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무성한 덤불을 헤치고
“아….”
알폰스의 첫사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꽃 알레르기가 생기게 된 원인인.”
“맞네. 고작 일곱 살 때였지. 꽃을 꺾어 가서 고백했는데, 자기는 꽃 따위 싫다며 단칼에 거절하더군.”
퍼스가 왔을 때는 알폰스에게 이미 꽃 알레르기가 생기고 난 후였다. 퍼스의 입궁 당시 열 살이었던 알폰스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여자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발칙한 꼬마였다. 그가 약혼녀를 짝사랑하다니. 지금까지 퍼스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알폰스에 관한 건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하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밝히게 되셨습니까? 퍼스의 입에서 하마터면 지나치게 솔직한 발언이 튀어 나갈 뻔했다.
“자네가 할 말이 대충 뭔지 아네. 그 일은 단순한 계기에 불과해. 난 그저 눈앞에 있는 레이디들을 모두 소중히 생각할 뿐이야.”
“페르디난드 영애를 사랑하시는 것 아닙니까?”
“어린 날의 추억일 뿐이야. 약혼녀니까 누구를 좋아하는지 파악하고 있으려고 할 뿐이고.”
퍼스가 보기엔 그저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알폰스의 끝나지 않은 첫사랑이 아닌 리아의 상황이었다.
“그럼 이제 페르디난드 영애가 리아 양을 저주했다는 걸 믿어주시는 겁니까?”
“처음부터 의심하지도 않았네. 자네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다만 이유를 물어본 것뿐이지.”
알폰스는 퍼스를 온전히 믿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퍼스만큼 온전한 알폰스의 사람은 또 없었다. 퍼스 또한 믿고 있었다. 중요한 순간에 알폰스는 자신을 믿어줄 것이라고. 그랬기에 단숨에 그의 집무실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럼…!”
“하지만 역시 안 되네.”
“이번엔 또 어째섭니까?”
두 번이나 거절당하자, 퍼스는 울화가 치밀었다. 방금까지 자신을 믿어주겠다는 말은 뭐였단 말인가.
“나야 자네를 전적으로 믿네. 하지만 어마마마는 어떻게 설득할 작정인가? 봤다고 할 작정인가? 그걸 누가 믿겠나?”
“제 능력이라고 밝히면.”
“자네의 능력은 궁에서 나와 전하, 그리고 능력 관리 부서장밖에 모르네. 게다가 자네의 능력은 내 숨겨진 무기나 마찬가지야. 그걸 모두에게 밝히면 되겠나?”
애초에 퍼스가 입궁하게 된 이유도 그것이었다. 현왕은 퍼스를 왕자의 말동무로 궁에 들였다. 하지만 실상은 그의 능력이 나중에 왕자에게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하여 비싼 값에 주고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퍼스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베르시에 저택에서 나와 왕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궁에서 그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가지고 있는 사이코메트리 능력 외에도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 항상 왕자님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퍼스는 알폰스에게 절실하게 한 번 더 부탁했다. 그가 알폰스에게 이와 같은 부탁을 한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항상 무감한 얼굴로 세상만사에 관심이 없는 듯 살던 그였다. 알폰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상을 밝히지 말라는 게 아니야.”
“네?”
“증거를 가져오게.”
“증거… 말씀이십니까?”
“그래. 페넬로페 영애는 내가 추천한 사람이야. 이대로 진상을 밝히지 않으면 내 명예도 흠집이 나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오게.”
알폰스는 손가락을 뻗어 퍼스를 가리켰다.
“자네에겐 사이코메트리 말고도 다른 능력이 많지 않은가.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겠지?”
알폰스가 지적한 건 당연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리아가 강제로 출궁하면서 퍼스는 몹시 흥분했다. 그러니 자연히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해졌다. 고작 그 정도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니. 퍼스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상대는 페르디난드 가문이야. 준비는 철저하게, 알겠지?”
“염려 놓으십시오.”
“그래. 그럼 이제 중요한 건 페넬로페 영애 본인의 의지야. 내가 페넬로페 저택에 가서.”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퍼스는 알폰스의 말을 가로막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가 아무리 좋은 상관이라고 해도 이것만은 인정할 수 없었다.
“흠. 페넬로페 영애의 일에 묘하게 흥분한다 했더니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나?”
“그 당시에는 아니었습니다만 곧 사실이 될 겁니다.”
그러니 넘보지 말라는 의미로 퍼스는 알폰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의미는 아무리 둔한 알폰스라도 금세 알 수 있었다.
“곧? 어마어마한 자신감이군. 좋아, 내가 또 부하의 여자는 건드리지 않아.”
“감사합니다.”
알폰스는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미소였다.
“재미있군. 다녀와서 보지.”
***
“퍼스 님?”
퍼스는 하라는 설명은 하지 않고, 혼자 회상에 잠겼다. 리아는 멍해진 그의 눈앞에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장난기가 발동해, 그의 어깨에 고개를 얹었다. 얼마나 깊게 생각하는 건지, 바로 지척에 그녀의 얼굴이 있는데도 퍼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해도 반응이 없다니. 당황한 리아는 눈만 끔뻑였다.
“방심하면 안 되죠.”
쪽.
순식간에 고개를 돌린 퍼스가 그녀의 턱을 들어 입을 맞췄다.
“먼저 멍 때린 게 누군데요!”
쑥스러움과 놀라게 해주려다 역으로 당했다는 분함에 리아는 씩씩거렸다. 한 번 물꼬가 트이니 그는 틈만 나면 입술을 가져다 댔다.
“곧 해가 지겠군요.”
“어두워지면 산은 위험하니까 빨리 내려가야겠어요.”
하지만 둘 다 자리에서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대로 퍼스가 궁에 돌아간다면 언제 볼 수 있을지 몰랐다.
“리아 양, 왕궁에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으십니까?”
왕궁 이야기를 꺼내자 리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퍼스에게서 몸을 떼고, 다시 계곡을 바라보았다.
“좀 두려워요, 사실.”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리아 양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 잘못이 아닌지 어떻게 확신하세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럴 분이 아니시니까요.”
확신에 찬 어조였다. 퍼스는 능력으로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령 능력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리아를 의심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녀가 얼마나 식물을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감사합니다, 퍼스 님. 전 그래도 무서워요. 제가 맡았던 사막의 기적만 뒤집혀 있었어요. 일부러 절 내쫓기 위해서요. 그건 궁에 있는 누군가가 절 미워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떨고 있는 리아의 손을 퍼스가 양손으로 꼭 맞잡았다.
“궁에는 그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저도 있고, 리아 양을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는 메이 플라워 양도 있습니다. 게다가.”
퍼스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그러고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케빈 아크우드 님도 계시고요.”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그의 표정을 보니 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궁에서 많은 걸 배우고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진범은 궁 밖에 있는 아비게일 페르디난드 영애… 같습니다.”
아직 증거를 전부 찾지 못했다. 범인임을 확신했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페르디난드 영애가요?”
“네. 사실 그때 후원에서 리아 양이 빠져나가시고 그녀가 제게 고백했습니다.”
얼핏 짐작은 했지만, 그의 입에서 사실이 되어 나오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거절했음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자신과 손을 맞잡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분명하게 거절했습니다.”
혹여 리아가 쓸데없는 생각을 할까 봐 그는 확실하게 못 박았다.
“알아요. 그래서 화가 나셨군요?”
“네, 제게 리아 양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협박을 하시더군요. 설마 했는데 이런 일을 벌이실 거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리아 또한 혹시나 퍼스가 자책을 할까 봐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행여 퍼스 님의 탓이란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그렇다고 영애의 고백을 받아들이기라도 했다간 제게 혼나셨을 거예요.”
분명 다부지게 말했는데, 이상하게 퍼스의 얼굴이 풀렸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살며시 얼굴을 붉히며 속삭였다.
“리아 양에게라면 혼나보고 싶습니다.”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귓가에 그의 숨결이 닿자, 짜릿한 감각이 내달렸다. 민망한 마음을 숨기려고 일부러 퍼스의 팔을 찰싹 내리쳤다.
“아픕니다.”
“아프라고 때리는 거예요.”
“이것도 혼난 거에 속하는 걸까요?”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시라니까요! 그건 혼난 게 아니고 맞은 거죠!”
장난을 치던 두 사람은 해 질 녘이 되어가자 서둘러 산에서 내려왔다. 서두르다 보니 리아는 자주 발을 헛디뎠다. 하지만 퍼스가 손을 꼭 잡고 있어서 계속해서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우왓.”
“조심하세요.”
두 사람이 지나고 있는 바위에는 흰색의 식물이 길게 뻗어 있었다. 심지어 서로 덩굴처럼 얽혀 있기도 했다. 걷기 힘들 만도 했다.
“줄기인가요? 걷기 힘들게 생겼네요.”
“아, 이것들은 다 뿌리예요.”
“뿌리라고요?”
퍼스가 보기에는 그저 줄기처럼 생긴 것들이었다. 뿌리라고 하기엔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긴 형태였다. 말라서 다 죽어가는 것처럼도 보였다.
“제가 알던 것들과는 많이 다르군요.”
“이 식물은 뿌리로 물을 흡수하지 않거든요. 기생식물이라서요. 이 뿌리는 오로지 바위에 매달리기 위한 용도로만 쓰이는 거예요.”
식물 이야기를 하니 리아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좋아하는 분야의 이야기를 하니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퍼스는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럼 뿌리가 떨어지면 죽나요?”
“아뇨. 뿌리가 떨어지거나 훼손되어도 본체는 살아 있죠. 근본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부분이 아니니까요.”
“그렇습니까. 왠지 비슷한 걸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사실 그가 보기엔 다 그 식물이 그 식물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설명과 함께 들으면 조금은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그 존재감이 확실하게 다가왔다. 모든 것이 리아를 통하면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발밑을 신경 쓰느라 그런지 리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퍼스가 먼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리아 양?”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며 리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 저 알 것 같아요. 사막의 기적을 키우는 방법.”
갑작스러운 말에 퍼스도 함께 혼란스러워졌다.
“갑자기 말입니까?”
“네, 어쩌죠…. 케빈 님께 대신 좀 전해주시겠어요?”
리아는 묘하게 초조한 듯했다. 자신의 문제에서는 소극적이더니, 식물의 문제가 되니까 무척이나 적극적인 태도였다. 어떻게든 빨리 해결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퍼스는 한 번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럼 리아 양이 다시 왕궁에 들어와서 사막의 기적을 돌보시면 되겠네요.”
“제가 어떻게요?”
“먼저 오해를 풀어야지요. 리아 양, 입궁하고 싶다고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준비는 제가 다 해놓겠습니다.”
퍼스의 말에 리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입궁을 하는 건 조금 고민이 되었다. 오랜 꿈이었지만 한순간에 박살이 나고 나니 허무해졌다. 하지만 사막의 기적만은 반드시 제 손으로 살려보고 싶었다.
“입궁, 하고 싶어요.”
어느새 두 사람은 숲의 외곽에 다다라 있었다. 이제 저 풀을 헤치고 나가기만 하면 도착이었다. 퍼스는 웃으며 리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