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69)화 (69/75)

#69. 비겁한 변명 (3)

“뭐, 뭐라고요?”

아비게일이 퍼스에게 눈독을 들인 것은 같이 온 영애들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혼란스러워 눈동자만 굴리는 그들을 보며 리아는 코웃음 쳤다.

“알폰스 왕자님의 약혼자씩이나 되시는 분이 고작 남자에게 차였다고 치졸하게 복수나 하시는 분인지 몰랐습니다.”

리아는 일부러 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왕궁에서 근무할 때야, 손님인 그녀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원래의 리아 페넬로페는 그녀에게 당하고만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지금 제가 사막의 기적을 뽑으라고 시키기라도 했다는 말씀인가요?”

“영애야말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전 영애가 제게 확실하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비난을 하시는 게 복수냐고 물은 건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시네요. 정말 영애가 사주를 하기라도 하셨나요?”

짐짓 모른 척 떠보니, 아비게일의 얼굴이 순식간이 시뻘게졌다. 두 사람의 싸움을 보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아닙니다!”

아비게일은 놀랄 만큼 크게 부정했다. 이토록 포커페이스가 안 되는 사람일 줄이야. 리아는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아비게일은 리아를 무섭게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어디서 듣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증거도 없이 사람 몰아가지 마시죠.”

“그건 영애께서 먼저 하신 일 아닌가요. 제가 사막의 기적을 직접 뽑았다는 증거라도 있나요? 그리고 애초에 현장에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저는 사막의 기적을 뽑은 범인으로 몰려서가 아니라 담당자로서 관리를 소홀했다는 명목으로 출궁을 요구당한 겁니다.”

“어찌 됐든 출궁한 분이 파티에 참석하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나요?”

“출궁하면 제가 리아 페넬로페가 아니게 되기라도 하나요?”

두 사람 다 날이 서 있었다. 아직 왕족이 아무도 연회장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이쪽에만 주목했다. 세력이 강한 두 가문의 여식들이었기에 관심은 더했다. 막 2차전이 시작되려는 찰나, 이들의 싸움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강제로 중지되었다.

“알폰스 사이키델리아 왕자님 드십니다!”

왕족 중 제일 먼저 알폰스가 들어온다는 알림 때문이었다. 그의 옆에는 당연하게도 퍼스가 서 있었다. 둘에게 쏠렸던 시선이 입구로 옮겨갔다. 발 빠른 이들은 금세 알폰스에게로 갔다. 하지만 그와 퍼스는 바로 리아와 아비게일이 있는 쪽으로 왔다. 그들은 주변의 분위기만 보고 대강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챘다.

“오늘따라 더 아름다우시군요, 제 약혼녀는.”

알폰스는 특유의 능청스러움을 발휘했다. 험악한 분위기는 모르는 척하고, 아비게일의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했다. 외관이 완벽했기에 그림이 되는 행동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

퍼스가 슬쩍 리아에게 속삭였다. 알폰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아비게일을 잡고 다른 쪽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리아에게 다가선 퍼스에게 꽂혀 움직이지 않았다.

“알폰스 왕자님께 옆에 있지 않으셔도 되세요?”

아무 일 없는 척 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퍼스가 눈치 못 챌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걱정되어서인지 그는 계속해서 그녀를 살폈다.

“무슨 말이라도 들었나요?”

“아무 일도.”

“어차피 곧 소문이 나서 알게 될 텐데 숨기지 마십시오.”

설령 소문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퍼스가 모를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찌 되었든 어차피 알게 된다는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리아는 솔직하게 속삭였다.

“제가 왜 여기 있냐고 해서요.”

퍼스는 슬쩍 아비게일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리아를 돌아보았다. 잠시였지만 아비게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자신에게 왜 그런 쓸데없는 걸 따졌냐는 비난의 눈빛이었다. 퍼스는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리아를 감쌌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심지어 그는 리아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평소에 짓던 영업용 미소와는 달랐다.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시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어떤 사이인지. 아비게일에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었던 얼굴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분노했다.

“알폰스 님, 어떻게 저런 사람이 연회에 들어올 수가 있죠? 어서 내쫓아야 해요.”

아비게일에 말에 알폰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퍼스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약혼녀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난처한 알폰스를 돕기라도 하듯, 시종이 또 한 번의 입장을 알렸다.

“국왕 전하와 왕비 마마 드십니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었다. 알폰스는 살았다는 생각에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비게일은 눈을 빛냈다. 바로 옆에 서 있는 한심한 약혼자보다 더 확실하게 리아를 내쫓을 수 있는 사람이 왔기 때문이었다.

반면, 리아와 퍼스는 표정을 굳혔다. 왕비를 설득하기 위해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비게일의 방해는 성가셨다. 모두들 왕과 왕비를 보며 고개를 조아렸다.

소란의 중심에 있던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비는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인사 대신 시선을 주었다. 그중에 리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리아를 무시하고 단상으로 향했다.

“우리도 가봐야 합니다, 영애.”

재빠르게 알폰스는 아비게일의 손을 잡고 끌었다. 천하의 아비게일도 국왕 부부 앞에서는 마음대로 굴 수 없었다. 그녀는 약혼녀 자격으로 알폰스와 함께 단상에 가 앉았다.

단상에 앉아서도 아비게일은 리아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오만한 표정은 리아에게 자신은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가 계산하지 못한 게 있었다. 리아는 전혀 단상 위에 앉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왕자님께 안 가보셔도 돼요?”

“왜 자꾸 보내려고 하십니까. 오늘은 영애의 곁에 있어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건 사실이었다. 알폰스는 퍼스의 계획을 듣고 바로 아비게일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이에 퍼스는 이번 연회엔 리아의 곁에 있겠다고 말했다. 알폰스 또한 승낙했고.

“그래도요. 사람들이 퍼스 님이 불성실하다고 생각하시면 어떻게 해요.”

“완전 거짓말은 아니죠. 사랑에 빠져서 우선순위가 달라졌으니까요.”

연회장 한복판에서도 그는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리아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면서도 리아의 얼굴엔 홍조가 피어올랐다. 누가 봐도 한창 달달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보고 있던 아비게일은 저도 모르게 이를 뿌득 갈았다.

***

국왕의 축하 인사가 이어진 후, 곧바로 왕비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한 줄이 늘어졌다. 백작은 줄을 서기 전, 손짓으로 리아를 불렀다.

“준비는 되었느냐?”

“네.”

리아는 입구에서 맡겨두었던 선물을 가지고 왔다. 사실 그들이 세운 계획은 아주 단순했다. 정면돌파.

“오랜만이네요, 페넬로페 백작.”

순서가 돌아오자, 왕비는 노골적으로 백작에게만 인사했다. 하지만 백작은 지지 않고 응수했다.

“탄신일을 맞으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이쪽은 제 여식인 리아 페넬로페입니다. 왕비 마마도 잘 아시겠지만요.”

뼈가 있는 백작의 말에 왕비의 입가에 경련이 살짝 일었다.

“여식을 내쫓았다고 항의라도 하러 온 건가?”

“아닙니다. 그저 탄신일을 맞으신 것을 축하드리고 작은 선물을 드리려 함입니다.”

백작은 먼저 자신의 선물을 내밀었다. 독특한 문양으로 된 목걸이와 팔찌였다.

“이건….”

“마마가 태어나신 나라에서는 이런 형태의 장신구를 선호한다고 하더군요. 마음에 드십니까?”

왕비는 사이키델리아로 온 이후 모든 복식을 이 나라의 형식으로 바꿔 입어야만 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원래의 복식이 그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백작이 내민 장신구는 얄밉게도 마음에 쏙 들었다.

“…고맙습니다.”

왕비는 자존심 때문에 솔직하게 기쁘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색만으로도 마음에 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리아의 선물을 위해 미리 계산한 것이었으니까.

“저도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리아가 준비한 선물은 말 그대로 작았다. 포장을 뜯으니, 동그란 구형의 투명한 유리가 나왔다. 예쁘게 꾸며진 화분이었다. 그 안에 자그마한 식물이 놓여 있었다.

“사막의 기적…?”

익숙한 생김새여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봤던 사막의 기적과 다르게, 싱싱한 상태였다. 게다가 자그마한 보라색 꽃이 피어 있었다. 앞서 준비한 선물과 같이 들여온 것이었다. 왕비가 살던 사막 지역은 아주 먼 곳이었다.

백작 정도 되는 능력이 없었더라면, 구하기 힘들었을 터였다. 고작 식물에 불과했지만, 왕비가 워낙 아낀 탓에 이름을 알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게다가 리아가 궁을 나온 사건에 관련한 자들이라면 그 이름과 형태를 모를 수 없었다. 왕비는 눈앞의 식물을 보며 동요했다.

“이걸… 저한테 선물하는 저의가 뭐죠?”

“왕비님께서 꼭 다 자란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막의 기적의 크기는 작았다. 심지어 사막의 기적이 담긴 화분이 한 손바닥에 올릴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지금 저랑 장난하는 겁니까?”

“왕비님, 이 사막의 기적은 이 크기가 다 자란 게 맞습니다. 그래서 식물 능력자들이 아무리 능력을 써도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거고요.”

“하지만 제가 봤던 사막의 기적은 훨씬 컸습니다.”

“아마 유사한 다른 종이었거나, 혹은 한 뿌리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한 뿌리가 아니라고요?”

“네, 이 식물에 대해 조사해보니까 이 식물은 번식할 때 모체에서 또 다른 뿌리가 자라나 붙어 있는 상태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왕비는 말없이 화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랐던 건 커다란 성장이기도 했지만, 저렇게 꽃이 핀 상태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왕궁에 있던 정원사들이나 온실 근무자들은 모두 사막의 기적을 죽이면 죽였지, 저렇게 싱싱하게 키워내지 못했다. 게다가 작고 예쁜 보라색 꽃이야말로 그녀가 보고 싶었던 모습이었다.

왕비가 흔들리는 것 같자, 아비게일은 초조해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사막의 기적을 가리키며 외쳤다.

“어쩌다가 꽃을 피운 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게다가 다 커서 능력으로 더 자라지 않는 거였다니. 그저 능력이 통하지 않는 건데 아무렇게나 하는 변명 아닌가요?”

리아는 아비게일 쪽으로 시선을 두지도 않았다. 식물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 하지만 왕비도 아비게일과 같은 의문을 가진 채 리아를 바라보았다. 리아는 그녀를 오래 궁금하게 하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제 능력은 식물을 자라게 하는 것 외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꽃이 피는 식물이든 아니든 제가 원한다면 꽃이 피게 할 수 있죠. 그 능력을 사용한 결과가 눈앞에 보시는 대로입니다.”

선명한 보랏빛의 꽃. 그 꽃이 바로 리아가 능력을 사용했다는 증거였다.

“원하신다면 여기서 한 송이 더 피워드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리아의 표정을 보며, 왕비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굳이 시켜볼 필요도 없었다. 아비게일은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렇게 싱싱하게 키울 수 있었죠?”

왕비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그녀의 식물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보는 걸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직접 키우기도 하고, 생장법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직접 온실을 세운 것이기도 했다.

“그건 비밀입니다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