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모든 일은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어째서 지금 이런 상태인 거죠?”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오후까지는 멀쩡했는데….”
“원인이 어찌 됐든.”
왕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리아를 노려보았다. 리아는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땅바닥으로 향했다. 혼란한 마음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지금 당장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관리자로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왕비님.”
앞서 나올 말이 무언지 대충 예상한 퍼스가 그녀를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왕비는 한번 결정을 내린 사항을 번복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리아 페넬로페 영애. 지금 당장 왕궁에서 나가주세요.”
너무도 충격적인 말에 순간 사위가 조용해졌다. 먼저 정신을 차린 케빈이 반대했다.
“책임이라면 리아 양의 상관인 제가 지겠습니다. 제가 그녀를 감독하고 있으니까요!”
“리아 양.”
이번에도 역시 왕비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셨겠지요?”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자신이 맡은 사막의 기적에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와중에 리아가 자각한 것은 딱 하나였다. 왕궁에서 근무하고 싶다던 자신의 덧없는 꿈은 이 순간부터 끝이라는 것.
“…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끄덕이는 일밖에 없었다.
***
그 후의 일은 리아의 기억에 잘 남아 있지 않았다. 왕비의 결정에 반발한 케빈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주변에서 필사적으로 말렸다. 아무리 제멋대로 하고 다니는 그라고 해도 왕족에게 거스르는 것은 그에게 하등 좋을 것이 없었다.
짐을 싸는 내내, 메이는 리아를 붙잡고 울었다. 그녀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메이에게는 힘이 없었다. 게다가 궁을 나서면 언제 볼 수 있을지 몰랐다. 메이는 외출이 허락되는 날 외엔 왕궁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리아는 입궁이 허락되는 날 외에는 왕궁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퍼스는 넋이 나가 있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믿고 기다려줘요. 반드시 당신에게로 갈게요. 왕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줄게요.’ 하지만 그의 말은 하나도 리아에게 와닿지 않았다. 이미 끝나버린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자신의 책임이라는데. 리아는 왕궁을 나서는 내내,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백작은 왕궁에서 돌아온 리아에게 무언가를 묻지도, 다그치지도 않았다. 다만 평소와 똑같은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백작은 리아가 돌아온 기념으로 환영 만찬까지 차리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리아는 거절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저 방에서 쉬고 싶을 뿐이었다.
리아는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인이 오래 없었던 방치고는 깨끗했다. 재클린이 계속 열심히 청소한 모양이었다. 짐 정리는 재클린에게 맡기고, 리아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묻었다. 이전이었다면 ‘신발은 신고 누우셔야죠! 아가씨, 피부 상하니까 엎드려 눕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등등 금세 날아왔을 잔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기운이 없는 리아를 배려해준 모양이었다.
“지쳤다.”
내뱉고 나니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리아는 모든 상황에 그저 지쳐 있었다. 변명을 하는 것도, 노력을 하는 것도. 모두가 소용없는 일이었다. 온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신발을 벗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내리 사흘 동안 리아는 잠만 잤다.
***
똑똑똑.
“리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리아는 살짝 잠에서 깼다. 어렵지 않게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둘째 오빠인 루퍼스였다.
“아직도 자?”
하지만 대답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못 들은 척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무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입을 열고 싶지도 않았고. 리아는 누에고치처럼 단단한 벽을 만들어 두르고, 아무에게도 열어주지 않았다.
***
갑작스레 방 바깥이 소란스러워, 리아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이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기다려줘.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리아야. 우린 리아가 그걸 떨치고 일어나길 기다려줘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며칠씩이나 밥도 안 먹고 저대로 굶어 죽는 꼴을 두고 보자는 거냐, 넌?”
“형은 너무 강제로만 하려고 해. 그러니까 리아가 자꾸 형한테 반발하는 거야.”
“네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난 리아를 깨울 거다.”
“형!”
루퍼스와 찰리가 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싸우는 건 일상다반사였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좀 심해 보였다. 쿵쾅거리는 소리로 보아, 복도에서 몸싸움이 난 듯했다.
“리아! 너 때문에 아버님께서 어떤 말을 듣고 계시는 줄 알아?”
“그만해, 형! 안 그래도 힘든 애한테 그런 얘기는 뭐 하려 해!”
좀처럼 큰소리 내는 법이 없는 루퍼스가 흥분했다. 하지만 체술로나 검술로나 그는 찰리를 이기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찰리의 호통이 이어졌다.
“리아도 알아야 해. 알아야 본인이 수습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형처럼 모든 사람이 의무감으로 똘똘 뭉쳐 있지 않다고!”
두 사람이 한동안 치고받는 소리를 듣던 리아는 결국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토록 바라던 문이 드디어 열렸는데도, 두 사람은 몸싸움을 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루퍼스가 먼저 리아를 발견했다.
“리아! 일어났구나.”
“너 이 자식, 한두 번 속을 줄 알고…. 정말 일어났구나.”
두 사람은 아주 오랜만에 보는 여동생의 얼굴을 보고 싸움을 멈췄다. 여동생의 얼굴이 아주 수척했기에 더욱 두 사람의 마음이 아팠다. 걱정되어 다가가자, 리아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렸다.
“뭐 먹고 싶니? 배고파?”
“원하는 게 있으면 이 오라비가 뭐든 구해다 주마. 말해라.”
말 많은 두 사람에 의해 리아의 목소리가 가려졌다. 결국 그녀는 두 손에 힘을 꽉 주고 모든 기력을 모아 소리쳤다.
“시끄러!”
갑작스레 리아가 소리치자, 둘 모두 입을 다물었다.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리아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드디어 기운을 차렸구나!”
“거봐. 이렇게 크게 소리칠 수 있는 정도잖아. 뭘 이대로면 굶어 죽는다고.”
귓가가 시끄러웠다. 두 오라버니가 제 일에 관심이 지대한 게 부담스러웠다.
“알겠어요. 뭐든 먹을 테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해주세요.”
리아는 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며칠간 쓰지 않은 몸이라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루퍼스가 그런 리아를 훌쩍 안아 들었다.
“빨리 내려가서 아버님께 씩씩하게 밥 먹는 모습 보여드려야지.”
“제가 애인가요?”
“아직 이렇게 속 썩이는 걸 보니, 애인 것 같은데.”
평소와 같은 루퍼스의 장난기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뒤따라오던 찰리가 계속 자신도 안을 수 있다며 중얼거렸지만 둘 모두 무시했다. 루퍼스가 리아를 식당에 있는 의자에 내려놓자, 추가 준비한 것처럼 바로 식사가 나왔다.
“다들 걱정하고 있었어.”
고개를 드니, 재클린을 비롯해 저택에서 일하는 이 몇 명이 감격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리아는 숟가락으로 수프를 한 숟갈 떴다. 방금 일어난 환자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럽고 따뜻한 수프였다. 보나 마나 재클린이 주방장을 못살게 굴었을 게 분명했다.
“맛있네. 고마워.”
리아가 인사하자, 재클린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모두 저택에서 어릴 때부터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왕궁에서 버티겠다는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기에 이제야 깨달았다. 두 달여 동안이었지만 집이, 사람들이 그리웠다는 것을.
***
그날 이후로 리아는 조금씩 원래 저택에서 살던 때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낮에는 주로 온실에 가서 책을 읽었다. 왕궁으로 가기 전, 능력으로 무성하게 키웠던 식물들은 어느새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제 보통의 온실 모습이었다. 왕궁의 온실에 비하면 아주 작았지만, 그녀에겐 충분히 아늑했다. 예전에는 식물 관련 서적만 읽었다. 하지만 지금은 애써 식물 관련 서적만 빼고 읽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런 생각 없이 뜻밖의 휴가를 즐기고 싶었다.
끼익. 끼익.
그녀가 온실에 자주 방문하자, 집사인 데브가 바로 테이블과 흔들의자를 준비해줬다. 저택의 모두가 그녀를 걱정하고, 배려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보호받기만 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무렇게나 집어온 책은 연애소설이었다. 평소였으면 집중해서 봤을 소설도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깐 글자가 흐려졌다 싶더니, 환청처럼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 리아 양.
왕궁의 모든 것들을 떠올리면 미련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중 가장 그리운 것은 역시 그 사람이었다. 낮고 정중하게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 가까이 다가설 때면 살포시 풍기는 그의 향기, 닿을 때마다 낯설고 설렜던 손바닥의 감촉. 모든 것들이 바로 옆에 있는 듯 선명했다.
“리아 양.”
그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에게서 멀어지고 나서야 이 감정의 이름을 깨닫고 말았다. 펴고 있는 책의 한 구절이 리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사랑. 사랑이었다.’
이왕이면 그에게 대답이라도 하고 왕궁을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궁을 나온 이상, 이제 그를 보기는 힘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리아 양!”
아까부터 계속된 환청은 멈추질 않았다. 어지간히 중증이었다.
“왜 저를 안 보십니까?”
부드럽지만 화난 어조의 목소리였다. 돌아보면 환청에 이어 환각까지 보일 것만 같았다. 리아는 끝끝내 책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때, 눈앞에 흰 잔영이 스쳤다. 순식간에 리아의 얼굴이 잡히더니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자 목소리처럼 화난 듯한 표정의 그가 보였다. 환각인가? 하지만 환각이라고 하기엔 그에게 잡힌 얼굴에 통증이 강하게 느껴졌다.
“아, 아파요.”
리아가 울먹거리듯 말하자, 곧바로 손에 힘이 풀렸다. 화난 듯했던 얼굴도 풀려 버렸다. 그제야 리아는 이게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리아 양이 절 보려고 하지 않으셔서요.”
죄송하다고 말은 하지만 내심 불퉁한 어조였다. 리아는 마음껏 눈앞의 남자를 살폈다. 윤기 나는 자줏빛 머릿결에 날카로운 턱선, 살짝 올라가 차가운 듯한 인상을 주는 눈매와 이를 가려주는 테가 얇은 안경까지. 기다렸던 사람이 맞았다.
“퍼스 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리아가 묻자, 퍼스는 천천히 눈을 휘며 웃어 보였다.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다정한 웃음이었다.
“절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요.”
그녀에게만 하는 능글거리는 말투까지. 완벽한 진짜 퍼스가 자신을 만나러 왔다. 가슴이 벅차올라, 리아는 망설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퍼스를 끌어안았다.
“리, 리아 양?”
“저도 퍼스 님이 좋아요!”
그 언젠가의 대답이었다.