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밀어
퍼스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꽉 껴안았다. 틈 없이 붙어 있는 몸에서 서로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압니다. 저 좋아하시는 거.”
열심히 고민해서 한 말이었는데, 퍼스에게서 나온 대답은 거만했다.
“아셨다고요? 저도 방금 알았는데요. 제가 퍼스 님을… 조, 좋아한다는 걸.”
리아는 제 입으로 방금 말해놓고도 다시 말하기가 쑥스러운지 더듬거렸다. 퍼스는 그런 모습까지도 귀여워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전 질 것 같은 승부는 시작도 안 합니다.”
사실 어렴풋한 추측일 뿐이었다. 그녀에게 손을 댈 때마다,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느껴졌다. 다만 그 호감이 진짜 이성적인 호감인지까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의 허세였다. 지금도 그녀의 본심을 볼까 봐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기도 했지만, 혹시나 원하는 답이 아닐까 두려웠다. 그 증거로 리아를 끌어안은 손끝이 티 나지 않게 살짝 떨렸다.
“거짓말.”
리아는 곰곰이 생각하다 그의 말을 부정했다. 자신이 그렇게 티 나게 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얼마나 바보 같았을까! 그를 이렇게나 좋아하는데도 우린 그저 친구 사이라고 그렇게 열심히 부정하고 다녔는데.
“네, 거짓말입니다. 다리가 풀려서 그러는데 저 의자에 좀 앉아도 될까요?”
퍼스는 리아의 허락을 기다리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흔들의자에 앉았다. 문제는 리아를 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꺄아.”
막무가내인 그 때문에 리아의 몸이 의자 쪽으로 끌려갔다. 그는 자신이 먼저 앉고는, 그대로 리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그녀가 퍼스의 허벅지 위에 앉는 자세가 되었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퍼스는 그녀를 꽉 끌어안아 제 품에 다시 가뒀다. 놓으면 그녀가 어딘가 도망가버릴 것처럼.
“사람들이 이럴 때 이 말을 하는 거군요. 꿈만 같다고.”
리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퍼스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봤던 어떤 표정보다 지금이 제일 밝았다. 그는 무척, 행복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고백을 받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리아의 가슴 안쪽이 찌잉 울렸다. 리아는 퍼스의 머리를 꽉 끌어안고, 이마에 살짝 입술을 눌렀다. 작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퍼스는 금세 눈치채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허락입니까?”
무슨 허락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퍼스의 손이 올라왔다. 순식간에 리아의 고개를 당기더니 입을 맞춰왔다. 말캉거리는 입술의 촉감에 리아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에게 꽉 붙잡혀 있어서 도망갈 수 없었다.
게다가 처음 하는 키스인데도 기분이 너무 좋아서 몸에서 힘이 풀렸다. 너무 긴장해서 리아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살짝 퍼스가 입술을 떼자, 그녀는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숨을 쉬는 사이, 퍼스는 그녀의 볼이며 턱에 계속해서 입술을 붙여왔다.
“후응. 퍼스 님.”
몽롱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해서 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멍한 표정을 본 퍼스는 한 번 더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이번엔 아까보다 숨을 쉬기가 쉬웠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퍼스에게 몸을 붙였다.
“안 됩니다.”
“네?”
갑자기 그가 입술을 떼었다. 아쉬운 마음에 리아가 되물었다. 리아만큼 퍼스의 숨도 거칠어져 있었다.
“너무 자극하시면 위험합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리아는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취한 것처럼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눈의 초점은 풀려 있었다.
“아무래도 밀실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바깥에 걸을 만한 곳이 있을까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퍼스의 눈 또한 리아의 입술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실 더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은 시선을 강제로 입술에 고정한 것이었다.
이제 겨우 리아의 대답을 들은 직후였다. 게다가 이곳은 페넬로페 저택이었다. 리아의 아버지인 백작과 두 오라버니인 찰리와 루퍼스가 있었다. 그야말로 적진의 한가운데.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퍼스의 물음에 리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왜 밀실은 안 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바깥을 함께 산책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제가 산책하는 곳은 주로 저택 뒤쪽에 있는 숲이에요.”
“좋네요. 거기로 가시죠.”
뚫려 있기만 하면 어디든 괜찮았다. 빨리 이 열기를 식히지 않으면 더 이상 자제하기 힘들 것 같았다.
리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퍼스도 따라 일어나며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안내해주시죠.”
“네, 이쪽이에요.”
리아는 흘끔 퍼스가 끼고 있는 장갑을 보았다. 너무 꼭 붙어 있다 떨어지고 나니 뭔가 아쉬운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와 손을 잡는 것도 설레고 좋았다. 리아는 망설임 없이 숲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름이 가까워지니 들풀이 무성했다. 매번 와봤기 때문에 리아는 익숙하게 풀을 헤치고 나갔다.
“그러다 다치십니다.”
“항상 해오던 일인데요. 그리고 제가 해야 이 아이들이 다치고 나서 다시 자란답니다.”
그 말이 맞았다. 뒤돌아보니, 헤치고 온 자리의 풀들이 다시 자라났다. 오히려 더 쌩쌩해지는 것도 같았다. 깊숙이 들어가자, 사람이 걷는 길이 나왔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일부러 숲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만 풀이 무성하도록 해놓은 모양이었다. 평지로 가니, 리아의 연한 레몬 빛 치마가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치마 끝에 풀물이 들었네요.”
“아, 재클린이 잔소리하겠지만 괜찮아요. 항상 있는 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게 리아 양의 치마 밑단에 물이 들어 있었죠.”
두 사람은 동시에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도 평소처럼 산에서 놀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 언제까지 이렇게 계실 겁니까?
닿기만 해도 불쾌해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리아는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 죄송해요. 하지만 퍼스 님 그때는 제가 넘어져서 몸에 닿았다고 엄청 싫은 티 내셨잖아요.”
리아의 말에 퍼스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갑작스러운 지적에 당황한 탓이었다.
“그때는 그랬죠.”
“지금은요?”
리아는 일부러 잡고 있는 손을 흔들었다. 장난기 어린 웃음이 만면에 가득했다.
“지금은.”
퍼스는 힘껏 그녀를 당겼다. 리아의 몸이 저항 없이 끌려왔다.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처럼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계속 닿아 있고 싶을 정도로 좋습니다.”
너무나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두 사람 다 결국 참지 못하고 동시에 입술을 부딪쳤다.
***
두 사람은 리아가 자주 가던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가 리아가 맨날 앉아있던 자리였다, 수심이 얕은 곳에 있어서 발도 담글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발을 담근 채로 물이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물이 좀 차네요. 괜찮으세요, 퍼스 님?”
“네. 이렇게 계곡에 발을 담가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애초에 그는 산에 지나가려는 목적 말고 즐기려고 오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주위를 둘러보거나 여유를 가진 적도 없었고. 항상 상관인 알폰스를 챙기느라 주변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저 물에 햇살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고,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발밑을 스치는 차가운 물의 감촉과 맞잡은 연인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것도 좋네요.”
혼자였다면 설령 이 계곡을 지나갔어도 발을 담글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니, 더위에 지쳐 발을 담갔어도 계곡이 아름답다는 걸 느끼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지금 이 순간이 좋은 것은 바로 옆에 있는 리아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오셨어요?”
한참 전에나 해야 했을 질문을 이제야 꺼냈다. 퍼스는 왕궁 사람이었다. 왕궁에서 근무하는 자는 허락 없이 함부로 외출할 수 없었다.
“좋은 상관이 허락해주셔서요.”
“좋은 상관이요?”
그의 상관이라면 알폰스였다. 리아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퍼스가 그의 칭찬을 하는 걸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네, 제 생각보다 괜찮은 분이시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그는 뭐라고 설명할지 고민하며, 왕궁에서 나오기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말도 안 됩니다!”
리아의 처분이 결정된 직후, 왕비는 몸을 돌려 온실을 나가버렸다. 케빈은 나가는 왕비의 뒤에 대고 계속해서 부당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퍼스는 사건의 전말을 먼저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닥치는 대로 만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범인은 금세 알 수 있었다. 리아가 없는 동안 사막의 기적을 관리한 담당자였다. 하지만 동기가 불분명했다. 퍼스는 모르는 척, 그에게 부딪쳤다. 강한 힘으로 밀었기 때문에 그는 몸을 휘청였다. 잡아주는 척하며 그의 기억을 엿보았다.
- 아주 쉬워요. 그저 아무도 안 보는 틈에 저 식물을 뽑아주시기만 하면 돼요.
들어본 적 있는 얼굴과 목소리가 스쳐 지났다. 퍼스는 그 길로 알폰스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진상을 밝혀주십시오. 리아 양은 죄가 없습니다.”
다짜고짜 들이닥쳐서 하는 말이 저거라니. 알폰스는 그렇게 흥분한 퍼스는 처음 보는 것이라 놀랐다. 하지만 그는 이내 냉정을 찾았다.
“안 되네.”
“어째서입니까!”
“어떻게 알았다고 하려고 그러지?”
“제가 봤습니다!”
알폰스도 그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 그가 비싼 값에 왕궁에 팔려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었으니까. 그의 능력은 장차 왕자의 무기가 될 예정이었으므로 관계자 몇 명을 제외하고는 비밀에 부쳐졌다.
“범인은 리아 양이 하이버 지역에 가 있는 동안 대신 사막의 기적을 관리했던 담당자입니다. 사주한 건 아비게일 페르디난드 영애고요.”
생각지 못한 이름에 알폰스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약혼녀 이름이 언급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아비게일이라고?”
“네.”
“어째서 그녀가 그런 행동을 했지?”
알폰스는 퍼스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리아를 싫어할 만한 이유를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퍼스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아비게일이 리아에게 앙심을 품은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매몰차게 거절한 직후, 그녀는 바로 사막의 기적을 찾았다. 그러곤 담당자를 매수했다. 그러곤 태연한 얼굴로 저녁 식사 자리에 참가했다. 그 자리에서 왕비에게 자신이 보고 왔는데 사막의 기적 상태가 이상한 것 같다. 한번 보러 가시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시 자네 때문인가?”
뭐라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알폰스가 먼저 물어왔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가 눈치채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애초에 퍼스 본인조차 아비게일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그녀를 보고 있었으니까.”
이어지는 말에 퍼스는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알폰스는 제 약혼녀인 아비게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수많은 여자를 만나고 다닐 리가 없다고.
“그녀는 내 첫사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