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비겁한 변명 (4)
“비밀이요?”
사막의 기적을 키우는 방법이 비밀이라는 말에 모두가 놀랐다. 이 또한 예상한 반응이었다. 리아는 여유롭게 웃으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제가 다시 온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면, 나머지 사막의 기적까지 살려내고 그 방법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나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겁니까?”
“애초에 제가 왕궁에 들어갈 때 제1 왕자님께서 수습 삼 개월 내에 사막의 기적을 키워내면 정식으로 일할 수 있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왕비는 확인하듯 알폰스에게 물었다.
“이 말이 사실이냐?”
“네, 제가 처음 페넬로페 영애를 궁에 모셔올 때 제시한 조건이 맞습니다.”
“기한 내 해냈으니 다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기다렸다는 듯, 리아가 요청했다. 당돌한 요청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비게일은 머리를 굴려 틈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왕비님의 사막의 기적을 상하게 했습니다!”
“저는 결단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 사막의 기적에 제 왕궁 생활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엇 때문에 식물을 해하겠습니까.”
왕비는 점점 머리가 아파 왔다. 인상을 쓴 그녀의 앞에서 가만히 있던 백작이 말을 꺼냈다.
“왕비 마마, 이는 범인을 명백하게 함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백작의 여식이라고 감싸는 겁니까?”
“제 여식이기 전에 사이키델리아의 국민이라면, 누구든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게 제 작은 바람입니다.”
백작은 말을 마치고 빙긋이 웃어 보였다. 단상 아래 있던 퍼스도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왕비 마마, 실례지만 저도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왕비는 시선을 내려 퍼스를 바라보았다.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아비게일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을 때부터 쏠린 상태였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퍼스에게 쏠렸다.
“말씀해보시죠.”
원래대로라면 굉장히 무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왕비는 평소 그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이 상황에 허튼소리를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 그녀는 발언을 허락했다.
“감사합니다. 먼저 왕비님께서 아끼시던 사막의 기적 한 뿌리가 훼손된 것은 저도 안타깝습니다. 그러니 더욱 범인을 밝혀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답지 않게 퍽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해 보였다. 평소의 무표정한 태도와 달리 공식 석상에서 그는 꽤 훌륭한 연기자였다. 알폰스의 연기력 또한 그의 지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사막의 기적은 한낱 식물이 아닙니다. 무려 왕비님께서 아끼시던 식물입니다. 이를 제대로 기르기 위해 알폰스 왕자님께서는 일부러 외부에서 식물을 기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를 데려오셨습니다. 그게 바로 리아 페넬로페 영애고요.”
“맞습니다.”
알폰스는 퍼스의 말을 긍정함으로써 발언에 힘을 실어 주었다. 옆에 있던 아비게일은 알폰스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모르는 척이었다.
“그런데 범인은 정확하게 페넬로페 영애가 맡은 식물만을 훼손하였습니다. 영애가 스스로 왕궁에서 나가고자 꾸민 일이 아니라면, 이는 명백히 영애를 왕궁에서 추방하고 모욕하고자 함이 됩니다.”
“말도 안 되는 모함입니다! 영애는 지금 자신의 관리 소홀을 다른 이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아비게일은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번엔 퍼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마주 보는 퍼스의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녀가 흥분하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타당한 의문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페르디난드 영애, 어째서 그토록 흥분하십니까? 영애께선 혹시 이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십니까?”
그의 눈빛은 아비게일을 창끝으로 찌르는 듯 예리했다. 아비게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저렇게 차가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자였던가? 그녀는 항상 알폰스의 약혼녀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영업용 미소밖에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발언을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범인이란 게 밝혀지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입 닫고 앉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퍼스의 말은 아비게일에게 이렇게 번역되어 들렸다. 아비게일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만약 누군가가 방해한 것이 아니고, 리아 페넬로페 양이 직접 훼손한 것이라고 해도 진상은 밝혀져야 합니다.”
그는 양해를 구하는 듯, 리아 쪽을 한 번 흘끔 보았다. 하지만 리아는 그가 어떤 말을 한대도 자신을 상처 입히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다. 그가 지금 이 발언으로 확보해야 하는 것은 공정성이었다. 그래야 그의 말이 타당해지니까.
“이 일은 나아가 영애를 추천했던 왕자님의 명예에도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러니 저 퍼스 베르시에는 충직한 왕자님의 제1 보좌관으로서 말씀드립니다. 반드시 범인을 밝혀내야 합니다.”
긴 발언을 마치는 그는 온몸으로 충직한 알폰스의 신하인 것처럼 굴었다. 순전히 자신의 상관의 더럽혀진 명예를 위해 정의를 부르짖는 자. 그게 이번 연설의 목적이었다. 순진한 귀족들은 그의 발언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스 또한 모르고 들었으면 그의 완벽한 충정에 감동했을지도 몰랐다. 진실하고 곧은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연출되었다. 백작은 퍼스를 바라보며 슬며시 표정을 굳혔다. 역시 보통이 아닌 자였다. 리아의 옆에 저런 자가 선다고 생각하니 든든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역시 퍼스 군은 영악하군요. 거기서 알폰스 왕자의 이름을 들먹이다니. 알폰스 왕자가 내건 조건을 리아 양이 달성한 이상, 왕족으로서 말을 번복할 수야 없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왕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리아 일행의 표정이 밝아졌다. 희망적인 신호였다. 반대로 아비게일의 표정은 썩어들어 갔다.
“좋습니다, 리아 페넬로페 영애는 다시 온실로 복직하도록 하죠. 수습이 아니라, 정식으로.”
온실의 주인인 왕비의 말이었다. 누구도 거스를 수 있을 리 없었다. 리아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담당한 사막의 기적을 상하게 한 자를 꼭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그게 영애라고 한다면 다시 왕궁에서 추방이니 명심하십시오. 이번엔 사막의 기적을 가지고 협박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왕비의 시선이 이번엔 퍼스에게로 향했다.
“퍼스 베르시에 보좌관, 수사 부서에 의뢰하여 철저하게 범인 밝혀내고, 결과를 제게 직접 보고하도록 하세요.”
그 또한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수사 부서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에 대해 수사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을 모은 부서였다. 공정성이 가장 중요한 터라 그 선발 기준이 엄격했다. 퍼스도 알폰스의 보좌관이 되지 않았더라면, 수사 관련 부서로 갔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능력을 사용하여 사건을 조사하기 때문에 결과가 정확하기로 유명했다. 일련의 사건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던 국왕 또한 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온실 관련 일은 왕비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그는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그녀가 해결하도록 지켜볼 뿐이었다.
“그럼 이제 다 해결되었나?”
국왕의 입이 열리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왕비만이 웃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예, 소란스럽게 해드렸군요.”
“아닙니다, 부인. 그대의 탄신일인데 이 정도는 시끌벅적해야 연회라고 할 수 있지. 그대가 아끼는 식물이 이렇게 꽃까지 피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도 퍽 기쁩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국왕은 왕비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왕비는 감사의 의미로 국왕을 끌어안았고. 두 사람의 닭살 행각은 관계자라면 익숙한 모습이었다. 몰랐던 리아만이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두 분 다 그쯤 해두시지요. 모두가 봅니다.”
부모님의 애정 행각에 알폰스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주변의 모두가 금슬이 좋은 국왕 부부 모습에 웃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비게일만이 웃지 못했다.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수사 부서가 조사하면 금세 자신의 행적이 드러날 것이었다. 처벌이야 공작가의 영애니 어찌 저찌 면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왕비의 신뢰는? 자신의 미래는 저 자리였다. 누구와 어떻게 놀든 결과는 같아야 했다.
험악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리아의 얼굴도 굳었다. 하지만 리아가 그녀를 동정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은 잘못한 것도 없이 일자리를 빼앗기고, 오명을 뒤집어썼으니까. 차갑게 돌아선 리아는 당당하게 단상을 내려왔다. 아래에선 퍼스가 미소를 띤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그녀는 지금 당장 퍼스에게 꽉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 백작도 함께 있어서 그건 어려웠다.
“발코니라도 가지 그러냐.”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을 백작으로선 꺼트리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모르는 체 시선을 돌렸다. 둘은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백작에게 인사한 뒤, 발코니로 향했다.
“해냈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떨어지자마자, 리아는 퍼스에게 안겼다. 그 또한 팔을 벌려 그녀를 맞이했다. 애틋한 두 연인은 서로의 향기와 온기에 말없이 한참 취해 있었다.
“사실 반쯤 포기하고 있었어요.”
“어째서요?”
퍼스는 살짝 리아의 몸을 밀어내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그녀는 자신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제 능력은 보잘것없잖아요. 게다가 처음 시작부터 능력으로 들어간 게 아니고, 제 배경 때문에 입궁한 거였고요.”
“하지만 리아 양은 충분히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 결과 다시 복직이 되신 거고요.”
말로 북돋아 주며 퍼스는 엄지로 그녀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감사해요, 퍼스 님. 사막의 기적에 꽃을 피우는 걸 알아봐 주지 않으셨더라면 불가능했을지도 몰라요.”
퍼스는 리아가 사막의 기적을 키우는 법을 알아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계획을 세웠다. 새로 구한 사막의 기적을 키워 직접 보여주는 것으로. 하지만 일반인인 퍼스가 보기에 싱싱한 식물과 그렇지 않은 식물을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꽃을 피워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리아는 능력이 통하지 않는 식물이라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시도해보자고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더불어 사막의 기적이 능력이 통하지 않는 식물이 아니라, 다 자란 상태라는 것까지 알아내고야 말았다.
“사막의 기적을 싱싱하게 만든 것도, 꽃을 피운 것도 모두 리아 양의 능력입니다.”
하지만 퍼스는 모든 공을 리아에게 돌렸다. 그는 눈앞의 연인이 결국 해낼 것을 알았다. 모두의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새삼 한 번 더 반했다.
“이제 다시 매일 왕궁에서 리아 양을 볼 수 있겠군요. 그동안 리아 양이 없어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퍼스는 어리광부리듯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머리카락이 스쳐 간지러웠지만 리아는 그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이제 다시 기숙사 생활이네요.”
분명 저택보다 더 좁고 식당에서 나오는 메뉴도 더 단순한데 기숙사로 들어가는 게 기뻤다. 나와 있던 건 잠시간이었지만 그리웠다.
“…과연 그럴까요?”
퍼스는 리아에게 얼굴을 묻은 채로 속삭였다. 그 바람에 리아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네?”
그는 되묻는 리아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