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비겁한 변명 (2)
리아는 자신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다. 귀찮은 사교 파티를 가야 할 경우 더더욱. 그녀는 여타 귀족 아가씨들과 달리 꾸미는 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예쁘게 꾸미는 것은 나름의 전투복이나 다름없었다. 거울을 보고 화장대에 앉은 리아는 재클린에게 평소에 단 한 번도 하지 않던 주문을 했다.
“이왕이면 어디도 꿀리지 않게 해줘.”
“아가씨, 또 그런 레이디답지 않은 말투를…. 하지만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드리겠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클린의 실력은 믿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데 조금 귀티가 나기는 한다,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리아를 전에 한 번 성년식 때 그야말로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로 빚어낸 전적이 있었으니까. 재클린의 화려한 손길을 받으며, 리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오늘은 리아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정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잠시 마음이 약해져 그가 보고 싶었다. 그는 궁에서 하루가 멀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별 중요한 용건은 없는 일상을 적어 내린 편지였다. 하지만 마지막엔 반드시 같은 말을 적었다.
- 보고 싶습니다.
그를 떠올리자, 리아는 저도 모르게 달뜬 한숨을 내쉬었다. 끊임없이 입술을 찍었던 감촉은 며칠이 지나도 생생했다. 오늘 최선을 다해 꾸미는 데 그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도 조금 있었다.
‘퍼스 님….’
***
그들이 무대로 선택한 날은 왕비의 탄신 축하 연회였다. 가까운 날짜에 큰 연회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외부에 있던 리아가 당당하게 왕궁에 들어올 수 있는 핑곗거리가 되어줬으므로. 사이키델리아의 많은 거물급 귀족들이 모두 모이는 행사였다.
리아는 백작 가 사람이었으므로, 당연히 파티에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퍼스 또한 알폰스 왕자의 보좌관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수많은 마차가 차례로 왕궁에 들어갔다. 리아가 페넬로페 백작 가의 막내 여식 신분으로 궁에 들어가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성인이 된 이후, 그녀는 딱 한 번의 호기심으로 알폰스의 생일 연회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정신없는 연회에 질려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 결심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자청해서 연회에 참석하게 되다니. 아이러니했다.
“창문을 닫거라. 비가 세차게도 오는구나.”
흙탕물이 튀는 걸 걱정할 법도 한데, 리아는 겁 없이 창문을 열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비가 오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더 긴장이 되었다. 왕궁에 가면 능력자들이 날씨를 조절하기 때문에 더 이상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떨리느냐?”
“떨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오늘 밤에 그녀가 다시 왕궁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가 갈릴 터였다. 퍼스는 자신을 믿으라며 확신에 찬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고 리아 또한, 스스로를 믿기로 했다.
***
어느덧 리아가 탄 마차에서 내릴 때가 되었다. 왕궁 안에는 마차를 타고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잠시 비를 맞아야만 했다.
“어서 오십시오.”
문이 열리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퍼스 님?”
“잠시나마 마중을 나와봤습니다.”
그는 우산을 들고, 리아가 처음 왕궁에 왔던 날처럼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날과 다른 것은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와 다정한 태도였다. 리아는 웃으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자네가 마중까지 나올 줄은 몰랐군.”
“어서 오십시오, 페넬로페 백작님.”
퍼스가 들고 있는 우산에는 리아가 들어왔기 때문에, 백작은 시종이 든 우산에 들어갔다. 그의 시선은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에 꽂혔다. 민망해서 리아가 놓으려고 했지만, 퍼스는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더욱 꼭 잡았다.
“난 인사할 사람이 많으니 먼저 들어가 있으마. 천천히 와도 된다.”
백작은 두 사람을 배려해 먼저 왕궁으로 들어갔다.
“감사해요. 곧 따라갈게요.”
퍼스와 리아는 손을 맞잡은 채로 왕궁의 정문을 천천히 지나갔다. 왕궁의 정문에서 연회장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다만 최대한 늦게 도착하기를 바라며 느리게 느리게 걸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매일같이 편지하셔놓고서는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래도요. 리아 양의 입으로 듣고 싶으니까요.”
민망한 말을 잘도 했다. 리아는 대답 대신 얼굴을 붉혔다. 퍼스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조용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리아도 어쩔 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주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다. 자제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마구 피어올랐다.
“제가 생각한 가설이 맞을지 알아보고 싶어서 아버님의 서재를 좀 뒤졌습니다. 거기도 없는 서적을 찾아서 좀 돌아다니기도 하고요.”
“역시 쉬는 동안에도 식물 생각뿐이셨군요.”
그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능청스레 대답했다. 리아는 그와 바닥을 번갈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큰 결심을 한 듯 양 주먹을 쥐고 말했다.
“퍼스 님 생각도… 했어요.”
“그래요? 얼마나 자주 하셨습니까? 사막의 기적보다 자주였을까요?”
장난스레 대답했지만, 묘하게 가시가 있는 말이었다. 리아는 입을 삐죽 내밀고, 그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아, 아픕니다.”
전혀 아프지 않은 어투였다. 어느새 왕궁 안쪽으로 진입해서, 그는 우산을 접고 물기를 툭툭 털었다. 안쪽엔 이미 들어온 많은 귀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막 왕궁으로 들어온 커플에게 지대한 관심을 두었다.
“너무 많이들 보는 거 같은데요.”
“그러라고 일부러 마중 나온 겁니다.”
“보여주려고 마중을 나오셨다고요?”
“그럼요. 그래야 여기 있는 둘도 없는 아름다우신 영애가 제 연인이라는 사실을 다들 알죠.”
힘껏 꾸민 것을 그가 알아봐 주었다. 기쁜 한편 민망하기도 해서 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퍼스는 금세 그녀가 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녀의 허리를 당겨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과시하는 겁니다. 그저 매너 좋게 마중 나온 사람이 아니란 걸 증명해야죠.”
그냥 네가 귀여웠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그의 나쁜 버릇이었다. 이 행동도 계산이었다는 말에 바로 그녀의 입술이 튀어나왔다. 그가 진짜 계산한 부분은 바로 이쪽이었다.
쪽.
“으으읏!”
입술에 와닿는 감촉에 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인가 봐! 어떻게 왕궁 한복판, 그것도 이렇게 많은 귀족들이 오가는 곳에서 이럴 수 있지?’ 수많은 질문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너무 놀라서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퍼스는 쿡쿡 웃으며 리아를 연회장 입구 쪽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입장을 같이하려고 백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흠흠. 이제 내 딸을 받아가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리아가 얼어 있는 동안, 퍼스는 잡고 있던 손을 백작에게 내밀었다. 에스코트 받는 상대가 백작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채 인지하기도 전에 입구에 서 있는 자가 입장을 알렸다.
“첼리아 페넬로페 백작과 리아 페넬로페 영애 드십니다!”
페넬로페 백작은 페르디난드 공작과 비길 만큼 강한 세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연히 연회장 내의 시선이 쏠렸다. 이 점 또한 리아가 원래 연회를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순식간에 백작 옆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페넬로페 백작! 오랜만이오.”
“따님이시군요.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백작님,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리아는 잠시 인사를 하다 금세 핑계를 대고 연회장 구석으로 향했다. 이대로 있다간 백작과 친해지려는 사람들에게 잡혀 빠져나올 수 없을 터였다. 도착한 곳은 우연히도 음식이 있는 곳이었다.
“앗, 디저트.”
백작 가의 요리사는 디저트를 잘 내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재클린의 사주를 받은 것이었다. 단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 이가 썩는다는 이유였다. 재클린은 하여간 아직도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했다. 리아는 작은 핑거푸드 몇 개를 입에 담았다.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되면 먹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니 지금 많이 먹어둬야 했다. 한창 금지된 단맛을 즐기고 있을 때,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누구야, 페넬로페 영애 아니신가요?”
연회에 오면 당연히 볼 줄 알았지만, 별로 마주치고 싶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그 인물이 가까이 오니, 달콤하다 못해 코를 막고 싶을 정도로 진한 향수 냄새가 났다. 리아는 입을 끌어올려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냈다.
“안녕하세요, 페르디난드 영애.”
“어떻게 오셨나요? 초대장도 받지 못하셨을 텐데.”
“왕비님께서 초대장을 넉넉하게 보내주셨답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원래 영향력이 있고, 사교계 데뷔를 한 귀족 여식이라면 이름이 적힌 초대장을 받기 마련이었다. 리아는 이번에 아비게일의 말처럼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백작의 이름으로 여러 장의 초대장이 도착한 것도 사실이었다. 영향력이 있는 귀족이라면 본인 외 다른 사람도 초청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사이키델리아의 관례였다. 이름 없는 초대장으로 들어왔다는 말에 아비게일 뒤에 있던 영애 몇 명이 대놓고 리아를 비웃었다. 아비게일의 추종자 격인 영애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리아를 비웃을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오로지 아비게일만 믿고 저렇게 리아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영애들을 재밌게 해드렸는지 모르겠네요.”
“페넬로페 영애, 어떤 의미론 정말 대단하시네요.”
“맞아요. 저라면 절대 지금 왕궁에 못 들어올 텐데 말이죠. 그저 저택에 박혀서 반성하고, 자숙할 때 아닌가요?”
사막의 기적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크게 사건이 터졌으니 소문이 나는 게 당연했다. 소문이 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비게일이 말했을 게 분명했고.
“글쎄요. 저는 떳떳하니까요.”
“떳떳하다고요? 왕비님께서 아끼는 식물을 해치기까지 하셔놓고서요?”
리아는 아비게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왕궁에서 쫓겨난 명목은 사막의 기적 관리 소홀이었다. 사막의 기적에 손을 댄 게 아니라.
“확실하지 않은 말씀을 하시네요.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리아 양이 관리하던 식물만 해를 입었으니, 당연히 리아 양이 한 일이 아닌가요? 확실한 것 같은데요.”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범인처럼 생겼으니까 넌 범인이야 같은. 그런 식으로 수사하다간 이 나라에 조금만 눈초리가 사나운 사람이라도 다 잡혀가겠어요.”
역시 그녀가 배후인 게 맞았다. 그녀의 의도는 자신이 사막의 기적을 해친 범인으로 오해받는 것이었다. 사건의 진위를 파헤치기도 전에 끝나버려서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지만. 어찌 됐든 그녀가 목적한 대로 리아는 왕궁에서 쫓겨났다. 아비게일은 이제 자신에 대한 불호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며 숨기지도 않았다. 리아는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도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싫었다.
“지금 퍼스 님께 차였다고 제게 이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