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67)화 (67/75)

#67. 비겁한 변명 (1)

본가로 돌아와서 좋은 점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제일은 식사였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호화로운 식단이었다. 지금까지의 리아는 한 번도 자신의 집 식단이 호화롭다고 인식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왕궁에 있다가 페넬로페 저택의 식당에 들어서니 메뉴가 식사에서 만찬 수준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의 매일 빵과 수프였는데 이렇게 호화로운 식단을 먹어도 되나 싶어요.”

“동감이야. 특히 거기 주방장은 더 달라고 해도 절대 더 안 준다니까.”

“너희들이 배가 불렀구나. 나가면 굶어 죽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한심한 소릴.”

“네, 네. 저희가 바로 그 건방진 귀족 나부랭이입니다그려.”

루퍼스와 리아는 왕궁을 벗어나 저택에서 오랜만에 고기 맛을 보고 기뻐했다. 잠깐 감탄한 것을 가지고 찰리는 바로 두 사람을 나무랐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풍경이었다. 백작은 세 사람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웃기만 했다.

리아가 저택에 돌아온 후, 그녀를 걱정한 찰리와 루퍼스는 기사단에 바로 휴가 신청을 냈다. 가족들의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아니면 며칠 전 다녀간 그자의 덕분인지 리아는 눈에 띄게 기운을 차렸다. 매일같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니, 세 자녀 모두 아직까지도 마냥 어린아이만 같았다.

“둘 다 내일은 다시 기사단으로 돌아가거라.”

“아버님.”

“루퍼스, 네 실력은 아직 멀었다. 그런데 이렇게 훈련을 놓고 있어도 되겠느냐?”

백작의 지적에 루퍼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실력은 아직 형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찰리 말고도 다른 실력자들을 따라잡기엔 아직 수련이 많이 필요했다.

“그리고 찰리. 부기사 단장씩이나 되는 자가 기사단을 내팽개치고 언제까지 있으려고 그러느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하지만.”

찰리는 말을 잇는 대신 리아를 바라보았다. 리아는 안심하라는 듯 밝게 웃어 보였다. 두 오라버니 모두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들, 제 핑계 대고 그만 쉬시지요. 저도 이제 성인입니다. 걱정을 살 나이는 지났다고 보는데요.”

“리아도 이렇게 말하지 않느냐. 다 큰 여동생을 언제까지 걱정하려고. 셋 다 혼인만 하면 좋으련만….”

“아버님….”

리아는 슬쩍 백작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왕궁에 다니는 동안 세 사람을 소개받으면 한동안 혼인에 관해 말을 꺼내지 않겠다는 거래는 성립되지 않았다. 리아가 중간에 왕궁에서 퇴출당했기 때문에. 찰리와 루퍼스도 식사에만 집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들을 보며 백작은 끌끌 혀를 찼다. 어떻게 자식들 모두 혼인할 마음을 먹질 않는지, 원.

“아, 아닌가. 리아는 상대가 있는 모양이더구나.”

“예?”

백작의 말에 깜짝 놀라서 리아는 그만 입에 있는 걸 뱉을 뻔했다. 루퍼스와 찰리는 백작이 말한 상대가 누군지 깨닫곤 인상을 썼고.

“지난번에 찾아온 퍼스 보좌관, 맞지?”

직접적으로 백작에게 퍼스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리아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가 보고드린다며 말하더구나. 세 번째 상대는 자신이고 더 이상 상대를 찾으실 필요가 없을 거라며 말이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에 쥔 포크에 힘을 줬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미리 말을 해달라고!’ 그녀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식탁에 고개를 떨구었다. 심지어 퍼스가 백작을 만난 건 리아를 만나러 온실에 찾아오기 전이었다. 농담이라고 하더니, 처음부터 거절당할 거라곤 생각도 안 한 게 분명했다. 실제로 거절하지 않았지만. 왠지 분했다.

“전 그 보좌관 별로입니다.”

찰리는 대놓고 반대 의사를 밝혔다. 애초에 그는 케빈과 리아가 잘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은 친구 사이라고 우겼던 퍼스와 잘된 모양이었다. 축제 때부터 생각했지만 그는 퍼스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루퍼스와 찰리의 의견이 같았던 적은 별로 없었다. 루퍼스가 의견이 강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형과 다른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퍼스 님을 싫어하시는데요?”

리아는 쑥스러워서 사귀는 사이라는 말에 긍정도 못 한 주제에, 두 오라버니가 반대하는 건 참지 못했다.

“기생오라비 같이 생겼다.”

“말하는 게 재수 없어.”

각기 다른 이유였지만, 서로가 말하는 이유에도 공감했다. 그냥 생긴 것부터 말하는 것, 움직이는 것 전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이 너무 심하시잖아요!”

퍼스에 대해 심하게 말하는 두 사람 때문에 리아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 이번엔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였다. 그녀는 퍼스의 선이 가는 외모도 좋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무심하면서 제게만 다정한 말투도 좋았다. 그걸 제 친 오라비라는 두 사람이 저렇게 매도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리아, 화낼 것 없다.”

“하지만!”

“저 두 사람 모두 본능적으로 느껴서 그렇단다. 그가 자기 여동생을 빼앗아 갈 거라고.”

백작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리아는 눈만 끔뻑였다. 그사이, 의미를 알아들은 두 오라버니는 반발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버님.”

“전 끝까지 반대할 거예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글쎄, 난 찬성인데.”

갑자기 떨어진 백작의 폭탄선언에 세 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

“아버님!”

“아무리 빨리 혼인시키고 싶으시다지만 너무 아무나 허락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제야 리아는 백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는 퍼스와 리아가 곧 혼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오라버니들은 그렇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고. 퍼스가 좋긴 했지만,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터였다. 그와 혼인하는 상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나라니? 그는 제1 왕자의 보좌관이다. 그가 대를 이어 다음 왕이 된다면 그는 재상이 될지도 모를 일이고.”

그건 궁에서 일하는 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현직 재상은 따로 있지만, 퍼스는 왕의 제1 보좌관으로서 이미 실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현왕에게도 알폰스에게도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었고.

“게다가 확실한 일 처리도 마음에 들고.”

과정이 어찌 되었든 그는 결론적으로 리아의 신랑감을 찾아냈다. 설령 그게 자신일지라도. 게다가 백작은 자신감 넘치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 리아 양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맞춰드릴 자신 있습니다. 실제로 리아 양 자신도 모르는 취향을 찾아내서 소개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백작을 상대하는 내내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있는 이유는 거만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이유 있는 자신감이었다.

- 리아가 만약 자네에게 데릴사위로 들어와 달라고 한다면? 어쩔 건가?

백작 나름의 시험이었다. 처음부터 알폰스와 백작과의 연줄을 위해 리아를 왕궁에 들인 자였다. 차선책으로 본인과 리아의 관계를 엮으려고 한 걸지도 몰랐다.

- 리아 양이 원한다면 하겠습니다만 찰리 님과 루퍼스 님이 안 좋아하실 것 같군요.

정중한 거절이었다. 게다가 이유도 그럴듯했고. 무엇보다 리아 말이라면 정말 무엇이든 따를 것 같은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 내 딸이긴 하지만 좀 모자란 구석도 많은데. 자넨 정말 괜찮은가?

- 네, 리아 양은 제게 충분히… 차고 넘치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퍼스의 표정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말 중 가장 신뢰가 가는 부분이었다.

“여러모로 찬성이다.”

“아버님!”

식사를 하던 것도 잊고, 리아가 백작에게 달려왔다. 그러곤 백작을 꼭 껴안았다.

“녀석, 다 커서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자신에 대한 칭찬도 아닌데 울먹이며 좋아하는 리아였다. 백작은 그녀를 마주 안고 등을 토닥였다. 두 아들 녀석은 부러워 죽는 표정이었다.

“아버님,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해보아라.”

리아는 백작에게서 몸을 떼고 똑바로 섰다.

“저 왕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리아!”

루퍼스가 반대하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가 왕궁에서 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에라도 모두 엎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널 밀쳐낸 곳이다. 그래도 가고 싶으냐?”

백작 또한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리아가 왕궁 생활을 좋아했다는 걸 알았다. 깊은 상처를 받았어도 돌아가고 싶을 정도라면 인정해주고 싶었다.

“돌아가서 꼭 살리고 싶은 식물이 있어요.”

그녀의 눈빛은 곧고, 정직했다. 왕궁에 들어가고 싶다고 떼쓰던 몇 달 전과는 달랐다. 어느새 이렇게 커버린 건지.

“그래, 네가 그걸 원한다면.”

루퍼스와 찰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이 백작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고 만 게 불만이었다. 그들은 왕궁에 리아를 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사건의 전말을 듣는 순간, 모함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미 왕비가 궁에서 내쳐버린 탓에 사건을 조사해달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걱정되어 휴가를 내고 저택에 와보니 리아는 상처받아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리아를 궁지에 몬 범인이 궁 내부에 있는지 외부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궁에 들어간다면 같은 위기에 처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그들은 두 번 다시 여동생이 상처 입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찰리는 표정을 굳혔다. 설령 백작이 허락했다고 해도, 자신은 리아를 왕궁으로 보낼 마음이 없었다. 자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루퍼스도 말은 안 했지만 같은 마음이었다. 리아는 조용히 두 오라버니를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마주 보게 된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라버니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리아는 한 호흡을 멈추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제가 아니라는 건 큰오라버니나 작은오라버니 두 분 모두 잘 알고 계시잖아요?”

리아는 가볍게 윙크했다. 자신감에 찬 태도였다. 당하면 복수하라는 건 어릴 때 두 사람이 리아에게 가르친 것이었다. 어딜 가서도 그녀가 주눅 들지 않도록. 이제 두 사람도 인정해야만 했다. 리아가 상처를 딛고, 일어났음을. 그리고 곧 두 사람의 손을 떠나 멀리 날아갈 것을.

“하지만 어떻게 궁에 다시 들어가게?”

하필 리아에게 출궁을 명한 게 왕비였다. 리아가 다시 왕궁으로 들어가려면, 왕비가 자신의 말을 번복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웬만해서는 자신의 말을 번복할 리 없었다.

하지만 리아는 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다들 절 이렇게 걱정하고 계시니 당연히 도와주실 거죠?”

가족들은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어쩐지 그녀의 미소가 그녀의 연인인 퍼스가 웃는 모습과 겹쳐 보였다. 몹시 확신에 차 있었으며, 몹시 수상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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