녀는 야심을 드러내며, 방 안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화려함이 한 스푼 추가되었지만, 그녀에겐 충분히 눈부셨다. 창가에 있는 식물 또한 그녀의 귀환을 축하해주는 듯했다.
왕궁에 처음 왔을 때 가지고 왔던 식물은 정확히 왕궁에 온 지 세 달째 되는 날 꽃이 피도록 손을 써놓은 것이었다. 고단한 왕궁 생활을 헤쳐나갈 자신에게 주는 자그마한 상이었다. 무지갯빛 꽃이 피기 위해 봉오리를 맺었다. 그녀가 세 달을 맞이하기까지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목표한 세 달보다 훨씬 일찍 그녀는 정식 타이틀을 따냈고!
벌컥.
노크도 없이 리아의 방문이 열렸다. 그럴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리아!”
메이는 주저 없이 달려와 리아를 끌어안았다. 리아가 왕궁에 들어오고 난 후, 첫 출근을 하는 아침이었다. 준비를 위해 어제 들어오고 나서 그녀는 자신을 붙잡고 밤새 엉엉 울어댔다. 인사는 어제 다 끝났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녀는 여전히 감격에 빠져 있었다. 어제는 조금 함께 울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의 리아는 지극히 평소와 같았다.
“아직 출근 안 하셨네요, 메이?”
“리아가 첫 출근을 하는데 너무 기뻐서 먼저 나갈 수나 있어야지! 상관에게 오늘은 늦는다고 허락 좀 받았어.”
그녀의 상관은 퍼스였다. 융통성 없기로 유명한. 그에게 지각해도 되는 권리를 얻었다니. 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리아 반응을 보고 메이는 씨익 웃었다. 하여간 귀여워라. 아직도 메이의 상관이 제게 푹 빠져서 가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걸 가장 잘 이용해먹는 사람이 바로 메이 플라워, 자신이었다.
“원래는 본인이 오고 싶으셨겠지만, 지금 워낙 바쁘셔서 말이야.”
말 그대로 퍼스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기껏 같은 왕궁으로 와서 이제 자주 보겠거니 좋아했건만, 그는 바빠서 입궁하는 리아를 내다볼 수조차 없었다. 왕궁에 일이 몰리는 시즌이기도 했지만.
“수사 때문에 그러신가요?”
“그렇지. 네 누명이 완전하게 벗겨지도록 증거 조사부터 모두 협조하고 있으니까.”
그랬다. 퍼스는 리아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뛰는 사람에게 그까짓 마중 한 번 나오지 않았다고 서운해해선 안 됐다.
“리아, 네가 돌아와서 너무 기뻐. 옷도 너무 예뻐졌어. 너랑 잘 어울려.”
사소한 디테일이 바뀌었을 뿐인데도 메이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리아 또한 메이와 다시 보게 되어서 무척이나 기뻤다. 하마터면 그녀가 출궁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려야 할 뻔했다.
“저도요.”
두 사람의 감격은 리아가 지각할 위기가 되었을 때쯤에나 끝이 났다. 하마터면 복귀 첫날부터 지각생이 될 뻔했다. 퍼스는 메이의 지각을 용납했을지 몰라도, 케빈은 아니었다.
***
“지각이야.”
“아직 정각인데요?”
“내가 먼저 왔잖아.”
케빈의 심술에 리아는 입을 쭉 내밀었다. 그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다 손을 거두고 어색하게 웃었다.
“복귀 축하한다.”
그 나름의 서투른 환영 인사였다. 리아는 그것도 케빈이 보이는 최대의 성의임을 알았다. 그는 리아가 어색해하지 않도록 상사로서 적절한 친근감과 짓궂음을 유지했다. 리아는 고민했다. 그에게 퍼스와의 관계에 대해 말해야 할지.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고민이었다. 이미 왕궁 내에 두 사람 사이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으므로.
“계속 친구라고 부정하더니, 결국 연인 사이 맞았구나?”
리아가 수습이 아닌 정식으로 채용되자, 온실 내 근무자들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배척한 적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 계속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리아는 속이 쓰렸다. 하지만 그녀 또한 앞으로 매일 함께할 동료들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잡담 그만하고 일 좀 하지?”
케빈이 한마디 하자, 모두 입을 다물고 리아에게서 멀어졌다. 그의 티 나지 않는 배려가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너 좋으라고 한 거 아니야. 내가 듣기 싫어서 그러지.”
그는 아직 정면으로 리아를 마주 보지 못했다. 마음을 접었다고 해서, 감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그걸 알아서 리아는 일부러 그에게 더 다가가지 않았다.
“네가 놀고먹는 동안 쌓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놀고먹다뇨. 제 의지도 아니었는데요.”
“시끄럽고 빨리 따라와. 알아낸 거나 착착 읊어봐.”
리아는 그를 따라 익숙한 길을 가로질렀다. 사막의 기적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모래 바닥이 푹푹 꺼지는 느낌도 오랜만이었다.
“네 전임 담당자는 그만두고 나갔어.”
물어보지 않았지만 신경 쓸 거라 생각했는지 케빈이 먼저 말했다. 퍼스에게 그가 아비게일에게 사주를 받아 실제로 움직인 범인일 거란 이야기는 들었다. 특히 사건이 일어난 직후,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며 그만둔 게 결정적인 의심을 샀다.
“그런가요.”
하지만 리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큰 유감은 없었다. 아마도 돈이 급하게 필요했겠지. 혹은 귀족 출신인 리아를 마뜩잖게 생각했거나. 그 정도만 생각할 뿐이었다.
“화나거나 하지 않아?”
“글쎄요. 하지만 그분은 적어도 사막의 기적을 아예 훼손하지는 않으셨잖아요.”
“무슨 맹한 소리야. 아예 뒤집어 메다꽂았더구만.”
케빈은 그때 사막의 기적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분통이 터졌다. 식물을 키운다는 녀석이 다른 사람 담당이라고 해도 식물을 해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그분이 사막이 기적을 뒤집어주지 않았으면 저도 몰랐을 거예요. 사막의 기적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의 사막의 기적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설명을 요구하는 케빈을 뒤로하고, 리아는 다시 심어진 사막의 기적을 살폈다. 한번 강제로 뽑혀서인지 시들시들한 상태였다. 다행히 완전히 시들지는 않았다.
“이 사막의 기적, 다시 모래에서 뽑아내 주세요, 케빈 님.”
“뭐라고?”
기껏 심어서 살려놓은 사막의 기적을 다시 뽑으라니. 케빈은 의아해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사막의 기적 뿌리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케빈 님, 기억하시나요?”
“아, 그래. 너무 충격적이어서 머리에서 잊히지도 않아.”
“그럼 사막의 기적 뿌리가 어떤 식물 종류와 닮았는지도 아시겠어요?”
케빈은 대답하는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끄집어내 사막의 기적 뿌리를 다른 뿌리들과 대조해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눈치챘다.
“설마… 이 녀석 심어서 키우는 애가 아니야?”
“네, 바로 그거예요. 저도 산에서 기생식물 뿌리를 보기 전까지는 왜 사막의 기적 뿌리가 그렇게 마르고 잔털이 없는지 의문이었어요.”
대개의 식물은 뿌리로 물을 흡수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이 흡수하기 위해 여러 형태로 뿌리를 뻗는다. 하지만 뒤집힌 사막의 기적 뿌리는 물을 흡수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마른 가지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물을 주는 방식. 일반적으로 물을 줄 때보다 안개 형태로 물을 뿌리는 게 좋았던 이유도 뿌리로 물을 흡수하지 않기 때문이었어요.”
“그럼 사막의 기적은 기생식물인가?”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기생식물은 뿌리가 없이 자라거나, 뿌리가 하는 기능이 숙주의 영양분을 빼앗는 역할이었다.
“착생식물입니다.”
“아!”
리아의 대답에 케빈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착생식물은 기생식물처럼 숙주나 어딘가에 붙어 있다는 점은 같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숙주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이 달랐다.
“사막의 기적 뿌리는 어딘가에 붙어 있는 용도로만 사용되지 물을 흡수하는 용도는 아니었던 거죠. 사막의 기적에게 흙은 불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래. 사막 지역에 제대로 된 토양을 갖춘 곳은 적지. 그렇다면 흙과 물이 적어도 살 수 있는 환경에 적응하도록 발달했을 수 있지.”
그래서 사막의 기적에겐 물도 적게 필요했던 것이었다. 케빈은 리아의 말을 듣자마자, 조심스레 사막의 기적 주변 흙을 파냈다.
“짐작했지만 역시 뿌리가 아니라 이파리로 물을 흡수하는 게 맞았군.”
“네, 작은 솜털 같은 돌기로 흡수하는 것 같아요. 안개 형태로 분사하면 실제로 맺혀 있는 곳은 거기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군. 어차피 뿌리가 영양분을 흡수하는 역할이 아니라면 물을 줬을 때 그저 흘려보내면 되는 일 아닌가?”
케빈의 질문에 리아는 뿌리와 잎이 연결된 부위를 가리켰다. 사막의 기적은 따로 줄기랄 게 없이 뿌리 위 몸체에서 바로 잎이 퍼져나가는 구조였다.
“흙으로 물을 주면 흙이 물을 머금을 테고, 필연적으로 여기에 물이 고이게 됩니다. 그리고 물이 고이면 여기가 썩기 때문이었죠. 이 부분이 사막의 기적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어서 썩으면 바로 죽게 됐던 거였어요.”
“그런 거였군.”
이제야 그동안 가졌던 의문이 모두 풀렸다. 케빈은 새삼스런 얼굴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잠시 왕궁을 나갔다 온 사이, 그녀는 모든 정답을 바리바리 싸 가지고 왔다. 게다가 어쩐지 조금 더 성숙해 보였다.
“케빈 님?”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케빈의 시선에 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작은 식물을 함께 바라보고 있던 터라 얼굴이 가까웠다.
“흠, 흠. 훌륭하네. 이런 것도 다 알아내고.”
케빈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며 칭찬했다. 나름대로 존경하고 있는 상사에게 칭찬을 듣자, 리아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다 케빈 님 덕분이죠.”
“실제론 본인 덕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아, 들켰나요?”
능청스레 웃으며 리아는 사막의 기적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사막의 기적은 흙보다 오히려 물이 잘 빠지는 모래 위에 놓고 키우는 게 나았다.
“그럼 복귀 후 첫 일을 맡기지. 다른 사막의 기적도 모두 네가 관리하도록 해.”
“네?”
“이제 네 담당 식물만 관리할 수는 없잖아. 계속 수습 기분으로 일할래? 그리고 네 정식 소속은 내 바로 밑인 연구부서다.”
“정말요?”
케빈의 밑에서 정식으로 일하게 됐다는 말에 리아는 자리에서 펄쩍 뛰며 기뻐할 뻔했다. 그는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었다. 혹시나 다른 부서로 발령받아 일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비한 각오는 했지만, 다시 그와 함께 일할 수 있어 기뻤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